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과 의사, 간호사에 관한 에로틱한 환상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청진ㆍ촉진ㆍ진맥 등의 행위는, 실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혹은 환자가 자각하지 못한, 아니면 환자가 언어로 잘못 표현한, 환자의 증상을 파악하는 유력한 방법들이지요. X-Ray나 CT, MRI 같이 환자의 몸속을 산 채로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사실 이런 방식이 진료행위의 거의 전부가 아니었나요? 물론 X-Ray 등도 진료의 원리는 사실상 동일합니다만. 그것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의 유형을 계열화한 지식을 바탕으로 병의 징후로부터 바로 진리(의학적 진료행위의 경우 병환의 원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문진의 방법을 통해 환자의 의식 혹은 언어를 매개 혹은 경유하는 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기는 하되, 청진ㆍ촉진ㆍ시진ㆍ진맥 등의 행위는 문진과는 별도의 인식론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편의상 여기에서 ‘지각 가능한 현상’을 추상화한 용어로 ‘형태’를, ‘청진ㆍ촉진ㆍ시진ㆍ진맥 등 형태를 감각하는 행위’를 추상화한 용어로 ‘관찰’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형태적 규칙'이란 '형태들에 대한 유형적 파악과 그 축적을 통해 형성된, 형태들의 속성에 대한 계열화된 지식' 정도로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요?
계열과 맥락을 구별해서 부르는 것은 사실 말장난입니다만, 일단 개념적인 구분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맥락은 하나의 형태의 발생과정 혹은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재현(representation)을, 계열은 하나의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 사이의 상대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구축된 지식이나 재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이라고 쓴 것은 현상과 맥락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호성은 지적인 혼란 혹은 연구자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대개는 현상 자체가 시공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즉 항상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열과 맥락을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만, 이 발생적 맥락에 대한 아카데미의 신화는 상당히 막강하므로, 이 신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바꿔 말하면 이 신화의 신봉자들로부터 쏟아질 탈맥락적인 지식이라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브라가님의 표현을 빌자면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의 황당한 상상―사실상 광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단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 편의적으로 맥락과 계열을 분리하여 개념화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략 다음과 같은 구분을 이룬 것 같습니다. 연구(혹은 관찰, 아니면 그저 호기심)의 대상인 바 행위자의 의식을 경유하여 그에 의해 언어적으로 구축된 지식의 맥락, 같은 식으로 구축된 지식의 계열, 행위자의 의식을 경유하였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 간에 이를 성립의 본질적인 계기로 삼지 않으면서 비언어적으로 구축된 지식의 맥락, 그리고 같은 식으로 구축된 지식의 계열.
그리고 한 가지만 단서를 달면, 언어적인 현상에도 형태적인 측면이 있어서 맥락적으로가 아니라 형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죠. 음운론이라든가 음성론이라든가 방언연구라든가, 역사언어학ㆍ비교언어학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언어현상을 형태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번에 썼던 "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과 비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그걸 계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에 대한 지식이 정교화된다면)이 반씩(물론 정확히 '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섞여 있다"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단지 오늘의 용어정리를 바탕으로 이를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겠네요. 언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과 형태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 맥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과 계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이 반씩(물론 정확힌 '반'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섞여있겠네요. 그러면 지난 번처럼 '맥락론/형태론'이 아니라, 언어적 지식(의미론)/형태적 지식(형태론), 맥락론/계열론의 대립쌍을 설정해야 되겠군요.
레비-스트로스보다는 브로델이 맞지 않느냐는 브라가님의 논평을 읽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형태의 구조주의적 방법론, 혹은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실천되어 왔던 제가 원하는 형태의 방법론의 한 이상적인 모습을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발견한 바 있습니다. 브라가님이 브로델을 떠올리시는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지금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공부의 폭이 좁고 또 그 쪽으로 많은 공부를 하게 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조금 뭐 합니다만, 특히 맑시스트적인 구조주의는 조금 안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구조주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이런 형태론적인 관심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브로델은 이를 역사학에 적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제가 소화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브라가님의 논평으로 돌아가면, 제가 브로델에게서 역사방법으로서의 형태론을 찾았고, 그것에 매료되어 형태론에 대한 관심을 키워온 것이기 때문에 브라가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제가 이해한 레비-스트로스와 브로델의 구조주의에 대해서는 또 다음 기회에 적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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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청진,촉진의 예는 명쾌하네요. MRI의 등장 이후 의사는 환자에게 물어보되 그를 관찰하기 위해서만 묻습니다. 핏줄 속까지 들여다보는 투시카메라란 매우 불쾌하지만서두.
저의 하우스메이트와 저의 간략한 대화를 소개하면, 맥락과 계열은 엄격히 다른 개념적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맥락은 해석을 고정시키고 현상을 진리로 가두는 효과를 지적하는 반면, 계열은 고정된 인식의 기반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아닐까요. 저에겐 낙장불입님의 '형태'에 대한 강조는 말들의 계열과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계열이 항상 으르렁대며 동침하는 모습을 직시하려는 시도로 이해됩니다. 물론 개념사에 대한 리뷰를 통해 설득해야하는 문제지만, 푸코의 고고학/계보학, 들뢰즈의 계열과 사건, 지층 등의 은유는 공히 맥락을 파괴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