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학위논문을 적고 있다는 점은 앞의 글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1장 '서론'의 3절 '연구의 개요' 중 제1소절이 '연구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2월말에 학과에 절차 상(즉 형식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초고를 적고 있는데요. 그 중 '연구의 방법'이라는 글을 올려 <아수라장>에 드나드시는 여러분의 공람에 붙일까 합니다.

현재 올리는 버전은 절차 상 제출하는 초고를 위한 것이고 3월말에 심사위원에게 돌리게 될 초고에는 이를 개정한 내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지도교수이신 모 선생님이 '연구방법에 대해 조금 세게 쓰는 것이 좋겠다'는 코멘트를 주신(여기에 올릴 글을 읽지 않고 본론만 보신 단계에서) 상태인지라 아마 내용은 훨씬 공을 들인 것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쓰게 될 문제의식은 지금 올리는 내용이 골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공람에 붙이는 것은, 그 문제의식의 논리적인 혹은 전략적인 오류나 한계, 미진한 점이나 강조해야할 점에 대한 코멘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아무도 댓글 안 다셔도 실망하지 않을 터이니, 일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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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의 개요


 1) 연구의 방법


이 연구에서 사용한 농업 관련 인터뷰 자료는 박사과정진입과 함께 1999년 3월 24일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중말(조산동)에서 시작하여 2005년 5월 27일 안성시 도기동 도구머리 마을을 끝으로 일단락을 지은 경기남부에서의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것이다. 논문의 집필은 인터뷰 자료의 분류ㆍ정리를 마친 2005년 10월에 시작하였는데, 2005년 12월초부터 2006년 1월말까지, 그리고 2006년 9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는 문헌자료를 보완하느라 집필이 중단되었다. 본래 문헌작업은 인터뷰를 위한 현지조사를 진행하면서 혹은 논문 집필 중 간간이 진행해 왔었는데, 집필 중 크게 부족함을 느껴 집필을 중단하고 보완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각주: 이 ‘부족함’은 부분적으로 학위논문의 연구계획이 크게 두 차례의 수정을 거친 데에 따른 것이었는데, 수정 이전의 구상이 반영된 인터뷰 및 문헌 자료들은 언젠가 따로 검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현지조사 중의 인터뷰는 농업 분야로 제한되지 않았고, 반농반어촌의 어업이라든가 산촌이나 시가지 주변의 시탄(柴炭) 채취업과 같은 기타 생업, 유통과 장시, 가족과 친족, 사회조직과 신분관계, 의례와 놀이, 인구 및 마을 공간의 구성과 변화 등 촌락의 생활문화 전반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현지조사를 시작하던 당시에는 작업이 외주용역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아 그 용역의 요구를 채우다보니 그리 된 것이었는데, 중간의 어느 시기인가부터는 그럴 의무가 없는 작업인 경우에도 질문을 넓혀서 진행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그리 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불안감의 정체는 첫째로 연구주제의 해명에 당장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도 이 노농(老農)들의 이야기를 연구자는 물론 그 누구도 다시 듣고 기록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점, 둘째로 가령 친족이나 마을조직, 의례나 놀이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농업기술이나 경제관행과 관련된 설명을 찾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 셋째, 그물을 넓게 펴고 촌락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해두지 않으면, 농업문제와 관련하여 연구자가 찾아낸 설명이 개연성이 있는 것인지 여부를 해당 촌락사회 자체의 맥락에서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익한 불안감은 연구자의 학문성향이 인류학의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의 강한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던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현지조사는 인터뷰 외에 마을ㆍ가정ㆍ개인 단위의 의례와 놀이 등에 대한 참여관찰을 포함하였지만, 이는 해당 작업이 외주용역에 의해 주어지거나 순전히 호기심에서 비롯한 경우에 한정되었으며, 조사 당시에나 집필 과정에서나 그 내용들이 이 연구에 포함시킬 성질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점은 항시 전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조차 실은 말이 ‘참여’관찰이지, 연구자는 대개 사진을 찍고 있거나, 아니면 대개 연구주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묵묵히 술과 고기를 축내고 있기 십상이었다. 연구과정이 이와 같이 ‘참여’적인 성격과 거리가 먼 냉랭한 것이었던 점은, 아마 다루는 시기가 주로 일제시기와 해방직후의 상황이고, 다루는 분야가 생산과 유통이며, 이것이 ‘참여’적으로 해명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옳거나 바람직한 인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연구방식이 현지조사라는 장을 형성하여 만난 연구자와 연구대상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서적인 공감대가 상당히 부족한 채로 끝나버린 것이었고, 인류학의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의 영향 아래에서 훈련을 받은 연구자의 그것으로서는 상당히 미흡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의 과정은 이렇게 한 마을, 혹은 몇 사람과 긴밀한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새로운 마을, 다른 새로운 사람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면서 그의 설명을 듣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농업기술과 경제관행이 어떻게 짜여있는지, 그것이 다른 마을이나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더 이상 설명을 들을 것이 없거나 단시간 내에 듣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같은 마을의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마을의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는 식이었다. 새롭게 마련된 인터뷰의 자리에서도 역시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물론 같은 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고 설명을 듣는다고 하여, 항상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배움을 청하고 설명을 듣는 과정에서 연구자 자신이 배우는 바가 있고, 배우는 것이 있는 이상 질문의 내용이나 문답의 요령이 점차로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1999년 3월 무렵에 가까운 조사에서 묻고 들은 내용은 2005년 5월 무렵에 가까운 조사에서 묻고 들은 내용과는 전혀 성격이 판이하였다. 그 판이함에 대해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면, 초기의 조사내용은 대개 논문의 집필과정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사초기의 그 수많은 마을 그리고 수많은 노농들과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허비해버린 것에 대해서는 현지조사가 진행될수록, 논문의 초고가 완성되어 갈수록 큰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필요할 경우에는 다시 찾아 인터뷰의 자리를 만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전화로 보완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점은 아마 한국을 조사지로 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같은 분들을 다시 찾기보다는, 앞서 적은 것처럼 새로운 마을, 새로운 사람을 찾아 인터뷰를 이어가는 방향을 택하였다. 같은 사람을 다시 찾아 묻는 시간에 다른 마을 혹은 다른 사람을 새로 찾아 배울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되었고, 실제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것이 옳거나 바람직한 방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마 연구의 목적, 그리고 연구자의 성향과 관련한 문제일 것이다.

연구의 목적과 관련하여서는 앞 두 절을 통해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후자의 문제에 대해 잠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연구자의 성향은,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보다는 지적으로 소통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정아(2003: 35-36)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연구자의 위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즉 인권단체 간사도 기자도 아닌 ‘학생’이기 때문에 그들은 연구자에게 인권 등의 이야기를 내세우거나 자신의 불행을 과장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덜 가졌고, 좀 더 쉽게 개인사를 이야기하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이런 이야기들(가족, 힘든 이야기, 여자 친구 등), 고향친구들에겐 안 해. 여기서 같이 거류권 싸움하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절대 안하고. 너는 이런 걸 이해해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넌 어쨌든 중국인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니까. 사실 어떨 땐 낯선 사람하고 얘기하는 게 더 편해.…”


그의 인터뷰 상황에 대해서는 연구자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아마 연구자의 그것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가 들으려고 했던 내용도 ‘가족, 힘든 이야기, 여자 친구’ 등 인간사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을 통해 연구주제에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인터뷰가 혹 그런 이야기로 흐르게 되면,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를 원래의 줄거리로 되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느라, 사실 상대의 이야기를 거의 듣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연구자의 현지조사과정을 돌아보고 장정아의 연구내용을 떠올리면, 연구주제와 관련한 내용에서도 실제로 그가 도달한 깊이나 내밀한 부분에는 결코 이를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서 그의 대화상대가 ‘낯선 사람이지만 또 낯선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고, 중국인을 이해하려는 사람이고 그러려면 이 이야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해준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국인’을 ‘농사’ 혹은 ‘농촌’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연구자가 인터뷰 과정에서 상대가 연구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와 관련해서 느꼈던 감각―장정아와 달리 연구자의 경우 이를 직접 확인해주는 이는 없었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물론 장정아의 경우 그 대화상대와 상당히 깊은 정서적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구자의 감각으로는, 이 설명의 전제는 장정아가 해당 주제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와 관련하여 진지하게 더 알고자 하며(즉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확인하기 위해 상대와 대화하려는 것이 아니며), 게다가 그 주제와 관련하여 아주 민감한 부분을 정교하게 건드리는 질문을 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이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은 극단적으로 나누자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물어보지 않은 점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설명을 하려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낯설다’든가 ‘친하다’는 것은 거의 부차적인 문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자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는 상대와는 일찌감치 인터뷰를 종료하고 다른 곳 혹은 다른 이를 찾아 떠났으며, 후자에 해당하는 상대에게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꼬치꼬치 캐묻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한국의 농촌에는 이 후자의 종류의 인간형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며, 게다가 모든 농촌마을에 적어도 한둘씩은 이런 인간형에 해당하는 노농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농사와 생활의 달인이며, 탐구하는 자세로 경험을 축적하고 각종 정보를 흡수함으로써, 깊은 통찰력으로 사회와 역사를 보는 혜안을 갖춘 자들이다.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대상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의 양과 깊이, 배우겠다는 진지한 자세, 적절한 단어와 표현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질문, 이런 것들의 구비 여부가, 일정하게 정서적 친밀감의 부재를 메워주면서, 이 노농들과 정서적인 공감대는 약하지만 지적인 쾌감은 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을 제어하는 가장 중요한 키[舵]는, 상대가 그저 ‘시골노인’이 아니라 나라의 바탕인 ‘조선노농’이라는 점, 그들에게 농사와 농촌, 농업,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배우기 위해 왔지만 결코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고 더불어 대화하고 논하겠다는 인식을 틀어쥐는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루는 시기가 주로 일제시기이고 부분적으로 18ㆍ19세기와 해방직후시기의 몇 가지 문제를 거론하므로,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 외에, 해당시기와 지역의 문헌에 대한 조사와 반영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다루는 시기와 지역을 불문하고, 역사인류학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학, 그리고 모든 인문사회과학적 연구에 불가결한 과정이므로, 이 자체가 어떤 특별한 방법론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즉 구성된 텍스트를 사용하여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특정 사회역사적 현상에 대해 분석한다는 의미에서 이 글은 어떠한 특수한 방법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단지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회역사적 현상의 분석에 사용한다는 것은, 이 ‘텍스트의 구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네 가지 정도 짚어둘 지점을 형성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를 특정 사회역사적 현상, 특히 과거의 어떤 시점 혹은 기간에 일어난 일의 분석에 사용하는 일은, 역사인류학자에게 여타의 인문사회과학자, 특히 문헌사학자에게 잘 허여되지 않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한다. 즉 역사인류학자는 무엇보다도 인터뷰 대상자와 함께 자신이 사료로 사용할 텍스트를 스스로 구성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는 역사인류학자를 포함하여 인류학자에게는 낯설지 않은 일이지만, 역사학자에게는 상당히 낯선(혹은 낯설었던) 종류의 일이다. 이 점, 역사인류학자는 인류학자로서 인류학자에게 허용되고 훈련되어왔던 규칙들에 의거하여 사료 텍스트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학자, 특히 문헌사학자와 구별되어 역사인류학자에게 부여된 특수한 지위와 역할, 방법은 여기까지가 아닌가 한다. 그 후의 작업은, 역사학자이든 인류학자이든, 과거의 사회역사적 현상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이론적 혹은 기술적(技術的)인 면에서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종류의 원리나 규칙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연구자는 전제하였다. 일단 구성된 사료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 기원이 구술(口述)이든 기술(記述)이든 동일한 원리와 규칙에 의해서 취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둘째, 그러한 취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약간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의 사회역사적 현상에 대한 지시의 능력, 특히 그 신뢰성이나 대표성과 관련하여, 구술 텍스트와 문서 텍스트 사이에는 여전히 불평등한 위계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위계관계는 구술 텍스트를 사료로 정당히 다루어야 한다고 보는 연구자의 의식 내에서도 조사와 집필 과정 내내 강력히 작용하고 있었다. 이 불평등성을 교정하는 방식, 교정되어야 할 정도, 교정의 방향은 각 연구자마다의 성향과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에 따라 제각각일 수 있다. 연구자가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농민의 기억과 구술을 ‘시골노인’의 그것이 아니라 ‘조선노농’의 그것으로 이해하고자했던 것처럼, 문서 텍스트에 담긴 사실과 내러티브를 ‘서울촌놈’ 내지 ‘일본촌놈’―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혹 민족적 편견의 결과로 여길까 우려하여 사족을 달면, 굳이 ‘일본’을 언급하는 것은 주로 다루는 시기가 일제시기이고 조선의 일본인 텍스트 작성자들은 ‘서울촌놈’이 아니기 때문이다―의 그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이 점 ‘서울촌놈’과 ‘일본촌놈’으로 이루어진 조선총독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구자의 의식 속에도 존재하는 불평등한 위계관계가 어느 정도 교정되어 양자의 위상이 그래도 비슷한 수준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고, 구술 텍스트이든 문서 텍스트이든 같은 방식으로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가능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교정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

셋째, 흔히 있는 오해 중 하나는 구술 텍스트가 문서 텍스트에 비해 개인이라는 경험의 한계에 의해 왜곡이나 편견으로 오염되었을 위험이 크지만 또 개인의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생생한 현장의 경험과 느낌―즉 사회역사적 현상의 극히 주관적인 측면―을 전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문서 텍스트는 보다 전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하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부분적으로 타당하지만 부분적으로 그릇된 것이어서, 전적으로 그러하다고 간주한다면 이는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다. 역사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문서 텍스트가 오히려 주관적인 편견과 왜곡 그리고 당대 현장의 상황과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구술 텍스트가 그러한 느낌이 배제된 채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경우를 도처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점은 이하 본문에서 연구자가 사용한 텍스트들, 그리고 그 텍스트들을 다루는 연구자의 방식을 통해 충분히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기에,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언급을 생략하기로 한다.

넷째, 이 점과 관련하여, 연구자의 경우, 객관적 성격의 구술 텍스트가 필요하고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성격이 강한 텍스트를 구성해내고자 할 때, 위력을 발휘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점을 첨언해두고자 한다. 즉 삶의 물질적인 형태들, 혹은 비담론적인 실천이나 관행 등에 관한 박물학적인 정보를 노농들로부터 확인하고 그 연원에 대한 토론을 벌임으로써 의외의 수확을 올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한 삶의 물질적인 형태들로는 가령 기후나 토양에 관한 정보, 마을 내 논밭의 구성비나 공간형태, 두둑이나 고랑의 작성법과 규격, 농기구 등 각종 생활도구의 재질이나 만듦새, 농사작업의 선후관계라든가 기후조건ㆍ다른 농사작업ㆍ다른 생활사적 사건들과의 관련성, 마을의 인구나 성씨집단 혹은 작업집단의 규모, 그리고 이것들과 그 밖의 여러 가지를 가리키는 민속용어들과, 그에 대한 설명에 사용되는 표현이나 내러티브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분포도 등이 있을 수 있으며, 당연히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문서 텍스트들이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로 인터뷰를 이끌어가며, 인터뷰를 통해 구성 가능한 사료 텍스트의 새로운 영역, 그리고 인류학에서 ‘관찰’이라는 방법이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개척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