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가면 먼저 문진(問診)을 하지요.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 언제부터냐, 자주 있는 일이냐, 어떤 증상이 있느냐 등등. 그리고 청진(聽診)과 촉진(觸診)을 합니다. 한의사 같으면 진맥(診脈)도 하겠지요. 청진기로 심장 뛰는 소리라든가, 숨 쉬는 소리라든가를 듣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속에서 나는 소리도 듣나요? 이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여기 저기 만져보고 눌러보고 합니다. 목구멍 같은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어라고 부르나요? 시진(視診)? 가끔은 환자에게 특정부위를 움직여보라고 하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뼈나 근육, 신경의 상태를 유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승과 교육을 통해 배운 사실, 진료경험으로 깨달은 사실 등에 비추어 환자의 환후(患候)에 대한 판단을 내립니다. 배탈 났네요, 감기입니다, 혹은 꾀병입니다, 그런 식이지요. 상상임신입니다, 같은 충격적인 진단도 있겠고요.

병원과 의사, 간호사에 관한 에로틱한 환상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청진ㆍ촉진ㆍ진맥 등의 행위는, 실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혹은 환자가 자각하지 못한, 아니면 환자가 언어로 잘못 표현한, 환자의 증상을 파악하는 유력한 방법들이지요. X-Ray나 CT, MRI 같이 환자의 몸속을 산 채로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사실 이런 방식이 진료행위의 거의 전부가 아니었나요? 물론 X-Ray 등도 진료의 원리는 사실상 동일합니다만. 그것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의 유형을 계열화한 지식을 바탕으로 병의 징후로부터 바로 진리(의학적 진료행위의 경우 병환의 원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문진의 방법을 통해 환자의 의식 혹은 언어를 매개 혹은 경유하는 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기는 하되, 청진ㆍ촉진ㆍ시진ㆍ진맥 등의 행위는 문진과는 별도의 인식론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편의상 여기에서 ‘지각 가능한 현상’을 추상화한 용어로 ‘형태’를, ‘청진ㆍ촉진ㆍ시진ㆍ진맥 등 형태를 감각하는 행위’를 추상화한 용어로 ‘관찰’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형태적 규칙'이란 '형태들에 대한 유형적 파악과 그 축적을 통해 형성된, 형태들의 속성에 대한 계열화된 지식' 정도로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요?


계열과 맥락을 구별해서 부르는 것은 사실 말장난입니다만, 일단 개념적인 구분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맥락은 하나의 형태의 발생과정 혹은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재현(representation)을, 계열은 하나의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 사이의 상대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구축된 지식이나 재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이라고 쓴 것은 현상과 맥락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호성은 지적인 혼란 혹은 연구자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대개는 현상 자체가 시공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즉 항상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열과 맥락을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만, 이 발생적 맥락에 대한 아카데미의 신화는 상당히 막강하므로, 이 신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바꿔 말하면 이 신화의 신봉자들로부터 쏟아질 탈맥락적인 지식이라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브라가님의 표현을 빌자면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의 황당한 상상―사실상 광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단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 편의적으로 맥락과 계열을 분리하여 개념화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략 다음과 같은 구분을 이룬 것 같습니다. 연구(혹은 관찰, 아니면 그저 호기심)의 대상인 바 행위자의 의식을 경유하여 그에 의해 언어적으로 구축된 지식의 맥락, 같은 식으로 구축된 지식의 계열, 행위자의 의식을 경유하였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 간에 이를 성립의 본질적인 계기로 삼지 않으면서 비언어적으로 구축된 지식의 맥락, 그리고 같은 식으로 구축된 지식의 계열.


그리고 한 가지만 단서를 달면, 언어적인 현상에도 형태적인 측면이 있어서 맥락적으로가 아니라 형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죠. 음운론이라든가 음성론이라든가 방언연구라든가, 역사언어학ㆍ비교언어학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언어현상을 형태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번에 썼던 "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과 비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그걸 계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에 대한 지식이 정교화된다면)이 반씩(물론 정확히 '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섞여 있다"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단지 오늘의 용어정리를 바탕으로 이를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겠네요. 언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과 형태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 맥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과 계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이 반씩(물론 정확힌 '반'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섞여있겠네요. 그러면 지난 번처럼 '맥락론/형태론'이 아니라, 언어적 지식(의미론)/형태적 지식(형태론), 맥락론/계열론의 대립쌍을 설정해야 되겠군요.


레비-스트로스보다는 브로델이 맞지 않느냐는 브라가님의 논평을 읽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형태의 구조주의적 방법론, 혹은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실천되어 왔던 제가 원하는 형태의 방법론의 한 이상적인 모습을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발견한 바 있습니다. 브라가님이 브로델을 떠올리시는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지금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공부의 폭이 좁고 또 그 쪽으로 많은 공부를 하게 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조금 뭐 합니다만, 특히 맑시스트적인 구조주의는 조금 안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구조주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이런 형태론적인 관심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브로델은 이를 역사학에 적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제가 소화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브라가님의 논평으로 돌아가면, 제가 브로델에게서 역사방법으로서의 형태론을 찾았고, 그것에 매료되어 형태론에 대한 관심을 키워온 것이기 때문에 브라가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제가 이해한 레비-스트로스와 브로델의 구조주의에 대해서는 또 다음 기회에 적도록 하겠습니다.

저 일부러 포토샵을 건 듯한 빨간색이 환타라는 점은 놀랍군요. 그리고 환타 중에 저렇게 빨간 색이 나는 맛이 무슨 맛 환타인가 하는 점도 궁금합니다.


책의 탑은 책 빼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올렸더라면 대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저 책의 탑은 그 학생의 특수한 개인기가 아니라 그곳 대학생들이 널리 활용하고 있는 방식인 겁니까?


특수한 현상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맥락'이라는 것-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등등 여러 관형어를 붙일 수 있겠지요-이 실은 단속적이라는 점은 동의합니다. 인터뷰에 대해 종속적이지 않은 관찰이라는 방법의 독자적인 인식론적 지위를 이야기할 때 지적하고 싶었던 점이 바로 그것인데요. 그러니까 맥락 외의 형태적 규칙들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관찰에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레비스트로스가 역사적 방법과 구조적 방법이 실은 같은 거다라고 계속 말하면서도 구조적 방법이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실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방식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저는 현명한 절충론자 스타일인지라..) 그러니까 구조를 형태로, 역사를 맥락으로 전환하면, 우리의 이야기가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된다는 아이디어라는 거죠(..통하였느냐?)

그래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구조적 규칙을 열쇠로 동서고금을 넘나들었던 것처럼, 형태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우리가 맥락들을, 역사들을 벗어나(여기에서 맥락이나 역사는 인도네시아와 미국, 혹은 학문분과나 학계의 규칙처럼 각 지식들을 유효한 것으로 만든 기존의 질서들이 조직되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갑이라는 학문을 배울 때 갑학사를 먼저 배우는 것처럼.


물론 저는 기본적으로 '현명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반역사적인 방법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은 인식론이겠지요.


쓰고 나서 보니 이게 뭔 말이다냐 싶군요. 그러니까 제 말씀은, 책탑 쌓기든, 환타우유든, 광화문이든, 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과 비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그걸 계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에 대한 지식이 정교화된다면)이 반씩(물론 정확히 '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섞여 있다는 거죠.

후자는 맥락을 벗어나서, 맥락에 구애받지 않고, 가령 전 세계의 미친놈들이 발작을 할 때마다 보이는 열다섯 가지 행동양식이라는 탈맥락적인 지식의 체계가 훨씬 설득력 있게 그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뭐 꼭 '전 세계'일 필요는 당연히 없는 것이겠습니다만). 그때 우리는 인터뷰와 구별되는, 문헌사료분석과 구별되는, 통계분석과 구별되는, '관찰'이라는 학문기법의 독자적인 인식론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