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channel>
		<title>민속연구 낙장불입,  돼지의 전당</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link>
		<description>그게 내 일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미친 듯이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던,  
돼지의 최후를 기록하기</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27 Jun 2007 15:07:03 +0900</pubDate>
		<generator>Tattertools 1.1.1 : Vivace</generator>
		<image>
		<title>민속연구 낙장불입,  돼지의 전당</title>
		<url>http://asurajang.cafe24.com/lacuna/attach/13/1396732785.gif</url>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link>
		<width>180</width>
		<height>136</height>
		<description>그게 내 일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미친 듯이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던,  
돼지의 최후를 기록하기</description>
		</image>
		<item>
			<title>감사의 글</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28</link>
			<description>&amp;nbsp;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꿈을 이루지 못했다. 한강연안의 마을을 훑으며, 노농(老農)을 찾아 배움을 얻고, 한 마을을 떠날 때마다 한 편씩 시를 쓰리라. 마침 고은이 만인보(萬人譜)를 쓰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으로 나의 만촌보(萬村譜)를 삼을 요량이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물론 여러 사정이 있었다. 생활, 작업, 이론, 감상(感傷), 스승과 선학들, 동료와 가족들. 모든 것이 나를 압도하며, 둘러쳐져 벽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크고 단단하며 육중했던 벽은, 듣는 것만으로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노농들의 이야기 자체였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자재로 몸을 놀릴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압도했던 것들의 유허(遺墟)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그리고 꿈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것들, 나를 압도했던 벽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것들에 의지하여 오늘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다.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신변잡기</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28</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28#entry28comment</comments>
			<pubDate>Wed, 27 Jun 2007 13:53:5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농민사회, 토지지배권, 그리고 의례의 기능</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25</link>
			<description>지난 번에 답 댓글을 적고, 실은 &#039;지배&#039; &#039;지배적&#039; &#039;지배한다&#039; 등의 어휘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lt;br /&gt;&lt;br /&gt;&#039;지배&#039;는 아마 영어로는 도미네이트 혹은 룰인 듯 한데, 그 단아 자체의 뜻으로 보나 인문사회과학서적에서의 용례로 보나, 이게 이를테면 그저 &#039;우세를 보이다&#039;는 의미 정도로 쓰이는 경우도 있고 그게 아니라 직접적인 지휘명령적인 성격을 지닌 상당히 강한 주종관계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lt;br /&gt;&lt;br /&gt;에릭 울프의 &amp;lt;농민&amp;gt;(박현수 역, 청년사, 1978)을 읽던 중, 농민사회와 관련하여, 토지지배권의 유형을 나누어 설명한 내용이 있어 자료 삼아 올립니다. 마침 의례의 기능을 지적한 부분이 있어, 라구르 님이 쓰신 연구사 리뷰하고도 맥락이 닿는 점이 있더군요. &lt;br /&gt;&lt;br /&gt;물론 울프의 설명은 농민사회 내의 토지지배권과 관련한 것으로 한정되는 것이고, 저희들이 논의해야 할 주제는 이보다 광범위하거나 또는 아주 다른 맥락 위에 놓인 지배 현상에 관한 것이어야 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도 뭔가 다음의 토론을 이어가기 위해 참고할 만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lt;br /&gt;&lt;br /&gt;중간중간에 꺾은 괄호 안에 들어가있는 것은 페이지 숫자(그 숫자에 해당하는 페이지가 그 꺾은 괄호 이후부터 시작한다는 뜻으로)를 뜻합니다. 끄트머리에 가까운 데에 나오는 농민사회의 구기술과 신기술이라는 표현은, 울프가 사용하는 바에 따르면, 신기술은 노포크식 윤작의 발달, 종자개량, 세계 각처로부터의 새로운 작물의 유입, 새로운 기계(주로 축력)의 도입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고, 구기술은 그 전 단계의 그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울프는 여기에서 언급한 세 가지 토지재배권의 형태 외에 마지막으로 행정적 지배권이라는 것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콜호즈와 소포즈, 중국의 인민공사 같은 것인데요. 여기까지 하면, 대충 예전의 고등학교 지리나 세계사, 대학의 교양강의 등에서 들었던 상식들이 살아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 치기에는 손이 아프기도 하고 그런다고 해도 어차피 다 읽으실 분도 없으실 듯 하여 내용은 임의로 생략하였습니다.&lt;br /&gt;&lt;br /&gt;**********************&lt;br /&gt;&lt;br /&gt;&amp;nbsp;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91]이러한 예들(18세기 인도의 촌락과 중세 유럽의 장원―인용자)을 보건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농민들이 사용하는 토지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하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은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인데, 지배권이란 어떤 토지를 이용하는데 대한 궁극적인 소유권이나 관리권을 뜻한다. 우리네 사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토지를 사유하여 이를 마음대로 팔거나 처분할 권리를 가지는 것은 여러 가지 지배권 형태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전통적으로 농민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쳐온 지배권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세습적 지배권과 봉록적 지배권과 상업적 지배권이 그것이다. 세습적 지배권은 흔히 봉건적 지배권이라고도 불렸는데 봉건적이라는 말에는 매우 복잡한 의미들이 얽혀있어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세습적 토지지배권이 행사되는 경우 토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치할 권력을 장악하는 사람은 어떤 특정 친족집단이나 가계에 태어난 덕분에 지배권을 상속받은 영주이며, 이러한 통치권[92]에는 토지를 점유한 주민들로부터 토지사용료를 거둘 권리가 포함된다. 이런 지배권은 영주네 가계를 통하여 세습적으로 상속된다. 그러한 권리는 피라밋식으로 구성되어, 높은 영주가 낮은 영주를 지배할 세습적인 권리를 가지며 낮은 영주는 땅을 일구는 농민들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는 수가 있다. 농민은 언제나 이러한 피라밋과 같은 위계조직의 밑바닥에서 노동력이나 물건, 또는 돈으로 잉여자금을 바쳐서 그러한 조직을 지탱한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봉록적 지배권은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심부름꾼이라는 자격으로 농민들로부터 토지사용료를 거두는 관리들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세습적 지배권과 다[93]르다. 그러므로 이런 지배권은 가계의 지배권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지배권은 어떤 특정한 관리에게 일한 댓가로서 수입―봉록―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가 이런 뜻으로 사용한 ‘봉록’이라는 말은 원래 유럽의 관리들에게 급여하던 봉급 또는 ‘생계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급료 형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 예컨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오스만 제국, 인도의 무갈 제국, 그리고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제국들은 정치조직에 의하여 토지와 토지사용료에 대한 상속적인 권리 주장을 막아내는 데 힘썼다. 그 대신에 절대적인 전제군주의 막강한 지배권을 내세워, 지배권을 주장하는 모든 하부세력을 깔아뭉갰다. 그래서 하부 지배권은 어느 것이나 절대자의 심부름꾼 자격을 가진 관리들에게 부여되었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봉록적 지배권의 또 하나의 중요 형태에서는 토지가 아니라 ―주권자로서의― 국가가 농민층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수입을 문제로 한다. 이러한 형태의 봉록적 지배권 체제 하에서는, 국가 관리에게는 국고로 돌아갈 조세에 덧붙여 자기의 몫을 거두고 이를 자기 뜻대로 사용할 권한이 부여된다. 이런 방법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른바 세금 농사꾼(tax farmer)에게 일정한 지역에서 세금이라는 형태의 조세를 거둘 권리를 하청주어, 세금 농사꾼이 국가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고 그 수입 중의 한 몫을 차지할 수 있게 하는 방법, 둘째는 우선 국가의 수입을 한 군데 모은 다음에 관리들에게 그들이 일한 대가로 봉급을 주는 방법이다. 세금 농사라는 하청방법은 중동 지역과 인도의 무갈 왕조의 봉록적 지배권의 기본적 형태였다. [94]봉급 지급이라는 방법은 보다 고도의 중앙집권적 국가를 이룩했던 중국에서 관례적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세금 농사꾼이건 봉급 받는 관리건 간에 거두어들인 세금을 상부에는 바치지 않고 자기 밑천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막스 베버가 추산한 바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좋던 때라 할지라도 중앙에 도달하는 것은 총수입의 40%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그렇다고는 하지만 지배권 장악자들이 강한 자율권을 가지는 세습적 지배권에 비하여 봉록적인 지배권은 확실히 중앙집권의 정도가 훨씬 높고 훨씬 폭넓었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세습적 지배권과 봉록적 지배권의 공통적인 양상은 그런 지배권 행사들이 우리가 말한 바 있는 의례에 얽혀있었던 정도에 있다. 의례적인 성격은 특히 세습적 지배권의 경우에 뚜렷하다. 그런 데서는 영주가 예속적인 농민들과 직접적으로 개인적인 관계나, 아니면 적어도 개인화된 관계를 맺는 게 보통이었다. 농민들이 이런 영주들에게 해주는 일에는 의례적인 측면이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영주와 농민과의 관계가 흔히 일종의 계약으로 이루어져서, 농민들이 바치는 것을 받는 대가로 영주는 그들을 보호하고 안심하고 땅을 일굴 수 있게 한 교환관계였다는 사실이다. 13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계약관계가 일종의 협약이라는 말로 상정되었다.…농민들이 영[95]주에게 해주는 일은 대개 주기적인 의례행사들과 얽혀있었다. 예컨대 성탄절에는 맥주나 닭을 바치고 부활절에는 계란을 바치는 따위이다. 이에 대하여 영주는 주민들에 성탄절이나 부활절 축제를 열어주고, 혼인을 축하하기 위하여 잔체를 베풀어준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와 마찬가지로 봉록적인 지배권이 보편화된 곳에서는 의례를 통하여 농민과 궁극적 지배자이자 지상의 보호자로서의 최고 군주 사이의 관계를 은폐시키려 하였다. 지배자를 보기를 하늘의 아들이나 지상의 초자연적 세력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배자는 그가 군림한 나라의 질서를 지탱시킴으로써 우주의 섭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런가하면 제왕의 의례적인 영광은 그를 위해 일하고 그의 명령에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졌다. 이리하여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국가 관리는 농민들이 보기에 단지 행정 기술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儀式的)인 존재이기도 했다. 페이 사오퉁은 중국에서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거나, 메뚜기떼가 농토를 휩쓸면 어떻게 대처하는 지 설명해주고 있다.… [96]이러한 의례는 여러 가지 구실을 할 수가 있다. 호만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런 의례는 의식적(儀式的)인 방법으로 농민을 보상해줌으로써 불균등한 농민과 집권자 사이의 균형을 맞춰준다. 아울러 이는 집권자의 정체를 의례적인 가치로 가려줌으로써 피지배자들의 잠재적인 반대주장에 대하여 지배자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준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토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배권의 세 번째 형태는 상업적 지배권이다. 여기서는 토지가 지주의 개인적인 소유물이어서 주인이 이익을 얻기 위해 사고팔거나, 이용할 물체로 간주한다.…상업적인 지배권도 다른 지배권들처럼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지배권들처럼 토지를 이용하는 대가로서 돈을 거둘 권리를 주장한다. 이러한 것을 흔히 지대(地代)라고 부른다. 토지와 토지로부터 거둘 수 있는 수입을 마치 돈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상업적 지배권은 앞에서 살핀 바 있는 지배권들[97]과 다르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러한 토지에 대한 세 가지 형태의 지배권―세습적, 봉록적, 상업적―이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어느 사회에서건 이러한 지배권들은 서로 공존한다. 어떤 특정한 사회체계의 조직적 측면을 결정짓는 것은 오히려 이런 형태의 지배권들이 어떻게 조합되거나 ‘혼합’되고, 각 형태들이 상대적으로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다.…[99]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지배권들이 단지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러한 지배권을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다.…확장 도상의 북서 유럽에서는 상업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투자하여 구기술의 생태형을 변화시키는 데 노력함으로써 생산 상의 모험을 감행한 셈이었다. 반면에 전통적인 동양이라든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구기술에 의존하는 생산기반을 보존하[100]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산의 위험을 언제까지 미루었으며 조세징수수단만을 발달시켰다. 이러한 체제를 지대자본주의라고 한다{울프 1978: 91-100).&lt;/SPAN&gt; &lt;/P&gt;</description>
			<category>개념/전략</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25</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25#entry25comment</comments>
			<pubDate>Fri, 27 Apr 2007 14:37:3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시공간들 사이의 ‘칸’에 대하여(2)</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24</link>
			<description>&amp;nbsp;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전체적으로 라구르님이 블로그를 개설하셔서 먼저 글을 쓰시고, 여기에 대해 저희들이 댓글을 다는 식으로 진행되어야 전체적으로 글들이 제 위치를 찾을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제가 글을 쓰고 라구르님을 포함하여 여러 분들이 댓글을 다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군요. 뭐 이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게 딱히 부담스러울 것은 없습니다만, 하여 간에 이 글 역시 그러한 기형적인 형식에 따라 또 제가 새로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당사자들이야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겠습니다만, 혹시 보시는 분들이 논의를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애초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던 계기는 ‘시대구분’ 사이의 칸에 대한 라구르님의 문제제기(이 블로그의 &amp;lt;쿠이이이즈~!! 계급, 신분, 문화, 특권 + 국가, 직역&amp;gt;이라는 글에 달린 마지막 댓글)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로 뭔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제가 생각해왔던 어떤 점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지난 번 글에서는 쓰다 보니 흐름을 놓쳐서 이에 대한 언급으로까지 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건 뭐냐 하면, 결국 ‘시대의 구분’이라는 것은 ‘양식의 차이’를 가지고 설명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라구르님이 쓰신 글에서 일부를 차용하면, “이 시대와 저 시대는 칸이 쳐져 있어서 이 시대에서 저 시대로 넘어가면 양식이라는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고나 행동, 표현의 양식이 바뀌는 것을 두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고 ‘변화’를 운운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는데요. 물론, 그 전에, ‘그 양식으로 규정된 것 외에 다른 일은 나타나지 않으며 유사한 현상이 관찰되더라도 그것은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류학 개론에서 말하는 심리의 제일성이라는 것을 조금 더 확장 또는 변용(이게 애매하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패러디’)해서 ‘계산능력의 제일성’이라는 전제를 두고(이것은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STYLE: italic;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Islands of History&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차용하여 하와인의 무차별적인 실용주의를 ‘야생의 계산’이라고 불렀던 마샬 살린스의 어휘를 다시 차용한 것인데요), 그 계산에 사용되는, 그리고 그 계산에 따른 행위에 사용되는 유ㆍ무형의(혹은 물질적ㆍ관념적인) 도구들의 양식적인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는 인간관ㆍ사회관을 구현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경우 라구르님이 댓글에서 표적으로 삼았던 사고방식들 중 ‘양식으로 규정된 것 외에 다른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대를, ‘시공간들 사이의 칸을 넘어 유사한 현상이 관찰되더라도 그것은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반대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여기에서 ‘제한적인 반대’ 즉 ‘제한적인 찬성’을 하게 된다는 것은, 역시 그것이 ‘양식’ 자체의 맥락과 어느 정도로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가에 따라서 실제 개별 사실이나 해석에 대해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양식 내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일수록 그 반대의 정도는 강해질 것이고, 계산 내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일수록 그 찬성의 정도는 강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적 사상(事象)들에 대한 설명 내지 평가들은 이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게 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단순하고 회피적인 절충론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양식의 차이’라는 단일한 극점만을 설정하고 각종의 사상들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 외에 ‘계산(혹은 심리)’이라는 다른 극을 설정하고 이 설정을 통해서 새롭게 사상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자위를 해봅니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지점이 역사학과 민속학(그리고 인류학)의 경계점이라고 보시는 견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대구분을 그 본령이자 궁극적인 지향으로 삼는 학문이고, 민속학은 그 본령이나 궁극적인 지향에 대한 인식이 모호한 상태에서 흔히 이를 넘나드는 일을 일삼아왔기 때문입니다. 민속학사(그리고 인류학사)에는 이로 인한 뻘짓들의 흔적이 마치 수십, 수백 구의 시체를 절단 낸 토막살인현장의 혈흔처럼 어지럽게 널리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 분간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난만한 혈흔들로 인해 모종의 성취의 가능성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집으로 님의 논평과 관련해서는 “관습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제된 시공간적 구분을 넘어”라는 문장이 제가 맥락과 계열의 개념적인 차이를 설정하기 위해 집어넣은 것인데, 역시 모호한 표현인데다가 설득력도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집으로 님의 논평이 적절했고, 저의 논지의 약한 고리를 날카롭게 짚어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첫째, 제가 생각하기에 ‘맥락’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들의 내적 일관성이 해석대상에 실재하거나 적어도 해석자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전제 아래 성립하게 되는(혹은 성립해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식’도 맥락이 될 수 있겠지요. 물론 다른 것들이 맥락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계열과의 대비를 위한 정의가 아니라, 우리가 ‘맥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그 개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려고 할 때 그렇게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본성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실은 그러한 의미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일회적이고 돌발적이며 뜬금없기 마련인 각종의 사상(事象)―저는 사물과 현상, 사건 등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이 말이 적합한 것 같아 이 ‘사상’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이건 일본식 한자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들에 대한 &#039;해석&#039;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미들의 체계 혹은 구조’라는 차원에서의 내적 일관성이 있다는 전제가 불가결할 것입니다. ‘하나의 사회’에 ‘하나’가 아닌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입론을 하는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그러한 입론 역시 ‘그보다 작은 사회’에서는 그 고유한 하나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전제되어야 ‘그보다 큰 사회’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입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그건 뒤집어 말하면 ‘그 작은 사회’에는 ‘일관된, 공유되고 학습된 하나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한 셈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연구분석은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맥락화’가 중요한 것이고, 그 맥락을 잡아내지 못하거나 잘못 잡아내면 뻘짓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며, 하여튼 맥락에 관한 우리의 모든 대화가 이러한 정의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계열’은 이러한 맥락의 존재, 그러니까 ‘의미들의 체계 혹은 구조’라는 뜻에서의 ‘내적 일관성’ 혹은 ‘학습되고 공유된 성격’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그러나 역시 맥락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역사적 사상들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련의 연쇄관계 혹은 인덱스들의 반복적 출현이라는 거죠.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둘째, 그런 의미에서 맥락과 계열은 절대적인 구분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식의 성격 상, 그리고 일단 지식과 해석을 성립 가능케 하는 기존의 맥락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계열들이 끄집어내져서 새로운 해석과 지식이 성립하면,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일수록 그 계열들은 이제 새로운 맥락으로 바뀌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맥락과 계열은 절대적인 구분이 아니라, 지식과 해석, 설명과 이해라는 세계에 존재하는 임의적이고 실천적인 구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가령 마을의 역사는 맥락이고 세계체제의 역사는 계열인 것이 아니라, 또 공시적 연구는 맥락적 지식을 정리한 것이고 통시적 연구는 계열적 지식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마을의 역사가 기존의 지식의 맥락인 상황에서 세계체제의 역사가 지식의 계열이 되었다면, 전제가 반대인 경우(즉 세계체제의 역사가 맥락으로 기능하고 있을 경우) 마을의 역사가 새로운 지식의 계열이 되기도 한다고 일단 정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지지지지난 번 쯤의 글(이 블로그에 올린 &amp;lt;문진(問診) 그리고 청진(聽診), 촉진(觸診)..―인류학에서 관찰의 지위(3)&amp;gt;)에서 “계열과 맥락을 구별해서 부르는 것은 사실 말장난입니다만, 일단 개념적인 구분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맥락은 하나의 형태의 발생과정 혹은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재현(representation)을, 계열은 하나의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 사이의 상대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구축된 지식이나 재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이라고 쓴 것은 현상과 맥락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호성은 지적인 혼란 혹은 연구자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대개는 현상 자체가 시공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즉 항상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열과 맥락을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만, 이 발생적 맥락에 대한 아카데미의 신화는 상당히 막강하므로, 이 신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바꿔 말하면 이 신화의 신봉자들로부터 쏟아질 탈맥락적인 지식이라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브라가님의 표현을 빌자면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의 황당한 상상―사실상 광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단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 편의적으로 맥락과 계열을 분리하여 개념화하자는 것입니다.”라고 적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데요. 이러한 인식은 이에 대한 브라가님(및 그 룸메이트) 그리고 빠진서님의 논평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불가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락과 계열이라는 이상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지지지지난 번 글로부터의 인용에 적은 것처럼 맥락에 대한 지식과 이에 대한 접근방법이 제도화되고 권력화함에 따라 다른 종류의 맥락들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접근의 여지 자체를 차단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셋째, 그런 의미에서, 공시적인 것에 대한 통시적인 것만이 계열인 것이 아니고, 국지적인 것에 대한 광역적인 것이 계열적인 지식일 수 있으며, 또한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통시적이고 광역적인 지식들만이 맥락적 지식으로 설정되어 있을 경우 공시적이고 국지적인 지식들이 계열적인 지식들로 설정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매 개별 연구의 출발점에서 맥락은 연속적이고 일관된 연쇄관계들을 표상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계열은 단속적이고 분절적인 연쇄관계들을 표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특징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실제로 우리가 역사적 사상들을 검색해나갈 때 자료들 그리고 역사적 실재들 중에서 맥락으로서 연속적인 관계들을, 계열로서 단속적인 관계들을 검출해나간다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전제가 되어야 할 인식은 맥락이든 계열이든 모두 본성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다는 점이 되어야 하겠지요.&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어츠의 세부 논지에 대해서는, 사실 저는 ‘중층기술’,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논평’ ‘발리의 시간과 인간과 행동’, ‘발리 닭싸움’ 이 네 가지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이와 관련해서 논쟁할 여지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기어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하는 식으로 일단 자위를 하고, 추후에 시간이 날 때 조금 더 읽어보고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그 글은 1997년 쯤의 한국문화인류학회 전국대회 발표초록집에 “문화의 재고와 재고의 감옥”인가 하는 제목으로 실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혹시 ‘발표자 중 누군가’가 그 글 원고를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빠진서님의 논평은 몹시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클래스’가 영국어가 아니라 시공간을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어디에서 싹텄는지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적었을 때는 “계급이라는 용어를 산업 사회의 등장 이전의 시기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조금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인 것 같군요. 스테이터스와 에스테이츠, 그리고 대표(레프레젠테이션)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것만으로는 잘 모르겠군요. 단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질문을 던져본다면, 빠진서님의 설명에서는 산업화 이후의 사회에서의 사회관계의 본성은 경제적인 것이고 그 이전(왜냐하면 거기는 정치적인 대표성을 사회조직의 기본원리로 삼는 신분사회일 뿐만 아니라 또한 경제적인 원리로만 조직되는 사회관계로서의 계급조차 없었으니까)에서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식의 도식이 느껴지는데요. 이 도식 자체가 빠진서님의 설명틀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보입니다만, 또한 그러한 왜곡이 성립할 수 있는 여지가 지금의 설명틀에서는 너무나 명백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조금 더 설명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라구르님의 지지난 번 댓글(이 블로그의 &amp;lt;가장무도 및 시공간들 사이의 &#039;칸&#039;에 대하여(1)&amp;gt;에 달린 세 번째 댓글)에서는 그 중 두 번째로 제기하신 문제, 즉 “어떤 논자는 신분층이 되기 이전에 그들은 계급으로 존재하였다가 법제적 특권을 취득함으로써 신분층으로 공고화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어법이 과연 맞는 것인가”가 이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생각에는 이 어법이 그 자체로 틀린 점은 없지 않은가 생각되고, 라구르님은 그렇지 않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에 대해서 별로 많이 생각해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라구르님께서 이 어법의 어떤 점이 문제라는 것인지 다시 조금만 설명을 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한컴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한컴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개념/전략</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24</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24#entry24comment</comments>
			<pubDate>Tue, 10 Apr 2007 14:35:52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장무도 및 시공간들 사이의 &#039;칸&#039;에 대하여(1)</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23</link>
			<description>&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asurajang.cafe24.com/attach/13/1256832610.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244&quot; width=&quot;327&quot; /&gt;&lt;/div&gt;&lt;/SPAN&gt;이 글은 아래 &#039;쿠이이이이즈..&#039;에 쓰신 라구르님의 댓글에 대한 답댓글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만, 쓰다보니 조금 길어져서 독자적인 글로 올립니다. 쓰다보니 발생한 또 하나의 문제는 쓰기 시작한 맥락을 놓쳐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글인 채로 끝났다는 점인데요. 이건 이것대로 조만간 다시 정리를 해서 추가적인 설명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은 별 의미가 없고, 그냥 글만 있으면 너무 심심한 듯 하여 올려본 것입니다. &#039;짤방&#039;이라고 하나요?&lt;br /&gt;&lt;br /&gt;***************&lt;br /&gt;&lt;br /&gt;&amp;nbsp;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039;가장무도&#039; 문제는 몇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현재의 팀블로그의 전신으로 이와 비슷한 사이트(팀블로그가 아니라 홈페이지 형식의)가 운영된 적이 있었는데, 하다 보니 일정하게 침체기가 닥쳐왔었고, 그래서 &quot;이게 무슨 동창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잡담만 할려는 거면 그냥 안 하는 게 낫지 않느냐&quot;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서 위기가 증폭된 일이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유지관리목적의 그룹활동이 되지 말자는 취지는 좋았는데, 지나면서 보니 그냥 그렇게 해소되어서 사는 게 서로에게 유익할 게 하나도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다시 어떻게든 해보자 하는 것이 된 거죠(여기까지는 라구르님도 대충 짐작하시는 상황일 것 같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재의 가장무도 상황은, 가장 중요하게는, 제 생각에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시작을 했지만, 동창회(이미 권력화한 사회적 기반 혹은 사회적 네트워크와 학술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연결될 소지가 농후한)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만든 애초의 멤버십을 상기시키는 적극적인 행위를 자제하면서 새로운 팀블로그 아래에서의 인연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하다보면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상황도 없지 않다는 거죠. 문제거리다 된다고 보면 사실 문제이기도 한데요. 잘 생각해보면 어차피 팀블로그가 지속되다보면 그 안에서도(즉 새로운 팀블로그 체제 아래에서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개인적인 여러 경험들과 그들만의 이야기꺼리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하니) 개인적인 친소관계나 관심의 공통점이랄지 학문적 혹은 정치적 입장의 공통성 내지 유사성이랄지 그런 것들에 기반을 둔 더욱 내밀한 관계라는 게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니, 그게 아주 꼭 전체적으로 틀을 유지하는데 적대적인 성격을 갖는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일단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걸 너무 조장하거나 튀는 행동들은 자제될 필요도 있겠지만요.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여간에, 일단은, 이거 너무 까다롭게 보지 않고 넘어갔으면 하는데, 글쎄요, 이조차도 사람들과 많이 이야기해본 문제는 아니므로, 실은 파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뭐 저와 라구르님과의 가장무도 역시 또 다른 쪽에서는 &#039;월플라워&#039; 적인 감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문제이니(저희 둘을 다 아는 사람이라면 무도장에 좀처럼 올 생각을 먹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몸매를 가진 두 남자가 &#039;무도&#039;를 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희극적으로 생각되어 도저히 &#039;월플라워&#039;적인 감각으로 바라볼 수 없을 거 같기는 합니다만), 뭐 이런 종류의 코뮤니티라는 게 일정하게 그런 상호월플화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교류하고 소통하는 건 아닌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이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활동이 갖는 본질적으로 썰렁한 면모인 것이고, 그래서 그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죽어라고 오프라인 모임을 갖는 게 아닐까요? 이 문제도 조금 더 블로그들이 굴러가게 되면 전체적으로 한 번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점검할 문제이기는 할 것 같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라구르님의 퀴즈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댓글을 통해 라구르님이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심으로써, 아니면 적어도 칼집이라도 잡으심으로써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저희들이 맥락과 계열이라는 어휘를 가지고 토론해오던 주제와 상통하는 질문인 것으로(적어도 저에게는) 생각됩니다. 잠시 상기를 시키기 위해 인용을 하면, 여기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저는 지금 쓰고 있는 학위논문에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단 바 있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8.55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HWP-TAB: 1&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asurajang.cafe24.com/attach/13/1092721202.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297&quot; width=&quot;225&quot; /&gt;&lt;/div&gt;&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HWP-TAB: 1&quot;&gt;&amp;nbsp; &amp;nbsp; &amp;nbsp;&lt;/SPAN&gt;&lt;FONT size=2&gt;여기에서 ‘맥락’은 ‘해석 가능한 부호들(혹은 상징)의 상호 연결된 체계’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인류학자는 이를 통해 앞서 일어난 사회적 사건이나 행위, 제도, 과정 등을 이해할 수 있게, 즉 중층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상정된다(기어츠 1998: 25). 이 글에서는 이를 특히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통해 흔히 연구되어온 하나의 소규모 사회에 대한 내적 설명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반면 ‘계열’은 관습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제된 시공간적 구분을 넘어 특정한 역사적ㆍ문화적 사상(事象)의 지속ㆍ공유나 분화ㆍ변화를 나타내는 지표들(indicators)의 상호연결된 체계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특정 지표의 출현 혹은 소멸 양상을 통해 지속ㆍ공유나 분화ㆍ변화를 찾아낸다는 기획은 제3세대 아날학파의 계열사(serial history), 특히 보벨(Vovelle 1990: 16-19; 150-151; 232-244)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단지, 이 글에서의 문제의식은 보벨 등이 활용하는 역사자료들의 시계열, 즉 역사적 지표들의 반복적인 출현양상은 본질적으로 연속적이라기보다는 단속적이라는 점, 그러한 지표의 활용이 시간계열에서만 아니라 공간계열을 통해서도 포착 가능하며 이것이 발견적으로 유용한 도구가 된다는 점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 글에서는 이를 특히 위에서 적은 바의 의미에서 ‘맥락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회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lt;/FONT&gt;&lt;/SPAN&gt;&lt;FONT size=2&gt; &lt;/FONT&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제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조금 크게 본다면 용어나 개념들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만들어진 순간의 시공간적 구체성ㆍ특수성을 벗어나서 다른 시공간 좌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되는 것인가, 열린다면 그것은 어떠한 조건에서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라구르님이 ‘계급’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 저는 &quot;생산수단의 소유여부의 의해 구분된 사회집단이 아닌가요?&quot;라고 답을 하다가 아차 했는데요. 일차적으로는 계급이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의해 구분되지 않는다는 반례가 무한대로 많기에 그러한 정의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잊고 있었던) 점을 상기했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는 ‘클래스’가 영국어가 아니라 시공간을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어디에서 싹텄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가령 ‘봉건제(퓨달리즘)’는 더 이상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갖는 용어로 설정되고 있지 않지요. 마치 ‘직역’을 영국사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신분’도 실은 ‘봉건제’와 결부될 수 없다면 사용하기가 껄끄러운 용어인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고, 조선의 양반을 ‘신분’이라거나 ‘신분’이 아니라거나 하면서 전개된 논쟁이 실은 모두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 같은데요. 기본적으로는 그래서 그걸(계급은 거의 완전히, 신분은 경향적으로) 쓰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껄끄러운 토론에 말려드느니 조금 더 기술적(descriptive)인 용어로 쓰고 말겠다는 생각들인 거겠지요. 인류학자들의 경우에도 한때 문화라는 말을 쓰기가 조금 껄끄러운 상황에 있었습니다만(제가 기억하기로, 이 아수라장을 구성하고 있는 멤버 중 일부는 대학원 과정 중에 확실히 ‘문화’라는 용어의 해체를 주장하는 글을 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청 깨졌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사실 한국문화인류학회 전국대회에서 발표되었던 가장 래디컬한 문제제기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요즘은 또 그냥 쓰는 분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화를 공격하기에는 다들 분석틀과 밥그릇 모두가 그와 너무 심각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계급이 떨어졌고, 신분이 거의 떨어졌고, 문화는 상당히 공허한 상태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고, 다음 순서는 국가가 또 떨어지는 순서가 되려나요? 앞으로 ‘탈국가시대’ 혹은 ‘초국경시대’라는 개념이 유행하게 되면, ‘조선은 독자적인 국가였는가?’라든가 ‘중국은 어디까지였는가?’와 같은 질문이 예비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경우 떨어질 지도 모르겠네요(인류학자이신 장정아 선생님은 이러한 입론에 대하여, 적어도 현재까지 이루어진 수준에서의 사회현상에 대하여 초국가주의 혹은 탈국경화라고 이름붙이는 담론은 성급한 것이라는 취지를 포함하는 학위논문을 작성하신 바 있습니다만).&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좁게 보면,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엄밀한 맥락의 추구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던 강력한 개념들을 맞춰 떨어뜨리고 있는 상황은 학계에 두 가지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예전에는 감히 구성되거나 적용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개념을 탈시대/탈지역적으로 적용시키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거겠죠. 가령,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연암을 해체적인 지식인으로 표상하는 담론의 등장 따위가 그런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학계가 가지는 전문성이 구체적인 맥락을 엄밀하게 제시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 담보되고 따라서 아카데미를 구성하기 위해 그것을 상호 확인하려드는 경향 역시 강화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딱히 왜 그렇다는 점에 대해서는 설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양자에 대해서 모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으로 입지를 삼아왔습니다만, 이것이 기본적으로 자아분열적인 포즈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고, 그래서 위에서 적은 것과 같은 맥락/계열의 구분을 도입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생각이 꼬이는군요. 다음에 또 기회가 나면 적도록 하겠습니다.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개념/전략</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23</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23#entry23comment</comments>
			<pubDate>Mon,  2 Apr 2007 13:59:2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쿠이이이즈~!! 계급, 신분, 문화, 특권 + 국가, 직역</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22</link>
			<description>&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제가 아는 어떤 분(지난번에 이 블로그에도 글을 쓰셨던 ‘라구르’라는 분입니다)이 저에게 퀴즈를 내셨는데요. 이 퀴즈의 특징은 출제자가 정답을 분명히 알고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는 점, 그리고 출제자가 답변자였던 제게 마땅한 대답을 듣지 못하자 아수라장에 대신 좀 출제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아수라장에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해주실 분이 있으실 거 같다면서요.&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서양사고 동양사고 한국사고 간에 역사를 보는 큰 흐름이라는 것이 신분, 계급, 문화, 특권이라는 네 가지의 어휘를 가지고 이리저리 엮어서 틀을 짜는 거 같다는 거죠. 그런데, 그 분이 보기에는 이 네 가지 어휘에 대한 정의는 하지 않고, 그것이 결부되는 양상이 어느 시기에 바뀌었는가에 대해서만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는(정확히는 &#039;했던&#039;) 것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퀴즈는, 이 네 어휘(신분, 계급, 문화, 특권)를 각각 정의하고, 그 정의에 바탕해서 역사현상(혹은 경향)을 설명하는 논리를 짜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써놓고 보니 퀴즈라기보다는 요청이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요..).&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제가 똑부러지게 답을 못하자 그 분이 주신 힌트(이상하죠? 정답을 모르면서 힌트를 주다니..)가 두 가지 있었는데요. 첫째는, 서양사는 이 네 어휘로 틀이 짜이는 것 같고, 한국사에 대해서도 이 네 어휘로 틀을 짜버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당신이 보기에 한국사(조선사)를 설명하려면 이 네 어휘에 ‘국가’와 ‘직역’이라는 두 단어를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답니다. 으음.. ‘직역’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전근대사회에서 각각의 신분에 따라 정해진 역’이라고 되어 있네요(사전의 해설은 이 글 말미에 덧붙이겠습니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두 번째 힌트는, 조선사를 바라보는 기존의 틀은 본래 조선의 양반은 신분이 아니었는데, 특정 계급이 특정 시기에 자신의 사회적 성격을 신분화하여 양반이 신분이 되었다는 전제 아래, 그 시기가 고려시대이냐 조선시대이냐, 조선시대 중에서도 어느 시기이냐를 놓고 논쟁하는 구도였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분이 보시기에는 그 ‘신분화’라는 것은 결국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권리를 세습적인 특권으로 만듦으로써 문화적으로(즉 법적이고 제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인데, 웃기는 건 신분이 뭐고 계급이 뭐고 특권이나 문화가 뭔지를 정의하거나 설명하지 않은 채로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에 대해서만 가지고 논쟁을 하니까 답도 안 나오고 더 이상 논의의 발전도 없었으며, 지금은 또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사회와 역사(현대사회 포함)를 바라보는 데에서 정말 중요한 이 네 어휘가 완전히 학술의 영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거였습니다. &lt;br /&gt;&lt;br /&gt;어떻게 퀴즈의 성격을 조금 이해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lt;br /&gt;&lt;br /&gt;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 나오는 &#039;직역&#039;에 대한 설명을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lt;br /&gt;&lt;br /&gt;&amp;lt;신역(身役)이라고도 한다. 각각의 신분에 따라 담당해야 하는 역의 종류가 달랐다. 조선왕조 체제하에서 모든 민은 그 신분에 상응하는 국역(國役)을 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개개의 민에게 부과되는 신역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리고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신분과 역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어느 역에 종사하는가에 따라 그 담당자의 신분이 규정되고 반대로 신분은 역을 규정하는 성격을 지녔다. 즉 개인이 사회 속에서 맡을 수 있는 직책에 따라 역의 종류가 규정되기 때문에 이를 직역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양반이 관직에 종사할 경우, 이것은 직역으로 인정되어 다른 역이 면제된다. 그밖에 양반만이 소속되는 각종 &lt;A class=dic_text href=&quot;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16583&quot;&gt;군역&lt;/A&gt;에 종사함으로써 직역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중인(中人)은 중앙 또는 지방관청의 서리(胥吏)나 기술관 등 자체가 신역이며 곧 직역이었다. 중인 이상의 신분에서 담당하는 직역은 역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일정한 보상이 주어졌다. 관리가 될 경우 그에 해당하는 수조지(收租地)가 지급되거나 녹봉(祿俸)이 주어졌다. 또한 양반의 경우 일정기간 해당 군역에 종사하면 체아직(遞兒職)이 제수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직역은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기도 했다. 한편 평민 이하의 신분에게도 군역(軍役)을 비롯한 각종 형태의 직역이 부과되었다. 양인과 천민에 있어서도 양역(良役：군역)·천역(賤役)의 구별이 있고, 군병만이 아니라 순시(巡視)·포도(捕盜) 등의 직무도 많았다. 양인의 최하위층인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은, 신분은 양인이나 그 수행직무는 천역이었다. 이른바 칠반천역(七般賤役)으로 일컬어지는 조례(&lt;IMG height=16 src=&quot;http://dicimg.empas.com/font/c7224.gif&quot; width=16 align=top border=0&gt;&lt;IMG height=16 src=&quot;http://dicimg.empas.com/font/c5de5.gif&quot; width=16 align=top border=0&gt;)·나장(羅將)·일수(日守)·조군(漕軍)·수군(水軍)·봉군(烽軍)·역보(驛保) 등의 직역이 그것이다. 직역은 대체로 양인 이하의 신분에서 진정한 의미의 역으로 성립되었다. 이같은 직역은 조선 중기 이후 양인 이하의 직역이 점차 현물납(現物納)의 형태로 변경됨에 따라 부세로 바뀌었다.&amp;gt;&lt;/P&gt;&lt;/SPAN&gt;</description>
			<category>개념/전략</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22</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22#entry22comment</comments>
			<pubDate>Tue, 20 Mar 2007 19:02:1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식민지 조선 삼그루판의 농학과 농속: 환경, 기술, 이념의 역사인류학/ 연구의 방법</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20</link>
			<description>현재 학위논문을 적고 있다는 점은 앞의 글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1장 &#039;서론&#039;의 3절 &#039;연구의 개요&#039; 중 제1소절이 &#039;연구의 방법&#039;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2월말에 학과에 절차 상(즉 형식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초고를 적고 있는데요. 그 중 &#039;연구의 방법&#039;이라는 글을 올려 &amp;lt;아수라장&amp;gt;에 드나드시는 여러분의 공람에 붙일까 합니다. &lt;br /&gt;&lt;br /&gt;현재 올리는 버전은 절차 상 제출하는 초고를 위한 것이고 3월말에 심사위원에게 돌리게 될 초고에는 이를 개정한 내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지도교수이신 모 선생님이 &#039;연구방법에 대해 조금 세게 쓰는 것이 좋겠다&#039;는 코멘트를 주신(여기에 올릴 글을 읽지 않고 본론만 보신 단계에서) 상태인지라 아마 내용은 훨씬 공을 들인 것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쓰게 될 문제의식은 지금 올리는 내용이 골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공람에 붙이는 것은, 그 문제의식의 논리적인 혹은 전략적인 오류나 한계, 미진한 점이나 강조해야할 점에 대한 코멘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아무도 댓글 안 다셔도 실망하지 않을 터이니, 일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lt;br /&gt;&lt;br /&gt;*******************&lt;br /&gt;&lt;br /&gt;&amp;nbsp;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 연구의 개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1) 연구의 방법&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연구에서 사용한 농업 관련 인터뷰 자료는 박사과정진입과 함께 1999년 3월 24일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중말(조산동)에서 시작하여 2005년 5월 27일 안성시 도기동 도구머리 마을을 끝으로 일단락을 지은 경기남부에서의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것이다. 논문의 집필은 인터뷰 자료의 분류ㆍ정리를 마친 2005년 10월에 시작하였는데, 2005년 12월초부터 2006년 1월말까지, 그리고 2006년 9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는 문헌자료를 보완하느라 집필이 중단되었다. 본래 문헌작업은 인터뷰를 위한 현지조사를 진행하면서 혹은 논문 집필 중 간간이 진행해 왔었는데, 집필 중 크게 부족함을 느껴 집필을 중단하고 보완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lt;SPAN style=&quot;FONT-SIZE: 8.55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각주: 이 ‘부족함’은 부분적으로 학위논문의 연구계획이 크게 두 차례의 수정을 거친 데에 따른 것이었는데, 수정 이전의 구상이 반영된 인터뷰 및 문헌 자료들은 언젠가 따로 검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lt;/SPAN&gt;.&lt;/SPAN&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지조사 중의 인터뷰는 농업 분야로 제한되지 않았고, 반농반어촌의 어업이라든가 산촌이나 시가지 주변의 시탄(柴炭) 채취업과 같은 기타 생업, 유통과 장시, 가족과 친족, 사회조직과 신분관계, 의례와 놀이, 인구 및 마을 공간의 구성과 변화 등 촌락의 생활문화 전반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현지조사를 시작하던 당시에는 작업이 외주용역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아 그 용역의 요구를 채우다보니 그리 된 것이었는데, 중간의 어느 시기인가부터는 그럴 의무가 없는 작업인 경우에도 질문을 넓혀서 진행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그리 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불안감의 정체는 첫째로 연구주제의 해명에 당장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도 이 노농(老農)들의 이야기를 연구자는 물론 그 누구도 다시 듣고 기록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점, 둘째로 가령 친족이나 마을조직, 의례나 놀이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농업기술이나 경제관행과 관련된 설명을 찾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 셋째, 그물을 넓게 펴고 촌락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해두지 않으면, 농업문제와 관련하여 연구자가 찾아낸 설명이 개연성이 있는 것인지 여부를 해당 촌락사회 자체의 맥락에서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익한 불안감은 연구자의 학문성향이 인류학의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의 강한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던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지조사는 인터뷰 외에 마을ㆍ가정ㆍ개인 단위의 의례와 놀이 등에 대한 참여관찰을 포함하였지만, 이는 해당 작업이 외주용역에 의해 주어지거나 순전히 호기심에서 비롯한 경우에 한정되었으며, 조사 당시에나 집필 과정에서나 그 내용들이 이 연구에 포함시킬 성질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점은 항시 전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조차 실은 말이 ‘참여’관찰이지, 연구자는 대개 사진을 찍고 있거나, 아니면 대개 연구주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묵묵히 술과 고기를 축내고 있기 십상이었다. 연구과정이 이와 같이 ‘참여’적인 성격과 거리가 먼 냉랭한 것이었던 점은, 아마 다루는 시기가 주로 일제시기와 해방직후의 상황이고, 다루는 분야가 생산과 유통이며, 이것이 ‘참여’적으로 해명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옳거나 바람직한 인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연구방식이 현지조사라는 장을 형성하여 만난 연구자와 연구대상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서적인 공감대가 상당히 부족한 채로 끝나버린 것이었고, 인류학의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의 영향 아래에서 훈련을 받은 연구자의 그것으로서는 상당히 미흡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lt;br /&gt;&lt;br /&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 연구의 과정은 이렇게 한 마을, 혹은 몇 사람과 긴밀한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새로운 마을, 다른 새로운 사람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면서 그의 설명을 듣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농업기술과 경제관행이 어떻게 짜여있는지, 그것이 다른 마을이나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더 이상 설명을 들을 것이 없거나 단시간 내에 듣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같은 마을의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마을의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는 식이었다. 새롭게 마련된 인터뷰의 자리에서도 역시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물론 같은 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고 설명을 듣는다고 하여, 항상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배움을 청하고 설명을 듣는 과정에서 연구자 자신이 배우는 바가 있고, 배우는 것이 있는 이상 질문의 내용이나 문답의 요령이 점차로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뒤집어 이야기하면, 1999년 3월 무렵에 가까운 조사에서 묻고 들은 내용은 2005년 5월 무렵에 가까운 조사에서 묻고 들은 내용과는 전혀 성격이 판이하였다. 그 판이함에 대해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면, 초기의 조사내용은 대개 논문의 집필과정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사초기의 그 수많은 마을 그리고 수많은 노농들과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허비해버린 것에 대해서는 현지조사가 진행될수록, 논문의 초고가 완성되어 갈수록 큰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필요할 경우에는 다시 찾아 인터뷰의 자리를 만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전화로 보완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점은 아마 한국을 조사지로 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같은 분들을 다시 찾기보다는, 앞서 적은 것처럼 새로운 마을, 새로운 사람을 찾아 인터뷰를 이어가는 방향을 택하였다. 같은 사람을 다시 찾아 묻는 시간에 다른 마을 혹은 다른 사람을 새로 찾아 배울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되었고, 실제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것이 옳거나 바람직한 방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마 연구의 목적, 그리고 연구자의 성향과 관련한 문제일 것이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연구의 목적과 관련하여서는 앞 두 절을 통해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후자의 문제에 대해 잠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연구자의 성향은,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보다는 지적으로 소통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정아(2003: 35-36)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연구자의 위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즉 인권단체 간사도 기자도 아닌 ‘학생’이기 때문에 그들은 연구자에게 인권 등의 이야기를 내세우거나 자신의 불행을 과장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덜 가졌고, 좀 더 쉽게 개인사를 이야기하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이런 이야기들(가족, 힘든 이야기, 여자 친구 등), 고향친구들에겐 안 해. 여기서 같이 거류권 싸움하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절대 안하고. 너는 이런 걸 이해해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넌 어쨌든 중국인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니까. 사실 어떨 땐 낯선 사람하고 얘기하는 게 더 편해.…”&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의 인터뷰 상황에 대해서는 연구자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아마 연구자의 그것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가 들으려고 했던 내용도 ‘가족, 힘든 이야기, 여자 친구’ 등 인간사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을 통해 연구주제에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인터뷰가 혹 그런 이야기로 흐르게 되면,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를 원래의 줄거리로 되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느라, 사실 상대의 이야기를 거의 듣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연구자의 현지조사과정을 돌아보고 장정아의 연구내용을 떠올리면, 연구주제와 관련한 내용에서도 실제로 그가 도달한 깊이나 내밀한 부분에는 결코 이를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서 그의 대화상대가 ‘낯선 사람이지만 또 낯선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고, 중국인을 이해하려는 사람이고 그러려면 이 이야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해준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국인’을 ‘농사’ 혹은 ‘농촌’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연구자가 인터뷰 과정에서 상대가 연구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와 관련해서 느꼈던 감각―장정아와 달리 연구자의 경우 이를 직접 확인해주는 이는 없었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물론 장정아의 경우 그 대화상대와 상당히 깊은 정서적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구자의 감각으로는, 이 설명의 전제는 장정아가 해당 주제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와 관련하여 진지하게 더 알고자 하며(즉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확인하기 위해 상대와 대화하려는 것이 아니며), 게다가 그 주제와 관련하여 아주 민감한 부분을 정교하게 건드리는 질문을 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이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은 극단적으로 나누자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물어보지 않은 점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설명을 하려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낯설다’든가 ‘친하다’는 것은 거의 부차적인 문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자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는 상대와는 일찌감치 인터뷰를 종료하고 다른 곳 혹은 다른 이를 찾아 떠났으며, 후자에 해당하는 상대에게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꼬치꼬치 캐묻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한국의 농촌에는 이 후자의 종류의 인간형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며, 게다가 모든 농촌마을에 적어도 한둘씩은 이런 인간형에 해당하는 노농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농사와 생활의 달인이며, 탐구하는 자세로 경험을 축적하고 각종 정보를 흡수함으로써, 깊은 통찰력으로 사회와 역사를 보는 혜안을 갖춘 자들이다.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대상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의 양과 깊이, 배우겠다는 진지한 자세, 적절한 단어와 표현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질문, 이런 것들의 구비 여부가, 일정하게 정서적 친밀감의 부재를 메워주면서, 이 노농들과 정서적인 공감대는 약하지만 지적인 쾌감은 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을 제어하는 가장 중요한 키[舵]는, 상대가 그저 ‘시골노인’이 아니라 나라의 바탕인 ‘조선노농’이라는 점, 그들에게 농사와 농촌, 농업,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배우기 위해 왔지만 결코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고 더불어 대화하고 논하겠다는 인식을 틀어쥐는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다루는 시기가 주로 일제시기이고 부분적으로 18ㆍ19세기와 해방직후시기의 몇 가지 문제를 거론하므로,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 외에, 해당시기와 지역의 문헌에 대한 조사와 반영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다루는 시기와 지역을 불문하고, 역사인류학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학, 그리고 모든 인문사회과학적 연구에 불가결한 과정이므로, 이 자체가 어떤 특별한 방법론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즉 구성된 텍스트를 사용하여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특정 사회역사적 현상에 대해 분석한다는 의미에서 이 글은 어떠한 특수한 방법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단지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회역사적 현상의 분석에 사용한다는 것은, 이 ‘텍스트의 구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네 가지 정도 짚어둘 지점을 형성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첫째,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를 특정 사회역사적 현상, 특히 과거의 어떤 시점 혹은 기간에 일어난 일의 분석에 사용하는 일은, 역사인류학자에게 여타의 인문사회과학자, 특히 문헌사학자에게 잘 허여되지 않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한다. 즉 역사인류학자는 무엇보다도 인터뷰 대상자와 함께 자신이 사료로 사용할 텍스트를 스스로 구성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는 역사인류학자를 포함하여 인류학자에게는 낯설지 않은 일이지만, 역사학자에게는 상당히 낯선(혹은 낯설었던) 종류의 일이다. 이 점, 역사인류학자는 인류학자로서 인류학자에게 허용되고 훈련되어왔던 규칙들에 의거하여 사료 텍스트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학자, 특히 문헌사학자와 구별되어 역사인류학자에게 부여된 특수한 지위와 역할, 방법은 여기까지가 아닌가 한다. 그 후의 작업은, 역사학자이든 인류학자이든, 과거의 사회역사적 현상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이론적 혹은 기술적(技術的)인 면에서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종류의 원리나 규칙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연구자는 전제하였다. 일단 구성된 사료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 기원이 구술(口述)이든 기술(記述)이든 동일한 원리와 규칙에 의해서 취급하는 것이 마땅하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둘째, 그러한 취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약간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의 사회역사적 현상에 대한 지시의 능력, 특히 그 신뢰성이나 대표성과 관련하여, 구술 텍스트와 문서 텍스트 사이에는 여전히 불평등한 위계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위계관계는 구술 텍스트를 사료로 정당히 다루어야 한다고 보는 연구자의 의식 내에서도 조사와 집필 과정 내내 강력히 작용하고 있었다. 이 불평등성을 교정하는 방식, 교정되어야 할 정도, 교정의 방향은 각 연구자마다의 성향과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에 따라 제각각일 수 있다. 연구자가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농민의 기억과 구술을 ‘시골노인’의 그것이 아니라 ‘조선노농’의 그것으로 이해하고자했던 것처럼, 문서 텍스트에 담긴 사실과 내러티브를 ‘서울촌놈’ 내지 ‘일본촌놈’―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혹 민족적 편견의 결과로 여길까 우려하여 사족을 달면, 굳이 ‘일본’을 언급하는 것은 주로 다루는 시기가 일제시기이고 조선의 일본인 텍스트 작성자들은 ‘서울촌놈’이 아니기 때문이다―의 그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이 점 ‘서울촌놈’과 ‘일본촌놈’으로 이루어진 조선총독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구자의 의식 속에도 존재하는 불평등한 위계관계가 어느 정도 교정되어 양자의 위상이 그래도 비슷한 수준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고, 구술 텍스트이든 문서 텍스트이든 같은 방식으로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가능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교정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셋째, 흔히 있는 오해 중 하나는 구술 텍스트가 문서 텍스트에 비해 개인이라는 경험의 한계에 의해 왜곡이나 편견으로 오염되었을 위험이 크지만 또 개인의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생생한 현장의 경험과 느낌―즉 사회역사적 현상의 극히 주관적인 측면―을 전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문서 텍스트는 보다 전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하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부분적으로 타당하지만 부분적으로 그릇된 것이어서, 전적으로 그러하다고 간주한다면 이는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다. 역사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문서 텍스트가 오히려 주관적인 편견과 왜곡 그리고 당대 현장의 상황과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구술 텍스트가 그러한 느낌이 배제된 채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경우를 도처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점은 이하 본문에서 연구자가 사용한 텍스트들, 그리고 그 텍스트들을 다루는 연구자의 방식을 통해 충분히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기에,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언급을 생략하기로 한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7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넷째, 이 점과 관련하여, 연구자의 경우, 객관적 성격의 구술 텍스트가 필요하고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성격이 강한 텍스트를 구성해내고자 할 때, 위력을 발휘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점을 첨언해두고자 한다. 즉 삶의 물질적인 형태들, 혹은 비담론적인 실천이나 관행 등에 관한 박물학적인 정보를 노농들로부터 확인하고 그 연원에 대한 토론을 벌임으로써 의외의 수확을 올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한 삶의 물질적인 형태들로는 가령 기후나 토양에 관한 정보, 마을 내 논밭의 구성비나 공간형태, 두둑이나 고랑의 작성법과 규격, 농기구 등 각종 생활도구의 재질이나 만듦새, 농사작업의 선후관계라든가 기후조건ㆍ다른 농사작업ㆍ다른 생활사적 사건들과의 관련성, 마을의 인구나 성씨집단 혹은 작업집단의 규모, 그리고 이것들과 그 밖의 여러 가지를 가리키는 민속용어들과, 그에 대한 설명에 사용되는 표현이나 내러티브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분포도 등이 있을 수 있으며, 당연히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문서 텍스트들이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로 인터뷰를 이끌어가며, 인터뷰를 통해 구성 가능한 사료 텍스트의 새로운 영역, 그리고 인류학에서 ‘관찰’이라는 방법이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개척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개념/전략</category>
			<category>관찰</category>
			<category>구술텍스트</category>
			<category>문서텍스트</category>
			<category>역사인류학</category>
			<category>인터뷰</category>
			<category>현지조사(fieldwork)</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20</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20#entry20comment</comments>
			<pubDate>Fri, 23 Feb 2007 14:28:2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식민지 조선 삼그루판의 농학과 농속: 환경, 기술, 이념의 역사인류학 / 문제의 제기</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17</link>
			<description>&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asurajang.cafe24.com/attach/13/1382231223.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293&quot; width=&quot;221&quot; /&gt;&lt;/div&gt;&lt;br /&gt;&quot;식민지 조선 삼그루판의 농학과 농속: 환경, 기술, 이념의 역사인류학&quot;은 지금 쓰고 있는 학위논문의 제목(물론 가제지요)입니다. 그 제1장이 서론인데, 서론은 &#039;문제의 제기&#039;라고 이름을 붙인 절로 시작을 합니다. 그 초고를 썼는데, 인용이나 각주가 붙거나 하는 학술적인 형식도 아니고, 내용도 까다로운 성격의 것이 아니라 평이하게 문제의식을 설명하는 것인데다가, 이 블로그에서 다루는 내용들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여 여기에 옮깁니다. 혹시 아수라장 사람들과 방문자들로부터 좋은 코멘트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아 있구요. 본래는 문단들 사이가 그냥 줄바꿈으로 넘어가지만, 인터넷 환경에서는 그게 너무 빡빡하게 보이는 듯 하여, 한 줄씩 띄웠습니다. &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amp;nbsp;&amp;nbsp;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 문제의 제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구월리(현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전자울 마을의 앞들은 일제시기부터 거의 전부가 논이어서 밭은 산 둘레에 조금 있는 정도였다. 당시 모내기의 적기는 양력 6월 초순으로 보았으며 이를 ‘조양[早移秧]’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논들이 모두 천수답(天水畓)이라 비가 와야 이앙할 수 있었기에 ‘조양’이 드물었다. 6월말에 들어서 이앙하면 ‘마냥[晩移秧]’이라고 하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한편 구월리에서 동남동으로 8㎞ 쯤 떨어진 도창리(현 시흥시 도창동)는 일제시기에 이미 수리조합구역이어서 물걱정을 하지 않았다. 해마다 제 때 모내기를 해서, 구월리와는 근 한 달 차이가 날 때도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가 늦어지면 전자울 사람들은 도창리로 ‘모품’을 팔러갔다. 여남은 명씩 몰려가 도두머리 김동식씨댁 사랑에서 자면서 모를 심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어떤 때는 20일씩 ‘모품’을 팔고 돌아와도 아직 전자울에서는 모내기를 시작도 못했었다. ‘마냥비’도 오지 않으면, 이미 키가 한 자 가량으로 말뚝처럼 자란 모를 뜯어 호미로 논바닥을 파고 꽂아 나가는 ‘말뚝모’를 냈다. ‘말뚝모’로 꽂아도 “아다리가 맞아서” 수일 내로 비가 오면 제대로 자라는데, 그러면 쌀 두 가마를 걷는 논에서 한 가마가 조금 넘는 수확을 올렸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6ㆍ25 나던 해도 가물어서 모를 심지 못하고 있는데 전쟁이 터졌어. 25일 새벽에 북쪽에서 번쩍번쩍 했는데, 옛날 노인네들이 마른번개 치는 건 줄 알고 비가 올 거라고 얘기들을 하셨거든. 그런데 실제로 26일인가 27일인가 비가 오기 시작해서 옛날 노인네들 얘기가 틀린 게 없다고들 하고 그랬다구(윤길용. 남. 1931년생.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lt;br /&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농사는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 상대하는 바인 자연환경의 속성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 파악한 바에 부합하는 농업기술을 고안ㆍ도입하여 구현하며, 그 구현에 의해 검증된 바를 지식으로 축적ㆍ전승하는 일이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농가나 농촌을 찾아 농사에 대해 배우기를 청하고 문답을 이어가노라면, 결국 모든 원리는 해당 농가ㆍ농촌이 자리한 지역이나 특정 논밭의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배우기를 청하는 자의 성향이 문답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규정하는 힘의 위력이 그와 같지 않았다면 문답의 전개를 유도하는 일은 진작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노련한 농사꾼으로부터 농사기술과 자연환경의 관련성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큰 깨달음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감탄을 하거나 저도 몰래 눈물이 맺힐 만큼 기쁨에 젖는 일이 있다. 또 당장은 이해가 덜 되거나 아예 알아들을 수 없었더라도, 문답을 마치고 돌아와 내용을 곱씹고 관련 자료를 찾다보면, 비로소 각 설명들이 제 자리를 찾고 제 짝을 만나 일관된 논리적 형태로 연결이 되기도 한다. 고백하건대, 그 사실을 주위의 누군가에게든 자랑하고 싶은 나머지, 들어줄 이가 없는 줄 알면서도 괴성을 지르거나 일부러 큰 소리로 웃어본 일도 있었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반면 자연환경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고 농사와 농사꾼, 그들의 마을, 지역, 나라가 지나온 궤적을 논하는 일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거개가 논의대상에 대한 파편적일 뿐만 아니라 주(主)와 부(副)를 혼동하는 이해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농사꾼을 시대착오적인 정치인이자 덜 떨어진 경제인으로, 어딘지 엉성한 사회인이면서 조금 모자란 문화인으로 표상하는 입론에 길을 터주게 된다. 상세한 논의는 뒤에서 다시 이를 기회가 있겠지만, 이 점은 농사 혹은 농업을 전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제 학문분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 다소 논의의 범위를 벗어난 진술로까지 나아간다면, 농업을 비효율적인 산업부문으로 낙인찍은 현하의 사회적인 인식 역시, 농사가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을 상대하는 일이라는 점을 재인식함으로써 교정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요는 자연환경을 그저 배경적인 지식으로서 사고(思考) 혹은 기술(記述)의 서두에서 형식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자하는 바의 사회역사적인 쟁점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독립적인 힘으로서, 그 규정력 자체를 &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lt;/SPAN&gt;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련한 농사꾼들의 경험담은, 이미 시대사조의 대세가 된 바, 자연과 사회에 대한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설명력의 모범을, 그리고 자연과 사회가 공생하는 방식에 대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자연환경은 지역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무쌍하며 예측 불가능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때로 뭍과 물의 경계라는 인식을 조롱하듯 엄청난 비를 퍼붓고, 또 때로 세상의 모든 물기를 말려버리려는 듯 끝 모르는 가뭄이 이어진다. 때로 계란만한 우박덩어리가 휩쓸고 지나가며 애써 가꾼 농작물과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을 걸레짝으로 만들고, 또 때로 봄이나 가을 심지어 여름의 서리로 들과 길을 무대로 삼는 생명체들의 숨통을 끊어놓기도 한다. 소위 자연재앙이다. 이 중 어떤 것들은 진정 유례없는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역사상 혹은 전설상의 독창적인 사건이 되지만, 그 역시 두 번째 되풀이될 때부터는 이미 참조의 지점을 갖는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삶의 패턴의 한 부분이 되어, 재앙으로서의 성격을 잃기 시작한다. 찾아오는 빈도가 이보다 잦은 것들은 이미 재앙이 아니다. 어떤 곳은 물이 흔해서 10년에 한 번쯤 마냥, 즉 늦은 모내기를 하지만, 거기서 멀지 않은 어떤 곳은 물이 귀해서 10년에 한 번쯤 조양, 즉 이른 모내기를 한다. 열 번에 아홉 번을 마냥으로 이앙한다면 마냥은 전혀 재앙이 아니다. 열 번에 한 번을 마냥으로 이앙한다면, 마냥은 일정하게 재해로 인정되지만 재앙이나 이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공장생산에서 일정한 불량률이 시스템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에 의해 시스템의 한 부분이 되어있다고 보아야한다. 경기남부의 밭농사에서는 보리나 밀을 베고 콩이나 팥, 조 등을 심는 밭 이모작을 하며, 이를 그루갈이라고 부른다. 보통 그루갈이는 6월 중하순에 보리나 밀을 베고 바로 밭을 갈아 다음 작물을 파종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땅이 축축해야 하기 때문에 땅이 아주 말라 있으면 비를 기다리는 일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끝내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을 때 대개 듣게 되는 대답은, 비가 오지 않아서 콩을 못 심는 일은 없다, 기다리면 조금이라도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이 농사꾼들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능한 자연현상의 오랜 관찰자이고, 누대(累代)의 가학(家學)으로 일가를 이룬 기상통계의 권위자들이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러나 이들의 관찰과 통계가 반드시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천 구월동의 농사꾼들이 관측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쪽 하늘에 번쩍였던 빛은 마른번개가 아니&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라 전화(戰火)였&lt;/SPAN&gt;다. 윤길용씨에게 그것이 마른번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 언제인지 묻지 못했다. 그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6일 혹은 27일 구월동에는 비가 왔고, 구월동의 젊은 농사꾼들은 ‘옛날 노인네들 이야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때는 이미 마른번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른번개였는지 아닌지, 그것을 언제 알았는지가 아니라, 결국 비가 왔다는 점이다. 이 비는 아무리 가물어도 6월 25일경이면 꼭 내리던 것이었으므로(&amp;lt;표 14&amp;gt; 참조), 이 해에도 결국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서 내리치는 마른번개는 가뭄의 징후이지만, 마른번개가 친다는 것은 머금은 습기가 많든 적든 구름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에, 그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비가 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6월 25일의 마른번개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충분히 ‘곧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통계적’으로 옳은 설명이다. 6월 하순의 마른번개와 비의 관계에 대한 ‘옛날 노인네’들의 설명도, 비가 올 거라는 구월동 농사꾼들의 믿음도, 1950년 6월 25일 새벽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농속(農俗)’이 성립한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다시,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사람들과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자. 그 두 집단의 사이에는 삼사년에 한 번쯤 마냥모를 심는 사람들과, 또 삼사년에 한 번쯤은 아예 모내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 또 다른 곳에는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쯤 마냥으로 이앙하는 사람들과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쯤 조양으로 이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자연과 농사에 대해 갖고 있는 기술, 지식, 이념은 전혀 판이한 것일 수 있으며, 이 점이 항시 전제가 되어야 한다. 구월리와 도창리 사람들처럼, 이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교류하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서로의 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게다가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 상의 압도적인 격차가 있다면, 그 기술, 지식, 이념의 간극은 천 길 낭떠러지만큼이나 현격하여 거의 넘어서기 불가능한 것이 된다. 사람이란 대개 타인을 아래로 보는 인식에 의해 자타에 대한 왜곡된 설명을 생산, 재생산하기 마련이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0년에 한 번쯤 마냥모를 내는 사람들로서는, 10년에 한 번 조양모를 내는 사람들이 가뭄에 대한 특별한 대비책도 없이 모내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체념적이고 게으른 행태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일제시기 일본인들이 조선과 조선인을 표상하는 흔한 수사(修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물이 맑고 흔한 곳에서 아무 물이나 마구 퍼마시던 사람도 물이 탁하고 귀한 곳에 가면 물 마실 일을 줄이게 되고, 또 역도 그러하듯이,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에서 20년을 살면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사람들도 폄훼와 조롱을 넘어 뭔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가 지겹다”며 그곳을 떠나 자기의 옛 터전으로 돌아가든지, “여기는 어쩔 수 없다”며 현지의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기술, 지식,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도 어느 정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산업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는 한, 그러는 사이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사람들이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으로 새롭게 이주하는 일도 줄어들게 된다.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방식을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에서 관철시키는 일이 쉽지 않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성공전망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지나친 모험으로 여겨질 것이다.&lt;/SPAN&gt; &lt;br /&gt;&lt;br /&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논문은 이러한 견지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식민통치 35년을 바라보고자 한다.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체제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이 반드시 특정 지리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직접적으로 지배ㆍ통제ㆍ규율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제국주의에 의한 직접적인 식민통치가 비효율적인 착취ㆍ팽창체제인 점, 이 비효율적인 체제들이 역사적으로 붕괴 또는 패퇴하게 되었던 점은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그것이 불가피하고 바람직하며 일종의 성스러운 의무인 것처럼 여겨졌고, 성스러운 의무로 여겼기 때문에 진정 불가피하고 바람직한지에 대해 냉정하게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것이 하도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인 체제이고 그 비효율성을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때우는 것이다 보니, 후세의 사람들 중 일부는 이것이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본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지심으로 충분히 동정이 가지만, 그 인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특정체제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이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체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일제시기 조선에 진출해있던 일본인들 중에는 패전 후 일본에 돌아가서 ‘우리는 열심히 하려고 했다’는 인식을 갖고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조선/한국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우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시스템의 효율성의 부족을 관념적 도덕성으로 &lt;/SPAN&gt;메우던 제국주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본농업이 조선농업에 비해 단위면적당 농업생산량에 있어서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착취적인 체제의 본성은 도덕적 의무감에 바탕을 둔 ‘선의’로 둔갑하기가 쉬웠다. 이 둔갑술의 비밀은 둔갑하는 당사자들이 본성에 대해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둔갑의 결과가 실제라고 믿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제 문제는 문화적인 과정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기술적인 우위에 서있는 자들이 선의로 식민지를 규율했다는 문화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그 선의가 전쟁과 통제체제의 광기로 왜곡ㆍ변질되어 가고,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가 식민지에서 생각한 만큼의 생산력 증대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점을 이 문화적인 믿음과 관련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환경과 기술, 그리고 각종의 이념들을 하나의 세트로 엮는 식민지 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920년대 말 일본인 중에는 조선의 천수답 논농사가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인 ‘오포튜니스트’라고 비난하고 이를 밭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하는 자가 있었다. 이 표현을 쓴 이는 수원고등농림학교의 교수였는데, 아마 모험주의(adventurism)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앞서 구월동의 윤길용씨가 “아다리가 맞아서”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 간에, 이는 조선총독부가 한창 산미증식계획에 열을 올리던 시기의 일이었고, 곧 이어 발생한 세계대공황으로 미가가 폭락하면서 산미증식계획도 중단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천수답을 밭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탄력을 받아 일정하게 정책궤도에 오르기도 하였다. 또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면 논을 밭으로 바꾸는 사업이 도처에서 진행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는 일정하게 탁견으로 보이기도 한다.&amp;nbsp; 단, 그것이 아직도 쌀 수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던 일제시기의 일이라는 점, 그리고 1990년대의 논밭형질변경은 가뭄대비책이 아니라 수입개방대비책이었다는 점을 제외했을 경우의 이야기이다. 그 전 시기에는 천수답을 밭으로 바꾸는 식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앙기(移秧期)의 가뭄은 조선의 논농사에서 이앙법의 보급을 지체시켜온 대표적인 자연환경요인이었고, 이로 인해 이앙법의 도입은 조선정부 차원에서 그 확산을 경계해온 현상이었던 바, ‘오포튜니스트’적인 천수답 논농사는 그러한 환경적 제약과 정책적 금압에도 불구하고 그 이로움으로 인해 지배적인 농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도 조선정부와 유학자들에 의해 그 위험성이 누차 지적되어왔고, 새삼스레 일본인들이 이를 비판하면서 밭으로 바꾸란다고 하여 쉽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비슷한 시기 다른 일본인 농업기사는 가뭄으로 모내기가 지체되던 상태에서 비가 왔는데 농민들이 모내기는 하지 않고 밭농사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을 신기해하며 적은 일이 있다. 이것이 바로 농민들에 의해 ‘삼그루판’이라고 불리는 상황에서의 일로, 논농사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삼그루판’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논농사와 밭농사를 병행하는 농민들이 밭에서 이모작의 앞작물을 수확하고, 곧바로 이어서 뒷작물을 파종하며, 논에서 가뭄으로 인해 늦어진 모내기를 이루는 등 세 그루의 농사가 집중되는 시기를 가리킨다. 조선시기의 농서(農書)들에서는 이를 삼농극망지시(三農劇忙之時), 즉 세 가지의 농사일로 극도로 바쁜 시기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조선농민의 ‘오포튜니스트’적인 농업경영방식의 본성을 잘 드러내준다. 천수답과 수리답이 병존하고, 논농사와 밭농사를 병행하며, 밭에서도 각종 작물을 섞어짓고 이어짓고 사이짓기하는 것은 이 땅에서 누대를 이어온 기본적인 농업경영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오포튜니스트’라는 표현은, 부정확한 표현이었지만 해당 필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종류의 적절성을 지닌 표현이기도 하다. 이 논밭혼합영농의 기본적인 원리는 경작지를 잘게 분할하고 재배작물을 다각화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위기와 기회를 분산시키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가 되면 일본 농학계 내에서 ‘다각형 농업’이니 ‘덴마크식 농업’이니 하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되면서, 조선의 천수답 농법을 쌀만 귀히 여겨 논농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회 전부문의 생산력 및 소비수준이 소위 ‘덴마크식 다각형 농업’에서 중요한 축산ㆍ낙농생산물의 상품화를 담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그러한 비난은 본래 생계전략 자체가 다각형적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논밭혼합영농을 표적으로 삼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lt;br /&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구월동의 윤길용씨도 적절히 지적하고 있었던 바, 이앙기의 가뭄은 이 ‘오포튜니스트’적인 논밭혼합영농이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환경요인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기술적 우위를 조선에서 구현하는 데에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뭄’에 의해 규정되는 삼그루판의 농업은, 제국주의 일본의 ‘선의’와 기술적 우위가, 조선의 농업으로 하여금 그만큼의 생산력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였던 근본요인인 식민지 조선의 농업환경,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온 식민지 조선의 농속들과 만나, 부딪히고 꺾이고 조정되면서 개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식민지 경험이 생산되는 문화접변의 현장이었다. 당시의 농업은 현재 대한민국의 자동차공업이나 반도체공업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산업적 중요성을 갖는 부문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경험의 형성이라는 견지에서도 역시 다른 부문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lt;/SPAN&gt;. 농업에서의 상황을 전제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무언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항상 본말이 착종된 논의로 귀결되고, 삼그루판이 그 농업을 둘러싼 문화적 논의에 중요한 창이 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그 식민지 조선의 삼그루판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한컴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한컴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자연지물</category>
			<category>농업기술</category>
			<category>삼그루판</category>
			<category>식민지경험</category>
			<category>식민지근대화</category>
			<category>일본제국주의</category>
			<category>자연환경</category>
			<category>천수답</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17</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17#entry17comment</comments>
			<pubDate>Mon, 19 Feb 2007 21:45: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19세기 조선의 산림은 왜 그 지경이었을까</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15</link>
			<description>&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asurajang.cafe24.com/attach/13/1232573455.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216&quot; width=&quot;288&quot; /&gt;&lt;/div&gt;&amp;nbsp;&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9세기와 20세기 초에 조선의 산림이, 특히 사람이 사는 마을주변의 산림이 완전히 헐벗어서 &lt;/SPAN&gt;민둥산 상태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부 경제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 진영으로부터 &amp;lt;산림황폐화로 인해 수리시설이 메워져서 옛(18세기까지의) 수리관개몽리구역이 관개불가능의 지경에 빠져들게 되고, 이것이 19세기 위기의 일단이자 또 일 원인이 되었다&amp;gt;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되었지요. 이러한 입론은 일제시기의 식민사관 이데올로기와 상통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현대 학계의 주류적인 패러다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생태사관적인 아이디어의 반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미묘한 쟁점이 됩니다. &#039;산림황폐화에 따른 19세기 농업생산력의 위기&#039;라는 논지에 대해 한편으로 황당해하면서도 막상 논리적으로 어떤 반론이 가능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자료나 여러 가지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론적인 함의라는 문제를 고민할 때, 생태사관과의 관련성 문제도 있어 섣부른 반격이 곤란한, 상당히 고급 수준에 속하는 난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적어도 저 개인적으로는).&lt;br /&gt;&lt;br /&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게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산림의 수분함양과 토사유실저지 기능’이라는 자명한 명제가 저희들에게도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부정되어서도 안 될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민둥산의 합리성’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조선의 농민들은 왜 산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게 없다면 무지막지하게 삼림을 벌목하여 자멸한 민족이라는 논리를 이기기 어렵지요. 이건 경제사 주류진영만 아니라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구요. 우리 역시 쉽게 부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손쉬운 이데올로기적 단정에 또 무력하게 끄떡이고 있거나 얼굴을 붉히고만 있는 것도 연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lt;br /&gt;&lt;br /&gt;우선 지적해둘 것은, 헐벗었던 것은 주거지와 경작지 인근의 산림들이지, 까마득한 원시림이나 관청 혹은 민간에 의해 금산으로 봉해진 산에 대해서는 엄격히 남벌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조선에서 땔감 수요는 컸지만 목재수요-주로 건축자재겠지요-는 크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추후 정식으로 쓸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한편으로는 일제시기에 축조된 저수지들조차 어떤 상황에서 제 구실을 못하고 끝내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이 점은 1925년 조선의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lt;/SPAN&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조선에서는 왕시 도처에 수전관개용의 유지(溜池)가 축조되어 상당히 이용되었다는 사적(史蹟)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일 그 유지가 황폐된 것 많음은 왜인가, 신정(新政) 전의 유지(황폐화―인용자)가 비정(秕政)의 결과임은 어느 누구나 이론(異論)이 없는 바로, 원래 유지였던 토지가 현재는 양전(良田)이 되어 그 소유권은 구(舊) 아무개 군수의 소유로 귀착된 것과 같은 경우는 살아있는 실례이다. 그렇다면 신정 후 수축된 유지가 지금 그 쓰임새를 다하지 못함에 이른 것은 왜인가, 나는 그 원인의 하나는 동기(冬期) 지층의 결빙에 있다고 믿는다. &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제언은 저수지바닥보다 한풍(寒風)에 노출되어 지표가 다섯 치 내지 한 자 심하면 두 자 내지 세 자의 동결을 이룬 결과, 이듬해 물을 가두려고 할 때는 이미 제언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만수시기에 이르면 즉각 파손의 재해를 만나는 것이 아닌가&lt;/SPAN&gt; (인용처 생략). &lt;/SPAN&gt;&lt;/P&gt;&lt;br /&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조선시기의 저수지 황폐화와 일제시기의 저수지 황폐화의 원인을 애써 구별하여 찾으려는 모습에서 일종의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는 이 서술에서, 조선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에 대한 것이든 일제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에 대한 것이든, 그가 찾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한쪽은 타락한 정치의 결과이고 다른 한쪽은 불가피한 자연영력의 결과라는 주장의 이데올로기성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요. 요는 일제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조차, 그것을 축조한 일본인들 스스로 불가사의하게 여길 정도로, 황폐화되어 제 구실을 못하고 심지어 파손의 위기에 처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촉진하는 자연환경요인이 조선농업의 기본조건으로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사실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수리시설의 폐지가 아니라 산림황폐화이니까요.&lt;/SPAN&gt;&lt;br /&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 토쿠사부로(山本德三郞)라는 일본인은, 조선과 같은 기후ㆍ지형특성에서는 산림이 ‘헐벗어’ 있는 것이 천수답 경영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여기에 산림을 만들려면 산밑에서 천수에 의존하는 경작방식으로 농사지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칩니다. 역시 1926년에 쓰인 글인데요. 천수답 영농과 산림황폐화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통찰력이 있는 견해이므로 오늘은 이걸 조금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asurajang.cafe24.com/attach/13/1197335282.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243&quot; width=&quot;327&quot; /&gt;&lt;/div&gt;잠시 ‘천수답’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흔히 논은 관개답과 천수답으로 나눕니다. 관개답은 물을 대는 설비가 갖추어진 논, 천수답은 하늘에서 비가 와야 물을 댈 수 있는 논이지요. 천수답은 봉천답이나 하늘바라기논이라고도 합니다. 관개답은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로부터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는 논과 작은 하천이나 개울 등에 만든 간단한 수리시설을 통해 물을 공급받는 논으로 구분 가능합니다. 전자의 경우 수리안전답, 후자의 경우 천수답과 묶어서 수리불안전답이라고 하게 됩니다. 후자는 가뭄이 들면 수리시설로서 제구실을 할 수 없어서, 천수답과 거의 다를 바가 없게 되기 때문이지요. 조선의 경우 대개 2, 3년에 한 번, 적어도 4, 5년에 한 번은 이런 가뭄을 만나게 됩니다.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조선의 천수답 비율은 70% 안팎이었고 수리안전답은 10%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으므로, 이 땅의 논농사는 상당히 수리가 불안정한 환경에서 영위되어 왔다는 점도 일단 확인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국사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들은 조선에서는 가뭄의 우려가 커서 조선전기에 이앙법 보급이 지체되었다는 설명을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그 상황이고, 이는 일제시기와 현대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lt;br /&gt;&lt;br /&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다시 야마모토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조선 땅에는 발도 들여 본 적이 없는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사람인데, 그의 설명에서 동원되는 조선의 지세와 농업에 대한 지식은 견문으로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대신 아마 오카야마의 지세와 농업에 대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고, 조선에 대해 통찰력이 있는 설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 지식에 기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우선 “조선남부의 기후풍토는 내지(內地)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내지의 어느 지방과 가장 많이 비슷한가 하면, 산양도(山陽道) 남부 특히 오카야마현(岡山縣) 남부지방일 것”이라고 한 후, 오카야마 남부와 조선의 자연지리적 특성의 공통성을 지적합니다(내지라는 게 일본이지요?). 이에 따르면, 우선 “그 가장 혹사(酷似)한 점은 우량이 적고 공기가 건조하며 모암(母巖)은 화강암 석영반암 종류인 점”이며, “하계에는 호우 패연(沛然)히 이르는 일도 있는 것 같지만 일조시가 많고 온도가 높은 점” 또한 닮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산양도와 조선의 자연지리적 특성이 어떻게 비슷한지를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은 탁월한 설명을 이어갑니다.&lt;/SPAN&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9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풍십우(五風十雨)의 상태라면 그 지형여하에도 불구하고 천수(天水)의 부족을 느끼는 일이 적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량(雨量)의 배포가 편벽되고 지형이 협소한 계역(溪域)을 지니고 있다면 누누이 한발에 걸리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남선의 기후풍토가 이상과 같은 상태라면 계역은 황폐하여 벌거벗은 붉은 흙(荒廢禿赭) 상태에 빠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산지에서 사방조림(砂防造林) 기타 방법에 의해 삼림이 성립한다고 하면 그 결과 천수에 매달린 논의 용수나 유지(溜池)의 저수량에 여하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대책을 여하히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미리 음미하여 둘 필요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적은 것과 같은 지형과 기상상태인 곳에 삼림이 생긴다면, 우기에 있어서 출수량(出水量)을 조절하기에 홍수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건조기의 소우기(少雨期)가 되면 임목(林木)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수량(水量)과 지피물(地被物)의 습윤에 필요한 양 등으로 상당히 삼림 내에서 수분을 소비하므로, 건조기에 있어서의 적은 비 정도는 전부 산지의 삼림이 가져가버리고 산기슭ㆍ산아래에는 (물을―인용자) 내주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천수에 매달린 다소의 논을 지탱하고 있던 곳에서도 성림(成林)으로 인해 그 천수의 은혜를 입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삼림의 수원함양(水源涵養)이라고만 훈련된 지식계급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옅은 산을 안고 있는 삼림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대책은 여하히 하면 좋은가. 상당한 대규모의 유지(溜池)를 설치하여 우기에 쓸데없이 방하(放下)되는 수량의 일부를 모아놓고, 건조기에는 천수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 유지의 물로 관개하는 것이 아니라면 논물에 생각지 못한 부족을 초래하는 일이 있다. 삼림은 수원(水源)의 함양능력이 있으니까 무입목시대(無立木時代)의 천수가 점점 더 많아져서 관개 상 편리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크게 잘못 본 것이며, 구릉지에서 수원지구와 이용지구가 가까운 경우 무입목시대의 천수는 성림과 함께 이용수(利用水)로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아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풍십우로 우기가 편벽되지 않은 경우라면 쉽게 이런 일은 실제 문제가 되지 않으며, 또 유원(幽遠)한 계곡을 지닌 산악지대에서 수원지구와 이용지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이쪽저쪽에서 조금씩이나마 모아 와서 한 줄기가 되고 상당한 양이 되어 이용지대 쪽으로 당겨오기 때문에 수원함양의 의미를 지니지만, 남선과 같이 비가 편중되고 수원이 얕은 구릉지에서는 삼림이 성립하면 홍수에 대해서는 유리하더라도 소우기(少雨期)의 관개 상 이전과는 관계를 달리하므로, 소우ㆍ소나기 등 빗물을 상대로 하지 말고 우기에 있는 대량의 물을 상당히 커다란 유지로 모으는 식의 방침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삼림번무로 인하여 수원고갈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인용처 생략).&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러한 설명은 조선의 소위 ‘헐벗은 산’ ‘붉은 산’의 농업생태학적 기능을 지적한 것으로, 이앙법 보급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수답이 대종을 이루었던 조선의 농업환경에서, 경작지 인근의 산이 점차로 헐벗게 되었던 ‘자연사적 과정’의 존재이유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림의 수원 함양이라고만 훈련된 지식계급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이라는 단서는 일제시기는 물론 현대의 농학ㆍ농업사 연구자들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지니고 있고, ‘무입목시대의 천수는 삼림의 성립과 함께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을 갖추었습니다. 한마디로 가뭄과 강수, 삼림과 경작지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지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인 확신을 근본에서 뒤흔드는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lt;br /&gt;&lt;br /&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참, 잠시 오카야마현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설명을 드리면, 오카야마가 그 연안에 위치한 세토내해&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瀨戶內海)&lt;/SPAN&gt;란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의 사이에 놓인 내해입니다. 관동지방에서 주로 남북방향으로 뻗었던 일본열도가 이 일대에 해당하는 관서지방에서는 동서로 놓이고, 열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산맥도 동서로 놓입니다. 산맥의 남쪽-세토내해 연안-은 산요, 그러니까 산양(山陽)이 되고, 북쪽-동해 연안-은 산인, 그러니까 산음(山陰)이 되겠네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해 첨가하자면, 일본 산양도와 조선의 자연지리조건 사이의 공통점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모암이 위나 아래나 같다면 중허리 이하의 산록완사지와, 중허리 이상의 산정(山頂) 부근은 산림 토리(土理)의 상이성이 나타나는 것이 상례인데, 이상과 같은 기후풍토인 경우 그 차이가 특히 심한 것으로 보인다. 산록, 골짜기의 토층의 깊고 오래 쌓여서 양질화(壤質化)한 곳은 소나무 등의 생육이 매우 좋으며, 약간 산허리로 가면서는 표토가 얕아지고 또 기껏 양질화한 것도 경사가 있으므로 빗물과 함께 씻겨서, 후에 남는 것은 모래자갈뿐으로 수목의 생육이 심히 나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산록완사지, 농경지의 토양은 세월의 추이에 따라 양질(壤質)을 띠기도 하고, 또 반영구적으로 점토가 되지 않는 석영과 같은 것이 있으므로 치밀함이 지나칠 정도의 토양이 되지도 않아, 기수(氣水)의 유통이 양호한 절호(絶好)의 사질양토(砂質壤土)를 구성하여 농업작물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산지(山地)가 일단 황폐화한 곳은 그 회복이 용이하지 않으며, 모암으로부터 풍화ㆍ분리된 모래알갱이를 산허리에 머물게 하고 산허리에서 양질화시키는 방법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이상 일조일석에는 황폐를 복구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방공사(砂防工事)의 필요를 느끼고, 사방공사는 토사(土砂)의 유출을 방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그에 수반하여 산허리에 토사를 머물게 하고 수분의 분배를 평등하게 하기 위해 양질화에 의해 산지의 생산력을 조장하고 성림(成林)을 용이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사명인 것, 이상과 같은 기후풍토의 관계는 산양도 남부와 서로 닮아 있다.” &lt;br /&gt;&lt;br /&gt;조금 길었지요? 인용문 출처는 추후 공식적으로 글을 쓸 때(지금 쓰고 있습니다) 밝히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19세기 조선의 산림황폐화와 조선농민의 &#039;무분별한 산림남벌론&#039;에 대해, &#039;산림을 황폐화시켜 스스로 파멸의 길을 재촉했던 무지막지한 19세기 조선의 농민들&#039;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에게, 새로운 이해의 계기가 되셨기를 빕니다.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자연지물</category>
			<category>19세기 위기론</category>
			<category>농업기술</category>
			<category>산림황폐화</category>
			<category>식민지근대화</category>
			<category>자연환경</category>
			<category>천수답</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15</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15#entry15comment</comments>
			<pubDate>Tue, 30 Jan 2007 13:58:59 +0900</pubDate>
		</item>
		<item>
			<title>문진(問診) 그리고 청진(聽診), 촉진(觸診)..―인류학에서 관찰의 지위(3)</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5</link>
			<description>&amp;nbsp;&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병원에 가면 먼저 문진(問診)을 하지요.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 언제부터냐, 자주 있는 일이냐, 어떤 증상이 있느냐 등등. 그리고 청진(聽診)과 촉진(觸診)을 합니다. 한의사 같으면 진맥(診脈)도 하겠지요. 청진기로 심장 뛰는 소리라든가, 숨 쉬는 소리라든가를 듣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속에서 나는 소리도 듣나요? 이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여기 저기 만져보고 눌러보고 합니다. 목구멍 같은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어라고 부르나요? 시진(視診)? 가끔은 환자에게 특정부위를 움직여보라고 하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뼈나 근육, 신경의 상태를 유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승과 교육을 통해 배운 사실, 진료경험으로 깨달은 사실 등에 비추어 환자의 환후(患候)에 대한 판단을 내립니다. 배탈 났네요, 감기입니다, 혹은 꾀병입니다, 그런 식이지요. 상상임신입니다, 같은 충격적인 진단도 있겠고요. &lt;br /&gt;&lt;br /&gt;&lt;/SPAN&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병원과 의사, 간호사에 관한 에로틱한 환상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청진ㆍ촉진ㆍ진맥 등의 행위는, 실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혹은 환자가 자각하지 못한, 아니면 환자가 언어로 잘못 표현한, 환자의 증상을 파악하는 유력한 방법들이지요. X-Ray나 CT, MRI 같이 환자의 몸속을 산 채로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사실 이런 방식이 진료행위의 거의 전부가 아니었나요? 물론 X-Ray 등도 진료의 원리는 사실상 동일합니다만. 그것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의 유형을 계열화한 지식을 바탕으로 병의 징후로부터 바로 진리(의학적 진료행위의 경우 병환의 원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문진의 방법을 통해 환자의 의식 혹은 언어를 매개 혹은 경유하는 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기는 하되, 청진ㆍ촉진ㆍ시진ㆍ진맥 등의 행위는 문진과는 별도의 인식론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편의상 여기에서 ‘지각 가능한 현상’을 추상화한 용어로 ‘형태’를, ‘청진ㆍ촉진ㆍ시진ㆍ진맥 등 형태를 감각하는 행위’를 추상화한 용어로 ‘관찰’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039;형태적 규칙&#039;이란 &#039;형태들에 대한 유형적 파악과 그 축적을 통해 형성된, 형태들의 속성에 대한 계열화된 지식&#039; 정도로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요?&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계열과 맥락을 구별해서 부르는 것은 사실 말장난입니다만, 일단 개념적인 구분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맥락은 하나의 형태의 발생과정 혹은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재현(representation)을, 계열은 하나의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 사이의 상대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구축된 지식이나 재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이라고 쓴 것은 현상과 맥락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호성은 지적인 혼란 혹은 연구자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대개는 현상 자체가 시공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즉 항상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열과 맥락을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만, 이 발생적 맥락에 대한 아카데미의 신화는 상당히 막강하므로, 이 신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바꿔 말하면 이 신화의 신봉자들로부터 쏟아질 탈맥락적인 지식이라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브라가님의 표현을 빌자면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의 황당한 상상―사실상 광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단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 편의적으로 맥락과 계열을 분리하여 개념화하자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그래서 저는 대략 다음과 같은 구분을 이룬 것 같습니다. 연구(혹은 관찰, 아니면 그저 호기심)의 대상인 바 행위자의 의식을 경유하여 그에 의해 언어적으로 구축된 지식의 맥락, 같은 식으로 구축된 지식의 계열, 행위자의 의식을 경유하였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 간에 이를 성립의 본질적인 계기로 삼지 않으면서 비언어적으로 구축된 지식의 맥락, 그리고 같은 식으로 구축된 지식의 계열. &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그리고 한 가지만 단서를 달면, 언어적인 현상에도 형태적인 측면이 있어서 맥락적으로가 아니라 형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죠. 음운론이라든가 음성론이라든가 방언연구라든가, 역사언어학ㆍ비교언어학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언어현상을 형태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번에 썼던 &quot;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과 비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그걸 계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에 대한 지식이 정교화된다면)이 반씩(물론 정확히 &#039;반&#039;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섞여 있다&quot;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단지 오늘의 용어정리를 바탕으로 이를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겠네요. 언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과 형태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 맥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과 계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이 반씩(물론 정확힌 &#039;반&#039;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섞여있겠네요. 그러면 지난 번처럼 &#039;맥락론/형태론&#039;이 아니라, 언어적 지식(의미론)/형태적 지식(형태론), 맥락론/계열론의 대립쌍을 설정해야 되겠군요.&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레비-스트로스보다는 브로델이 맞지 않느냐는 브라가님의 논평을 읽었습니다.&amp;nbsp; 저는 제가 원하는 형태의 구조주의적 방법론, 혹은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실천되어 왔던 제가 원하는 형태의 방법론의 한 이상적인 모습을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발견한 바 있습니다. 브라가님이 브로델을 떠올리시는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지금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공부의 폭이 좁고 또 그 쪽으로 많은 공부를 하게 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조금 뭐 합니다만, 특히 맑시스트적인 구조주의는 조금 안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구조주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이런 형태론적인 관심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브로델은 이를 역사학에 적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제가 소화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브라가님의 논평으로 돌아가면, 제가 브로델에게서 역사방법으로서의 형태론을 찾았고, 그것에 매료되어 형태론에 대한 관심을 키워온 것이기 때문에 브라가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제가 이해한 레비-스트로스와 브로델의 구조주의에 대해서는 또 다음 기회에 적도록 하겠습니다. &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개념/전략</category>
			<category>계열/맥락</category>
			<category>관찰</category>
			<category>구조주의</category>
			<category>언어/형태</category>
			<category>의미론/형태론</category>
			<category>지식</category>
			<category>현지조사(fieldwork)</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5</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5#entry5comment</comments>
			<pubDate>Thu, 11 Jan 2007 19:53:09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인류학에서 관찰의 지위 (2)</title>
			<link>http://asurajang.cafe24.com/lacuna/4</link>
			<description>&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저 일부러 포토샵을 건 듯한 빨간색이 환타라는 점은 놀랍군요. 그리고 환타 중에 저렇게 빨간 색이 나는 맛이 무슨 맛 환타인가 하는 점도 궁금합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책의 탑은 책 빼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올렸더라면 대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저 책의 탑은 그 학생의 특수한 개인기가 아니라 그곳 대학생들이 널리 활용하고 있는 방식인 겁니까?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특수한 현상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039;맥락&#039;이라는 것-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등등 여러 관형어를 붙일 수 있겠지요-이 실은 단속적이라는 점은 동의합니다. 인터뷰에 대해 종속적이지 않은 관찰이라는 방법의 독자적인 인식론적 지위를 이야기할 때 지적하고 싶었던 점이 바로 그것인데요. 그러니까 맥락 외의 형태적 규칙들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관찰에 있다는 점입니다. &lt;br /&gt;&lt;br /&gt;가령 레비스트로스가 역사적 방법과 구조적 방법이 실은 같은 거다라고 계속 말하면서도 구조적 방법이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실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방식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저는 현명한 절충론자 스타일인지라..) 그러니까 구조를 형태로, 역사를 맥락으로 전환하면, 우리의 이야기가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된다는 아이디어라는 거죠(..통하였느냐?) &lt;br /&gt;&lt;br /&gt;그래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구조적 규칙을 열쇠로 동서고금을 넘나들었던 것처럼, 형태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우리가 맥락들을, 역사들을 벗어나(여기에서 맥락이나 역사는 인도네시아와 미국, 혹은 학문분과나 학계의 규칙처럼 각 지식들을 유효한 것으로 만든 기존의 질서들이 조직되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갑이라는 학문을 배울 때 갑학사를 먼저 배우는 것처럼.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물론 저는 기본적으로 &#039;현명한&#039; 스타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반역사적인 방법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은 인식론이겠지요.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쓰고 나서 보니 이게 뭔 말이다냐 싶군요. 그러니까 제 말씀은, 책탑 쌓기든, 환타우유든, 광화문이든, 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과 비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그걸 계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에 대한 지식이 정교화된다면)이 반씩(물론 정확히 &#039;반&#039;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섞여 있다는 거죠. &lt;br /&gt;&lt;br /&gt;후자는 맥락을 벗어나서, 맥락에 구애받지 않고, 가령 전 세계의 미친놈들이 발작을 할 때마다 보이는 열다섯 가지 행동양식이라는 탈맥락적인 지식의 체계가 훨씬 설득력 있게 그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뭐 꼭 &#039;전 세계&#039;일 필요는 당연히 없는 것이겠습니다만). 그때 우리는 인터뷰와 구별되는, 문헌사료분석과 구별되는, 통계분석과 구별되는, &#039;관찰&#039;이라는 학문기법의 독자적인 인식론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039;한컴바탕&#039;;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039;한컴바탕&#039;;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 /&gt;&lt;/SPAN&gt;&lt;/P&gt;</description>
			<category>개념/전략</category>
			<category>계열/맥락</category>
			<category>관찰</category>
			<category>구조주의</category>
			<category>언어/형태</category>
			<category>의미론/형태론</category>
			<category>지식</category>
			<category>현지조사(fieldwork)</category>
			<author> (lacuna)</author>
			<guid>http://asurajang.cafe24.com/lacuna/4</guid>
			<comments>http://asurajang.cafe24.com/lacuna/4#entry4comment</comments>
			<pubDate>Thu, 11 Jan 2007 10:54:37 +0900</pubDate>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