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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23 농부의 아내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할까 (5)
우연한 기회에 40여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는 평택의 한 노인분의 일기 중 60년대 일기를 입력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 작업 중 <여성 노동>이라는 분야로 제가 쓴 글입니다. 물론 블로그 제목은 여기에서만 다는 것이구요. 제가 이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제 논문 주제인 간척과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였는데, 일기를 입력하다보니 농부의 아내의 일이라는 게 만만치 않아서 분석 항목으로 제안했지만, 참여자 중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덤으로 맡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하다보니 필~을 받게 되어서 재미를 붙이게 되었네요.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했던지라 거의 전적으로 과수원 일을 도맡아했던 어머니의 인생이 생각나기도 했구요. 필~을 받아서 쓴 글이라 블로그도 채울 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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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노동을 중심으로 농사일을 꾸려가는 소농(小農) 사회에서 농부의 부인은 단순히 집안 살림과 육아만을 담당하는 가정주부가 아니라, 생산과 소비의 양 측면에서 남편과 함께 집안 경제를 공동으로 이끌어가는 협력자일 수 있다. 신**씨 일기에는 소농 사회에서 농부의 부인이 맡고 있는 역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신**씨 부인은 농사일과 시장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농사 및 가사·육아를 제외한 집안일에서 여성이 참여하고 있는 일을 중심으로 일기를 모아보았다. 장에 나가 집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팔고 필요한 물건을 사오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에 부인이 맡고 있다는 점에서, 장 출입과 관련된 내용은 가계 운영에서 부인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나 <유통과 장시> 분야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므로 이 장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우선 농사일에서 여성이 참여하고 있는 일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성의 노동은 주로 밭농사에 투입되어서 여러 작물(보리, 밀, 콩, 수수, 참깨, 팥, 고추, 감자, 고구마, 김장거리 등)의 파종, 제초, 수확의 전 과정에서 대부분의 일을 맡고 있다. 밭일 중에서도 쟁기질과 같이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은 남성의 몫이다. 비료가 아닌 거름을 주는 일도 주로 남성이 맡는다. 그러나 전자의 일들이 여성의 독자적인 노동 영역은 아니다. 부인의 밭일을 할 때 남편은 논농사와 관련된 일이나 동네 길 닦기 출력(出力), 공적인 사무 등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일이 없을 때는 부인과 함께 밭일을 한다. 같이 밭일을 하더라도 다른 성격의 작업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힘을 많이 써야하는 일을 남자 쪽이 맡는다. 가령 보리를 수확할 때 보리를 베는 일은 부인이 맡고 보리타작은 남편이 하게 된다. 부인이 밭일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이 쉬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부인이 혼자 밭일을 하는 것에 대해 남편이 갖는 심적 부담감은 “前日 술에 취한 것이 오늘도 午前 仲 누어있었다. 妻가 콩밭을 맨다고 하여 누어있어도 不安하여 點心을 먹고서 같이 맸다.”(1972년 7월 12일)와 같은 일기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밭농사의 경우 품을 얻어서 작업을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으며, 품을 얻는 경우에도 논농사와는 달리 그 인원이 몇 명 되지 않는다. 1959년 6월 13일 ‘그루(보리를 베고 나서 그 밭에 콩을 심는 일)’를 갈 때는 이웃에 살고 있는 아버지가 밭을 갈아주었는데, 이는 신**씨가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일(일소를 부리는 일)’에 서툴렀기 때문이다. 이날은 식전에 아버지 가의 일꾼과 큰아버지까지 오시어 같이 콩 파종을 하고 식후부터는 아버지 가의 모내기를 한다. 1962년 7월 14일에는 부인이 여자 한 명을 구해서 콩밭을 매고 있다. 품을 얻어서 밭매기를 하는 내용은 이 날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한 집에서 같이 살았던 신**씨 여동생이 전년도 말에 수원으로 출가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재혼을 한 까닭에 신**씨는 큰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혼인 후 얼마 없어 바로 분가를 하였고, 이때부터 여동생 춘자를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여동생은 부인과 함께 여러 밭일을 하고 있으며, 아버지 집이나 큰집 등 동네에 있는 가까운 친척 집에 가서도 일을 돕고 있다. 밭일에서 한 몫을 하고 있었던 여동생이 출가하게 되자, 신**씨 부부는 그 빈자리를 품을 얻어서 채워야 했던 것이다. 신**씨 부인은 자녀들이 10대가 되자 ‘골고지(호미로 밭을 맨 후 손으로 김을 뽑아주는 일)’나 고구마 캐기와 같이 힘이 덜 드는 작업을 할 때 아이들을 데리고 일을 하기도 한다. 

밭농사와 달리 논농사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 영역이 아니었다. 물이 차 있는 논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옷을 걷어 올려야할 뿐만 아니라 논일의 대부분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유교문화의 영향 아래 있던 농촌 사회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옷을 걷어 올리고 맨발로 논바닥에 들어가서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기도 지역의 경우 대개 여성이 논농사에 참여하게 되는 일차적인 계기는 일제 말 부족한 농촌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성들까지 참여하는 작업반을 조직하여 모를 내도록 하는 총독부의 정책에 의해서 조성되게 된다. 그러나 총독부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모내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마을들은 상당수 존재하였다. 특히 ‘양반’이라고 자처하는 사람, 마을일수록 여자들이 모내기에 들어가는 것을 꺼렸다.  일제 말 이후로 마을에 따라서 여성들이 모내기에 참여하게 되기도 하였으나, 논의 제초 작업은 남성들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논매기는 젖은 흙을 뒤집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일시에 많은 힘을 필요로 한다. 흙의 반전 기능을 높이기 위해 논호미는 밭호미와 비교해서 호미날 역시 넓은 형태로 되어있다. 여성들이 논매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데에는 이와 같은 작업과정상의 특징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신**씨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도 1950년대까지는 여성들이 논농사에 참여하는 일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도 일기를 보면 여성들의 노동이 논농사에 투입되는 경우는 논에 물을 퍼 올리는 일과 논배미가 작은 논의 모내기, 그리고 만앙(晩秧)으로 모내기를 할 때이다. 가을에 벼를 베고 나서 집으로 들인 후 벼를 훑는 일 역시 여성들이 많이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의 특징은 주로 집안 식구들끼리 작업을 한다는 데 있다.

논에 물을 퍼 올릴 때는 ‘고리두레’나 ‘용두레’를 사용하게 되는데, 용두레가 한 사람이 혼자 물을 퍼 올릴 수 도구라면 고리두레를 사용할 때는 두 사람이 마주 서서 함께 작업을 해야 한다. 5월 20일 일기에 신**씨는 여동생과 함께 물푸기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때 어떤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고리두레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춘자와 같이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 5월 19일 일기에는 신**씨 부부와 여동생이 같이 물을 퍼 올리는 일을 하고 있는데, 부인과 여동생은 고리두레로 작업을 하고 있고, 신**씨는 용두레로 물을 푸고 있다.

논배미가 작은 논, 즉 ‘달뱅이’의 모내기는 품앗이로 하는 동네 모내기가 거의 끝나가는 6월 10일에 부인과 여동생이 하였으며, 신**씨는 논을 쓰리고 모를 쪄다 준 후 아버지 집으로 모내기를 하러 갔다. 그러나 “春子는 큰집 모 심어 달라 해서 집에서도 안 심던 모를 시므러 같다.”(7월 2일)는 일기에서 읽을 수 있듯이 여성이 모내기, 특히 남의 집 모내기에 참여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집에서도 안 심던 모를 시므러 같다”는 표현은 썩은 감자 캐기, 고추 모종, 고구마 심기 등 그날 해야 할 집안일도 있는데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던 큰집에서 여동생을 데리고 간 데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여자들이 별로 하지 않는 모내기를 하는 데 여동생을 데리고 간 것을 못 마땅히 여기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큰집에서는 모를 내지 못하던 논이 남아있었는데 전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출가하지 않은 조카딸까지 데려다가 급하게 모를 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하순부터 시작된 동네 논매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한창 밭일을 해야 할 때이기 때문에, 비가 내린다고 해서 신**씨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한가하게 쉴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동네에서 만앙으로 심어야 할 논이 남아있는 집이 큰집만이 아니었다면, 모내기 일손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59년 이후에도 신**씨 부인은 여러 사람이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논배미가 크지 않은 달뱅이나 만앙으로 모를 내기가 쉬웠던 ‘동욕꿀’ 모내기에 참여하는 해가 많다. 동욕꿀인 경우에는 물이 잡히면 본격적으로 다른 논의 모내기를 하기 전에 부부가 함께 모를 내기도 한다(1963년 5월 27일). 다른 논인 경우에도 품앗이로 하든지 품을 사서 하든지 ‘일날’을 잡아서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 이앙을 한 후에도 모를 다 내지 못하고 남게 되면 다음날 부부가 같이 모내기를 하기도 한다. 1965년에는 날이 가물어서 만앙으로 심는 논이 많아지게 되자, 일손을 구하기 어려워 부인이 여러 논자리의 모내기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노동을 할 때 부인이 모내기를 하는 일은 없다.      

1959년도 이후의 일기를 보면 벼의 수확 과정에서 여성이 하는 일은 해마다 조금씩 다르나, ‘벼 조파리기’, 벼 묶기, 볏가리 쌓기, 벼 훑기, 탈곡기로 벼 털기, ‘게꼴 부스기(바수기)’ 등의 일에 부인이 참여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 벼 훑는 일에 여자들의 품을 사서 하기도 한다. 벼를 베고, ‘끄디리고’, 져드리는 일은 남성들이 하나, 끄디리는 일에 부인이 협조하는 수도 있다.  

1959~73년도 사이 여성이 농사일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1968년 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신**씨 집에서는 이 해부터 모내기를 하는 데 여성 노동을 고용하기 시작한다. 고용된 여성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女子 일군이 4名인 줄 알았더니 3名뿐. (…) 점심새 밥 먹고 농꼴 金鎭元氏가 와 協助했다. 金氏 婦女이 人間美가 없느니 말이 많치만 우리에겐 잘하는 편이다. 무엇이던지 해 줄라고 한다.”(5월 26일)는 내용으로 보아 농꼴에 정착한 월남민들인 것으로 보인다. 1971년 6월 8일에는 신**씨 집의 이앙을 하는데, 전체 9명의 일꾼 중 여자 두 명이 ‘소품’으로 온다. 소품이란 일소를 빌려간 것에 대하여 사람의 노동으로 갚는 것을 말한다. 신**씨 부인이 모내기에 참여할 때는 혼자 하거나 남편 또는 시누이하고 공동으로 하는 경우가 전부였다는 것은, 여성들이 논농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문화적 거부감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드러내준다. 모내기 시 여성들을 고용하는 것은 여성들이 공동 노동,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남녀가 어울리는 공동 노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시대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3년도까지는 신**씨 부인이 다른 집 모내기를 하러 가는 일은 없었으며, 자기 집 모내기라고 할지라도 품꾼들과 같이 일을 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자기 집 일날의 경우에는 일꾼들 식사를 대는 것만으로도 부인은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농사일을 직접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모내기를 하는 데 있어서 부인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되어서 1973년도에는 부인이 총 8회 모내기를 하게 되며(5월 22일, 23일, 24일, 28일, 29일, 30일, 31일, 6월 4일), 6월 2일에는 부부가 함께 모를 쪄내고 남편 혼자 모를 심는다. 이와 같은 횟수는 전에 없던 일이며, 부인이 모내기를 하는 논 역시 예전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여러 사람이 들어가서 공동으로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모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부부는 같이 모를 내거나 남편이 논을 쓰리면 부인 혼자 모를 내기도 한다. 5월 30일 오전에는 부인이 돈식과 같이 모내기를 하는데, 이는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신**씨가 돈식의 부탁으로 인감을 떼러 신포로 가야해서 ‘한 참(논농사에서 작업 시간을 세는 단위)’만 돈식과 일손을 바꾸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오후 1시부터는 다시 부부가 같이 작업을 한다. 5월 26일과 27일, 6월 3일에는 각각 7명, 9명, 4명의 일꾼을 고용해서 모내기를 하고 있다. 일날을 잡아서 모내기를 하는 논은 비교적 논배미가 큰 곳으로 5월 26일에는 “골장 여섯 6斗와 아논 5斗”, 27일에는 “농꼴 밭원 5斗, 아논後 3斗 5升지기(苗板除外), 아논後 1斗, 밭원後 1斗”, 6월 3일에는 “아논 3斗”에서 작업을 한다. 반면 신**씨 부부 또는 부인 혼자서 모내기를 하는 곳은 1斗 5升과 1斗, 5升지기 등으로 배미가 크지 않다. 부부 둘이서 모내기를 할 때 어떤 모내기 방식을 사용했는지는 일기에 나와 있지 않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줄모의 형태가 아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달뱅이에 모를 내는 것도 아니고 만앙으로 모내기를 하지도 않는, 여느 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부부 둘이서 모내기를 하는 까닭은 좀 더 검토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신**씨 집의 전체 논의 규모가 계속 커졌다는 점, 그리고 모내기 시 품앗이 관행이 깨지고 고용 노동이 일반화된 상황 등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1973년에는 모내기뿐만 아니라 보온묘판 만들기, 제초, 벼 베기 등 논농사의 다른 일에서도 부인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보온묘판 만들기의 경우 부인은 묘판에 뿌릴 왕겨숯을 만들고 종자를 치고 왕겨숯을 뿌리고 비닐을 씌우는 일을 남편과 함께 하고 있다. 오기로 한 일꾼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인이 대신 일을 하게 된 것이지만, 부인이 가담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대신 일을 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논의 제초 작업은 1968년부터 부인이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 해는 날이 가문 탓에 7월이 되면 부부가 논의 ‘깨끼’ 작업을 며칠 동안 하게 되며, 큰딸이 하루 참여하기도 한다. 이 해 7월 30일에는 부인이 그루밭을 혼자 맨 것에 대해 짜증을 내서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데, 이는 예년에 없던 논의 제초 작업으로 7월초부터 부인이 고생을 한 탓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71년에는 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논에 농약을 뿌리는 일을 하며, 72년에는 부부가 같이 논매기를 한다. 부인이 논의 제초 작업에 참여하게 되는 데 68년도와 같은 가뭄은 예외적인 조건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보다는 농약 사용이 많아지게 된 점, 이에 따라 논매기 공동 인원이 줄어들게 된 점 등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논농사에서 1973년에 있었던 가장 극적인 일은 부인이 처음으로 벼 베기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일에 대해 신**씨는 “妻는 生前 처음으로 벼을 비였다.”(9월 29일)라고 특별히 강조해서 적고 있다. 이 날 이후로 부인은 계속 벼 베기에 참여하며 먼저 벼를 베자고 제안하기도 한다(10월 10일). 부인의 협조로 수월하게 한 해 벼 베기를 마친 것에 대해 “今年엔 妻가 협조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다.”(10월 11일)라고 신**씨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농사일 이외에도 신**씨 부인은 소규모의 곡식을 정미소에 가지고 가서 도정하고 오는 일을 많이 하고 있으며, 울타리를 치거나 집안 수리를 할 때도 남편과 공동으로 일을 하고 있다. 매끼 짜기, 가마니치기 등도 부인이 같이 하는 일이다. 1963년부터 가끔 바다에 나가 맛이나 삐죽 등을 잡아오는 일도 하고 있다. 1972년부터 영호와 웅호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부인의 서울 출입도 잦아지게 된다. 

밭일은 원래부터 부인이 주로 하던 일이었으며 여기에다 논일까지 점차로 하게 되면서, 전체적으로 부인의 노동 양은 많아지게 되었다. 여러 가지 농사일을 하고 있는 부인은 남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농사일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朝飯食事 後에 동욕꿀 논에 물이 있어 쓰리였다. 윗배미는 물이 없어 쓰릴까 말까 하다가 (…) 妻는 如何間 쓰리라고 해서 妻와 같이 심고”(1963년 3월 22일), “일군을 사서 보리밭을 글글까 하다가 妻가 글겠노라고 해서 식구끼리 하기로 하고서”(1968년 3월 22일) 등의 일기는 부인의 적극적인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부인이 농사일뿐만 아니라 가사, 육아, 교육, 그리고 장 출입까지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집안에서 부인의 노동이 차지하는 역할은 현대사회에서 ‘수퍼우먼’이라고 불리는 기혼 직장여성의 그것보다 더 크면 컸지 작았다고는 볼 수 없다. 여러 가지 일이 가중되는 상황으로 인하여 부인이 가끔 일을 하면서 짜증을 내기도 하고 간혹 있는 일이지만 부부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가 처음으로 불거지게 되는 것은 신**씨의 여동생이 출가한 다음해인 1962년도부터이다. 농사일에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던 여동생이 출가한데다가 둘째 아이(1961년생) 역시 아직 어렸기 때문에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이를 보는 문제로 부부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여러 일을 해야만 하는 부인의 상황에 대해 신**씨는 “(며칠째 몸이 좋지 않아서) 좁은 마루에 반을 차지하고 누어 잇으니 妻는 짜증을 낸다. 가마니 妻의 일을 살펴보니 매우 피곤하다는 것을 느겼다. 어린 것들이 하로면 몇 차래식 옷을 버려다 놓고 마루 방 등은 흙발로 올라내려 그것 치우랴 집안일 치우랴 그뿐이면 괜찮에 밭으로 나가고 안일 치우며 누어 잇는 나도 보기에 민망스럽다.”(1962년 7월 31일)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부부싸움은 농사일을 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하는데, 이는 한편으로 농사일에서 부인의 노동의 비중이 커지면서 부인의 발언권 역시 커지게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 벌어지는 부부싸움에도 불구하고 신**씨는 가계를 꾸려가는 경제적 협력자로서 부인의 역할을 인정하고 고마워한다. “妻가 親家에 가 오늘까지 안 오니 朝夕食事가 문제다. 바깟일도 妻가 있어야 할 일이 많다. 內外란 한시라도 떠날 것이 못된다.”(1965년 12월 14일), “밀 그루밭 매다. (…) (부인이 서울 아이들 집에 가 있어서) 妻와 같이 하던 일을 혼자 할랴니 더욱 힘이 든다.”(1972년 7월 17일) 등의 일기는 신**씨가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잘 보여준다. 신**씨는 가끔 스스로에 대해 의지할 데 없는 ‘홀아시’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부모의 조력을 못 받는 자신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씨 부인은 ‘홀아시’ 신**씨가 가계를 꾸려가는 데 있어서 조력자의 역할을 넘어 협력자로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신**씨 일기에는 농부의 부인이 농사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여성 노동’이라는 측면을 넘어서서 ‘가족노동’이라는 차원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가족 내에서 노동 분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고 가족 성원의 노동에 대한 대가는 어떠한 형태로 지불되는가, 가족 성원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재화는 누구의 소유로 받아들여지는가 등과 같은 문제는 ‘여성’에서 ‘가족’으로 시각을 이동했을 때 우리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규명할 수 있을 때 소농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실질적인 단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며, 가족 내에서의 권위의 불평등 문제 역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신**씨 일기에서 볼 수 있는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부인의 모습은 개인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든지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지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그 시대의 힘이다. 신**씨 부인은 1960년대 한국 내지는 경기도의 농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일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시대의 표상일 수 있다. 한 여성의 모습에 들어있는 한 시대의 에너지를 포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여인의 모습을 통해 한 시대를 그려낼 수 있다. 한 시대의 에너지를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여성의 모습은 이전 시기 또 이후 시기 농촌 사회에서 여성 노동이 차지하는 역할을 조명함으로써 그 윤곽이 좀 더 뚜렷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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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장불입 2007/02/23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주 꼼꼼히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사례, 그리고 농촌여성의 노동 일반, 그리고 1960~70년대의 시대적 성격에 대한 맥락을 조금 정리해주고, 본문이 될 이 글도 조금만 더 정리해서 쓰기만 하면, 이 글은 한국여성사에 한 획을 그을 위대한 논문이 될 것 같습니다. 농촌사회사나 역사민속학에서 흥미로워할 주제이면서 한국문화인류학에도 호소력이 있는 주제가 아닐까 싶은데, 그건 아마 이 사례와 양양님의 분석의 시각이 기존 연구자들이 가져보지 못했던 독특한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2. CattivoMaestro 2007/03/05 1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양양님의 글을 보게되서 기쁩니다. 낙장불입님이 말씀하신 부분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지라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좀 적어보자면, 사실 저는 처음에 신씨부인이 직접 작성한 일기인 줄 알았습니다.
    글 내용으로 보아 "신씨"께서 부인을 사랑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른바 "가계"에 대한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은 크셨던 분이신 것 같네요. 술마신 뒷날도 "걱정"이 되서 밭일에 나가보셨다니...

    거의 관리자 일지 수준에서 기술이 이루어진 부분은 아주 독특하고 재밌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미 상품작물 생산으로 그 의미가 전화된 농삿일에 대한 소농의 "자기 관리"의 역사로도 보입니다. 매우 재밌는데요.
    여성의 노동의 양에 착목하는 것도 상당히 재밌는 시도지만, 이 때는 이미 새마을과 같은 잡지 (그런게 있었던 것 같은데)에서 어떤 "모범적" 여성농민의 상들이 또 나와 있지 않을까도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어떤 여성농민상이 있었지도 않을까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일기는 반면 가부장이 보는 여성농민상의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것 같으니 그 비교도 해보면 재밌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 동떨어진 이야깁니다만, 언제 부터선가, 제가 보기엔 이른바 기계화 영농이 어느정도 안착 된 때부터인 것 같은데, 6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농촌"과 "농삿일"의 모습은 주로 여성농민들에게 포커스가 이동한 것 같더군요. 그러니까 보다 혹은 진정한 "농촌적" 이미지는 이제 "여성농민"에게 들러붙은 이미지로 변해온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온 리포터들에게 억척스럽고 우왁스러운 이미지는 대개 농촌 아줌마 집단의 "자연스런" 반응과 연출들에서 만들어지니까 말이지요. "촌스러움"이 여성성에서 추출된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에 이른바 "된장녀"들이 있을 테니 말이지요.

    그리고 여성노동이 전체 농업생산에서 그 영역이 확장되어가는 상황을 전체적인 농업노동의 가치변화 (대개 저하일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테니까요)의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적 증대와 질적 가치 절상은 항상 비례하진 않으니까요. 이미 영농(이 개념이 아주 재밌는 개념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기술의 변화등을 통해 언급을 하셨지만 말이지요.
    좀 더 적극적인 "발견적" 개입이 있으면 분석의 힘이 더 강해질 것 같은데요. 예를들어 "일상성"같은 문제들이랄지 말이지요.

  3. 2007/03/19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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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 2007/03/20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도움도 많이 되었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다른 분들도 댓글을 볼 수 있게 공개하면 안 될까요?

  4. 2007/03/20 1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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