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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삼그루판의 농학과 농속: 환경, 기술, 이념의 역사인류학"은 지금 쓰고 있는 학위논문의 제목(물론 가제지요)입니다. 그 제1장이 서론인데, 서론은 '문제의 제기'라고 이름을 붙인 절로 시작을 합니다. 그 초고를 썼는데, 인용이나 각주가 붙거나 하는 학술적인 형식도 아니고, 내용도 까다로운 성격의 것이 아니라 평이하게 문제의식을 설명하는 것인데다가, 이 블로그에서 다루는 내용들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여 여기에 옮깁니다. 혹시 아수라장 사람들과 방문자들로부터 좋은 코멘트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아 있구요. 본래는 문단들 사이가 그냥 줄바꿈으로 넘어가지만, 인터넷 환경에서는 그게 너무 빡빡하게 보이는 듯 하여, 한 줄씩 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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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제기


구월리(현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전자울 마을의 앞들은 일제시기부터 거의 전부가 논이어서 밭은 산 둘레에 조금 있는 정도였다. 당시 모내기의 적기는 양력 6월 초순으로 보았으며 이를 ‘조양[早移秧]’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논들이 모두 천수답(天水畓)이라 비가 와야 이앙할 수 있었기에 ‘조양’이 드물었다. 6월말에 들어서 이앙하면 ‘마냥[晩移秧]’이라고 하였다.

한편 구월리에서 동남동으로 8㎞ 쯤 떨어진 도창리(현 시흥시 도창동)는 일제시기에 이미 수리조합구역이어서 물걱정을 하지 않았다. 해마다 제 때 모내기를 해서, 구월리와는 근 한 달 차이가 날 때도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가 늦어지면 전자울 사람들은 도창리로 ‘모품’을 팔러갔다. 여남은 명씩 몰려가 도두머리 김동식씨댁 사랑에서 자면서 모를 심었다.

어떤 때는 20일씩 ‘모품’을 팔고 돌아와도 아직 전자울에서는 모내기를 시작도 못했었다. ‘마냥비’도 오지 않으면, 이미 키가 한 자 가량으로 말뚝처럼 자란 모를 뜯어 호미로 논바닥을 파고 꽂아 나가는 ‘말뚝모’를 냈다. ‘말뚝모’로 꽂아도 “아다리가 맞아서” 수일 내로 비가 오면 제대로 자라는데, 그러면 쌀 두 가마를 걷는 논에서 한 가마가 조금 넘는 수확을 올렸다.

“6ㆍ25 나던 해도 가물어서 모를 심지 못하고 있는데 전쟁이 터졌어. 25일 새벽에 북쪽에서 번쩍번쩍 했는데, 옛날 노인네들이 마른번개 치는 건 줄 알고 비가 올 거라고 얘기들을 하셨거든. 그런데 실제로 26일인가 27일인가 비가 오기 시작해서 옛날 노인네들 얘기가 틀린 게 없다고들 하고 그랬다구(윤길용. 남. 1931년생.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농사는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 상대하는 바인 자연환경의 속성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 파악한 바에 부합하는 농업기술을 고안ㆍ도입하여 구현하며, 그 구현에 의해 검증된 바를 지식으로 축적ㆍ전승하는 일이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농가나 농촌을 찾아 농사에 대해 배우기를 청하고 문답을 이어가노라면, 결국 모든 원리는 해당 농가ㆍ농촌이 자리한 지역이나 특정 논밭의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배우기를 청하는 자의 성향이 문답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규정하는 힘의 위력이 그와 같지 않았다면 문답의 전개를 유도하는 일은 진작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노련한 농사꾼으로부터 농사기술과 자연환경의 관련성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큰 깨달음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감탄을 하거나 저도 몰래 눈물이 맺힐 만큼 기쁨에 젖는 일이 있다. 또 당장은 이해가 덜 되거나 아예 알아들을 수 없었더라도, 문답을 마치고 돌아와 내용을 곱씹고 관련 자료를 찾다보면, 비로소 각 설명들이 제 자리를 찾고 제 짝을 만나 일관된 논리적 형태로 연결이 되기도 한다. 고백하건대, 그 사실을 주위의 누군가에게든 자랑하고 싶은 나머지, 들어줄 이가 없는 줄 알면서도 괴성을 지르거나 일부러 큰 소리로 웃어본 일도 있었다.

반면 자연환경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고 농사와 농사꾼, 그들의 마을, 지역, 나라가 지나온 궤적을 논하는 일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거개가 논의대상에 대한 파편적일 뿐만 아니라 주(主)와 부(副)를 혼동하는 이해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농사꾼을 시대착오적인 정치인이자 덜 떨어진 경제인으로, 어딘지 엉성한 사회인이면서 조금 모자란 문화인으로 표상하는 입론에 길을 터주게 된다. 상세한 논의는 뒤에서 다시 이를 기회가 있겠지만, 이 점은 농사 혹은 농업을 전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제 학문분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 다소 논의의 범위를 벗어난 진술로까지 나아간다면, 농업을 비효율적인 산업부문으로 낙인찍은 현하의 사회적인 인식 역시, 농사가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을 상대하는 일이라는 점을 재인식함으로써 교정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요는 자연환경을 그저 배경적인 지식으로서 사고(思考) 혹은 기술(記述)의 서두에서 형식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자하는 바의 사회역사적인 쟁점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독립적인 힘으로서, 그 규정력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련한 농사꾼들의 경험담은, 이미 시대사조의 대세가 된 바, 자연과 사회에 대한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설명력의 모범을, 그리고 자연과 사회가 공생하는 방식에 대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자연환경은 지역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무쌍하며 예측 불가능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때로 뭍과 물의 경계라는 인식을 조롱하듯 엄청난 비를 퍼붓고, 또 때로 세상의 모든 물기를 말려버리려는 듯 끝 모르는 가뭄이 이어진다. 때로 계란만한 우박덩어리가 휩쓸고 지나가며 애써 가꾼 농작물과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을 걸레짝으로 만들고, 또 때로 봄이나 가을 심지어 여름의 서리로 들과 길을 무대로 삼는 생명체들의 숨통을 끊어놓기도 한다. 소위 자연재앙이다. 이 중 어떤 것들은 진정 유례없는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역사상 혹은 전설상의 독창적인 사건이 되지만, 그 역시 두 번째 되풀이될 때부터는 이미 참조의 지점을 갖는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삶의 패턴의 한 부분이 되어, 재앙으로서의 성격을 잃기 시작한다. 찾아오는 빈도가 이보다 잦은 것들은 이미 재앙이 아니다. 어떤 곳은 물이 흔해서 10년에 한 번쯤 마냥, 즉 늦은 모내기를 하지만, 거기서 멀지 않은 어떤 곳은 물이 귀해서 10년에 한 번쯤 조양, 즉 이른 모내기를 한다. 열 번에 아홉 번을 마냥으로 이앙한다면 마냥은 전혀 재앙이 아니다. 열 번에 한 번을 마냥으로 이앙한다면, 마냥은 일정하게 재해로 인정되지만 재앙이나 이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공장생산에서 일정한 불량률이 시스템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에 의해 시스템의 한 부분이 되어있다고 보아야한다. 경기남부의 밭농사에서는 보리나 밀을 베고 콩이나 팥, 조 등을 심는 밭 이모작을 하며, 이를 그루갈이라고 부른다. 보통 그루갈이는 6월 중하순에 보리나 밀을 베고 바로 밭을 갈아 다음 작물을 파종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땅이 축축해야 하기 때문에 땅이 아주 말라 있으면 비를 기다리는 일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끝내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을 때 대개 듣게 되는 대답은, 비가 오지 않아서 콩을 못 심는 일은 없다, 기다리면 조금이라도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이 농사꾼들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능한 자연현상의 오랜 관찰자이고, 누대(累代)의 가학(家學)으로 일가를 이룬 기상통계의 권위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찰과 통계가 반드시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천 구월동의 농사꾼들이 관측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쪽 하늘에 번쩍였던 빛은 마른번개가 아니라 전화(戰火)였다. 윤길용씨에게 그것이 마른번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 언제인지 묻지 못했다. 그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6일 혹은 27일 구월동에는 비가 왔고, 구월동의 젊은 농사꾼들은 ‘옛날 노인네들 이야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때는 이미 마른번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른번개였는지 아닌지, 그것을 언제 알았는지가 아니라, 결국 비가 왔다는 점이다. 이 비는 아무리 가물어도 6월 25일경이면 꼭 내리던 것이었으므로(<표 14> 참조), 이 해에도 결국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서 내리치는 마른번개는 가뭄의 징후이지만, 마른번개가 친다는 것은 머금은 습기가 많든 적든 구름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에, 그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비가 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6월 25일의 마른번개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충분히 ‘곧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통계적’으로 옳은 설명이다. 6월 하순의 마른번개와 비의 관계에 대한 ‘옛날 노인네’들의 설명도, 비가 올 거라는 구월동 농사꾼들의 믿음도, 1950년 6월 25일 새벽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농속(農俗)’이 성립한다.

다시,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사람들과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자. 그 두 집단의 사이에는 삼사년에 한 번쯤 마냥모를 심는 사람들과, 또 삼사년에 한 번쯤은 아예 모내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 또 다른 곳에는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쯤 마냥으로 이앙하는 사람들과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쯤 조양으로 이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자연과 농사에 대해 갖고 있는 기술, 지식, 이념은 전혀 판이한 것일 수 있으며, 이 점이 항시 전제가 되어야 한다. 구월리와 도창리 사람들처럼, 이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교류하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서로의 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게다가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 상의 압도적인 격차가 있다면, 그 기술, 지식, 이념의 간극은 천 길 낭떠러지만큼이나 현격하여 거의 넘어서기 불가능한 것이 된다. 사람이란 대개 타인을 아래로 보는 인식에 의해 자타에 대한 왜곡된 설명을 생산, 재생산하기 마련이다.

10년에 한 번쯤 마냥모를 내는 사람들로서는, 10년에 한 번 조양모를 내는 사람들이 가뭄에 대한 특별한 대비책도 없이 모내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체념적이고 게으른 행태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일제시기 일본인들이 조선과 조선인을 표상하는 흔한 수사(修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물이 맑고 흔한 곳에서 아무 물이나 마구 퍼마시던 사람도 물이 탁하고 귀한 곳에 가면 물 마실 일을 줄이게 되고, 또 역도 그러하듯이,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에서 20년을 살면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사람들도 폄훼와 조롱을 넘어 뭔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가 지겹다”며 그곳을 떠나 자기의 옛 터전으로 돌아가든지, “여기는 어쩔 수 없다”며 현지의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기술, 지식,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도 어느 정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산업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는 한, 그러는 사이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사람들이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으로 새롭게 이주하는 일도 줄어들게 된다.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방식을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에서 관철시키는 일이 쉽지 않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성공전망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지나친 모험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견지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식민통치 35년을 바라보고자 한다.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체제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이 반드시 특정 지리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직접적으로 지배ㆍ통제ㆍ규율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제국주의에 의한 직접적인 식민통치가 비효율적인 착취ㆍ팽창체제인 점, 이 비효율적인 체제들이 역사적으로 붕괴 또는 패퇴하게 되었던 점은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그것이 불가피하고 바람직하며 일종의 성스러운 의무인 것처럼 여겨졌고, 성스러운 의무로 여겼기 때문에 진정 불가피하고 바람직한지에 대해 냉정하게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것이 하도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인 체제이고 그 비효율성을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때우는 것이다 보니, 후세의 사람들 중 일부는 이것이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본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지심으로 충분히 동정이 가지만, 그 인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특정체제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이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체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제시기 조선에 진출해있던 일본인들 중에는 패전 후 일본에 돌아가서 ‘우리는 열심히 하려고 했다’는 인식을 갖고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조선/한국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우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시스템의 효율성의 부족을 관념적 도덕성으로 메우던 제국주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본농업이 조선농업에 비해 단위면적당 농업생산량에 있어서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착취적인 체제의 본성은 도덕적 의무감에 바탕을 둔 ‘선의’로 둔갑하기가 쉬웠다. 이 둔갑술의 비밀은 둔갑하는 당사자들이 본성에 대해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둔갑의 결과가 실제라고 믿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제 문제는 문화적인 과정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기술적인 우위에 서있는 자들이 선의로 식민지를 규율했다는 문화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그 선의가 전쟁과 통제체제의 광기로 왜곡ㆍ변질되어 가고,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가 식민지에서 생각한 만큼의 생산력 증대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점을 이 문화적인 믿음과 관련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환경과 기술, 그리고 각종의 이념들을 하나의 세트로 엮는 식민지 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1920년대 말 일본인 중에는 조선의 천수답 논농사가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인 ‘오포튜니스트’라고 비난하고 이를 밭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하는 자가 있었다. 이 표현을 쓴 이는 수원고등농림학교의 교수였는데, 아마 모험주의(adventurism)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앞서 구월동의 윤길용씨가 “아다리가 맞아서”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 간에, 이는 조선총독부가 한창 산미증식계획에 열을 올리던 시기의 일이었고, 곧 이어 발생한 세계대공황으로 미가가 폭락하면서 산미증식계획도 중단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천수답을 밭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탄력을 받아 일정하게 정책궤도에 오르기도 하였다. 또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면 논을 밭으로 바꾸는 사업이 도처에서 진행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는 일정하게 탁견으로 보이기도 한다.  단, 그것이 아직도 쌀 수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던 일제시기의 일이라는 점, 그리고 1990년대의 논밭형질변경은 가뭄대비책이 아니라 수입개방대비책이었다는 점을 제외했을 경우의 이야기이다. 그 전 시기에는 천수답을 밭으로 바꾸는 식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앙기(移秧期)의 가뭄은 조선의 논농사에서 이앙법의 보급을 지체시켜온 대표적인 자연환경요인이었고, 이로 인해 이앙법의 도입은 조선정부 차원에서 그 확산을 경계해온 현상이었던 바, ‘오포튜니스트’적인 천수답 논농사는 그러한 환경적 제약과 정책적 금압에도 불구하고 그 이로움으로 인해 지배적인 농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도 조선정부와 유학자들에 의해 그 위험성이 누차 지적되어왔고, 새삼스레 일본인들이 이를 비판하면서 밭으로 바꾸란다고 하여 쉽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일본인 농업기사는 가뭄으로 모내기가 지체되던 상태에서 비가 왔는데 농민들이 모내기는 하지 않고 밭농사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을 신기해하며 적은 일이 있다. 이것이 바로 농민들에 의해 ‘삼그루판’이라고 불리는 상황에서의 일로, 논농사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삼그루판’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논농사와 밭농사를 병행하는 농민들이 밭에서 이모작의 앞작물을 수확하고, 곧바로 이어서 뒷작물을 파종하며, 논에서 가뭄으로 인해 늦어진 모내기를 이루는 등 세 그루의 농사가 집중되는 시기를 가리킨다. 조선시기의 농서(農書)들에서는 이를 삼농극망지시(三農劇忙之時), 즉 세 가지의 농사일로 극도로 바쁜 시기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조선농민의 ‘오포튜니스트’적인 농업경영방식의 본성을 잘 드러내준다. 천수답과 수리답이 병존하고, 논농사와 밭농사를 병행하며, 밭에서도 각종 작물을 섞어짓고 이어짓고 사이짓기하는 것은 이 땅에서 누대를 이어온 기본적인 농업경영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오포튜니스트’라는 표현은, 부정확한 표현이었지만 해당 필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종류의 적절성을 지닌 표현이기도 하다. 이 논밭혼합영농의 기본적인 원리는 경작지를 잘게 분할하고 재배작물을 다각화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위기와 기회를 분산시키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가 되면 일본 농학계 내에서 ‘다각형 농업’이니 ‘덴마크식 농업’이니 하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되면서, 조선의 천수답 농법을 쌀만 귀히 여겨 논농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회 전부문의 생산력 및 소비수준이 소위 ‘덴마크식 다각형 농업’에서 중요한 축산ㆍ낙농생산물의 상품화를 담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그러한 비난은 본래 생계전략 자체가 다각형적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논밭혼합영농을 표적으로 삼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구월동의 윤길용씨도 적절히 지적하고 있었던 바, 이앙기의 가뭄은 이 ‘오포튜니스트’적인 논밭혼합영농이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환경요인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기술적 우위를 조선에서 구현하는 데에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뭄’에 의해 규정되는 삼그루판의 농업은, 제국주의 일본의 ‘선의’와 기술적 우위가, 조선의 농업으로 하여금 그만큼의 생산력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였던 근본요인인 식민지 조선의 농업환경,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온 식민지 조선의 농속들과 만나, 부딪히고 꺾이고 조정되면서 개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식민지 경험이 생산되는 문화접변의 현장이었다. 당시의 농업은 현재 대한민국의 자동차공업이나 반도체공업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산업적 중요성을 갖는 부문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경험의 형성이라는 견지에서도 역시 다른 부문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농업에서의 상황을 전제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무언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항상 본말이 착종된 논의로 귀결되고, 삼그루판이 그 농업을 둘러싼 문화적 논의에 중요한 창이 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그 식민지 조선의 삼그루판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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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조선의 산림이, 특히 사람이 사는 마을주변의 산림이 완전히 헐벗어서 민둥산 상태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부 경제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 진영으로부터 <산림황폐화로 인해 수리시설이 메워져서 옛(18세기까지의) 수리관개몽리구역이 관개불가능의 지경에 빠져들게 되고, 이것이 19세기 위기의 일단이자 또 일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되었지요. 이러한 입론은 일제시기의 식민사관 이데올로기와 상통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현대 학계의 주류적인 패러다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생태사관적인 아이디어의 반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미묘한 쟁점이 됩니다. '산림황폐화에 따른 19세기 농업생산력의 위기'라는 논지에 대해 한편으로 황당해하면서도 막상 논리적으로 어떤 반론이 가능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자료나 여러 가지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론적인 함의라는 문제를 고민할 때, 생태사관과의 관련성 문제도 있어 섣부른 반격이 곤란한, 상당히 고급 수준에 속하는 난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적어도 저 개인적으로는).

그게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산림의 수분함양과 토사유실저지 기능’이라는 자명한 명제가 저희들에게도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부정되어서도 안 될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민둥산의 합리성’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조선의 농민들은 왜 산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게 없다면 무지막지하게 삼림을 벌목하여 자멸한 민족이라는 논리를 이기기 어렵지요. 이건 경제사 주류진영만 아니라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구요. 우리 역시 쉽게 부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손쉬운 이데올로기적 단정에 또 무력하게 끄떡이고 있거나 얼굴을 붉히고만 있는 것도 연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선 지적해둘 것은, 헐벗었던 것은 주거지와 경작지 인근의 산림들이지, 까마득한 원시림이나 관청 혹은 민간에 의해 금산으로 봉해진 산에 대해서는 엄격히 남벌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조선에서 땔감 수요는 컸지만 목재수요-주로 건축자재겠지요-는 크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추후 정식으로 쓸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일제시기에 축조된 저수지들조차 어떤 상황에서 제 구실을 못하고 끝내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이 점은 1925년 조선의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왕시 도처에 수전관개용의 유지(溜池)가 축조되어 상당히 이용되었다는 사적(史蹟)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일 그 유지가 황폐된 것 많음은 왜인가, 신정(新政) 전의 유지(황폐화―인용자)가 비정(秕政)의 결과임은 어느 누구나 이론(異論)이 없는 바로, 원래 유지였던 토지가 현재는 양전(良田)이 되어 그 소유권은 구(舊) 아무개 군수의 소유로 귀착된 것과 같은 경우는 살아있는 실례이다. 그렇다면 신정 후 수축된 유지가 지금 그 쓰임새를 다하지 못함에 이른 것은 왜인가, 나는 그 원인의 하나는 동기(冬期) 지층의 결빙에 있다고 믿는다. 제언은 저수지바닥보다 한풍(寒風)에 노출되어 지표가 다섯 치 내지 한 자 심하면 두 자 내지 세 자의 동결을 이룬 결과, 이듬해 물을 가두려고 할 때는 이미 제언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만수시기에 이르면 즉각 파손의 재해를 만나는 것이 아닌가 (인용처 생략).


조선시기의 저수지 황폐화와 일제시기의 저수지 황폐화의 원인을 애써 구별하여 찾으려는 모습에서 일종의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는 이 서술에서, 조선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에 대한 것이든 일제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에 대한 것이든, 그가 찾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한쪽은 타락한 정치의 결과이고 다른 한쪽은 불가피한 자연영력의 결과라는 주장의 이데올로기성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요. 요는 일제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조차, 그것을 축조한 일본인들 스스로 불가사의하게 여길 정도로, 황폐화되어 제 구실을 못하고 심지어 파손의 위기에 처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촉진하는 자연환경요인이 조선농업의 기본조건으로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사실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수리시설의 폐지가 아니라 산림황폐화이니까요.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 토쿠사부로(山本德三郞)라는 일본인은, 조선과 같은 기후ㆍ지형특성에서는 산림이 ‘헐벗어’ 있는 것이 천수답 경영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여기에 산림을 만들려면 산밑에서 천수에 의존하는 경작방식으로 농사지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칩니다. 역시 1926년에 쓰인 글인데요. 천수답 영농과 산림황폐화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통찰력이 있는 견해이므로 오늘은 이걸 조금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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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천수답’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흔히 논은 관개답과 천수답으로 나눕니다. 관개답은 물을 대는 설비가 갖추어진 논, 천수답은 하늘에서 비가 와야 물을 댈 수 있는 논이지요. 천수답은 봉천답이나 하늘바라기논이라고도 합니다. 관개답은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로부터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는 논과 작은 하천이나 개울 등에 만든 간단한 수리시설을 통해 물을 공급받는 논으로 구분 가능합니다. 전자의 경우 수리안전답, 후자의 경우 천수답과 묶어서 수리불안전답이라고 하게 됩니다. 후자는 가뭄이 들면 수리시설로서 제구실을 할 수 없어서, 천수답과 거의 다를 바가 없게 되기 때문이지요. 조선의 경우 대개 2, 3년에 한 번, 적어도 4, 5년에 한 번은 이런 가뭄을 만나게 됩니다.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조선의 천수답 비율은 70% 안팎이었고 수리안전답은 10%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으므로, 이 땅의 논농사는 상당히 수리가 불안정한 환경에서 영위되어 왔다는 점도 일단 확인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국사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들은 조선에서는 가뭄의 우려가 커서 조선전기에 이앙법 보급이 지체되었다는 설명을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그 상황이고, 이는 일제시기와 현대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야마모토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조선 땅에는 발도 들여 본 적이 없는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사람인데, 그의 설명에서 동원되는 조선의 지세와 농업에 대한 지식은 견문으로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대신 아마 오카야마의 지세와 농업에 대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고, 조선에 대해 통찰력이 있는 설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 지식에 기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우선 “조선남부의 기후풍토는 내지(內地)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내지의 어느 지방과 가장 많이 비슷한가 하면, 산양도(山陽道) 남부 특히 오카야마현(岡山縣) 남부지방일 것”이라고 한 후, 오카야마 남부와 조선의 자연지리적 특성의 공통성을 지적합니다(내지라는 게 일본이지요?). 이에 따르면, 우선 “그 가장 혹사(酷似)한 점은 우량이 적고 공기가 건조하며 모암(母巖)은 화강암 석영반암 종류인 점”이며, “하계에는 호우 패연(沛然)히 이르는 일도 있는 것 같지만 일조시가 많고 온도가 높은 점” 또한 닮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산양도와 조선의 자연지리적 특성이 어떻게 비슷한지를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은 탁월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오풍십우(五風十雨)의 상태라면 그 지형여하에도 불구하고 천수(天水)의 부족을 느끼는 일이 적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량(雨量)의 배포가 편벽되고 지형이 협소한 계역(溪域)을 지니고 있다면 누누이 한발에 걸리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남선의 기후풍토가 이상과 같은 상태라면 계역은 황폐하여 벌거벗은 붉은 흙(荒廢禿赭) 상태에 빠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산지에서 사방조림(砂防造林) 기타 방법에 의해 삼림이 성립한다고 하면 그 결과 천수에 매달린 논의 용수나 유지(溜池)의 저수량에 여하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대책을 여하히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미리 음미하여 둘 필요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적은 것과 같은 지형과 기상상태인 곳에 삼림이 생긴다면, 우기에 있어서 출수량(出水量)을 조절하기에 홍수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건조기의 소우기(少雨期)가 되면 임목(林木)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수량(水量)과 지피물(地被物)의 습윤에 필요한 양 등으로 상당히 삼림 내에서 수분을 소비하므로, 건조기에 있어서의 적은 비 정도는 전부 산지의 삼림이 가져가버리고 산기슭ㆍ산아래에는 (물을―인용자) 내주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천수에 매달린 다소의 논을 지탱하고 있던 곳에서도 성림(成林)으로 인해 그 천수의 은혜를 입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삼림의 수원함양(水源涵養)이라고만 훈련된 지식계급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옅은 산을 안고 있는 삼림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대책은 여하히 하면 좋은가. 상당한 대규모의 유지(溜池)를 설치하여 우기에 쓸데없이 방하(放下)되는 수량의 일부를 모아놓고, 건조기에는 천수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 유지의 물로 관개하는 것이 아니라면 논물에 생각지 못한 부족을 초래하는 일이 있다. 삼림은 수원(水源)의 함양능력이 있으니까 무입목시대(無立木時代)의 천수가 점점 더 많아져서 관개 상 편리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크게 잘못 본 것이며, 구릉지에서 수원지구와 이용지구가 가까운 경우 무입목시대의 천수는 성림과 함께 이용수(利用水)로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아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풍십우로 우기가 편벽되지 않은 경우라면 쉽게 이런 일은 실제 문제가 되지 않으며, 또 유원(幽遠)한 계곡을 지닌 산악지대에서 수원지구와 이용지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이쪽저쪽에서 조금씩이나마 모아 와서 한 줄기가 되고 상당한 양이 되어 이용지대 쪽으로 당겨오기 때문에 수원함양의 의미를 지니지만, 남선과 같이 비가 편중되고 수원이 얕은 구릉지에서는 삼림이 성립하면 홍수에 대해서는 유리하더라도 소우기(少雨期)의 관개 상 이전과는 관계를 달리하므로, 소우ㆍ소나기 등 빗물을 상대로 하지 말고 우기에 있는 대량의 물을 상당히 커다란 유지로 모으는 식의 방침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삼림번무로 인하여 수원고갈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인용처 생략).


 

이러한 설명은 조선의 소위 ‘헐벗은 산’ ‘붉은 산’의 농업생태학적 기능을 지적한 것으로, 이앙법 보급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수답이 대종을 이루었던 조선의 농업환경에서, 경작지 인근의 산이 점차로 헐벗게 되었던 ‘자연사적 과정’의 존재이유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림의 수원 함양이라고만 훈련된 지식계급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이라는 단서는 일제시기는 물론 현대의 농학ㆍ농업사 연구자들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지니고 있고, ‘무입목시대의 천수는 삼림의 성립과 함께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을 갖추었습니다. 한마디로 가뭄과 강수, 삼림과 경작지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지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인 확신을 근본에서 뒤흔드는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참, 잠시 오카야마현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설명을 드리면, 오카야마가 그 연안에 위치한 세토내해(瀨戶內海)란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의 사이에 놓인 내해입니다. 관동지방에서 주로 남북방향으로 뻗었던 일본열도가 이 일대에 해당하는 관서지방에서는 동서로 놓이고, 열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산맥도 동서로 놓입니다. 산맥의 남쪽-세토내해 연안-은 산요, 그러니까 산양(山陽)이 되고, 북쪽-동해 연안-은 산인, 그러니까 산음(山陰)이 되겠네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해 첨가하자면, 일본 산양도와 조선의 자연지리조건 사이의 공통점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모암이 위나 아래나 같다면 중허리 이하의 산록완사지와, 중허리 이상의 산정(山頂) 부근은 산림 토리(土理)의 상이성이 나타나는 것이 상례인데, 이상과 같은 기후풍토인 경우 그 차이가 특히 심한 것으로 보인다. 산록, 골짜기의 토층의 깊고 오래 쌓여서 양질화(壤質化)한 곳은 소나무 등의 생육이 매우 좋으며, 약간 산허리로 가면서는 표토가 얕아지고 또 기껏 양질화한 것도 경사가 있으므로 빗물과 함께 씻겨서, 후에 남는 것은 모래자갈뿐으로 수목의 생육이 심히 나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산록완사지, 농경지의 토양은 세월의 추이에 따라 양질(壤質)을 띠기도 하고, 또 반영구적으로 점토가 되지 않는 석영과 같은 것이 있으므로 치밀함이 지나칠 정도의 토양이 되지도 않아, 기수(氣水)의 유통이 양호한 절호(絶好)의 사질양토(砂質壤土)를 구성하여 농업작물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산지(山地)가 일단 황폐화한 곳은 그 회복이 용이하지 않으며, 모암으로부터 풍화ㆍ분리된 모래알갱이를 산허리에 머물게 하고 산허리에서 양질화시키는 방법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이상 일조일석에는 황폐를 복구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방공사(砂防工事)의 필요를 느끼고, 사방공사는 토사(土砂)의 유출을 방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그에 수반하여 산허리에 토사를 머물게 하고 수분의 분배를 평등하게 하기 위해 양질화에 의해 산지의 생산력을 조장하고 성림(成林)을 용이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사명인 것, 이상과 같은 기후풍토의 관계는 산양도 남부와 서로 닮아 있다.”

조금 길었지요? 인용문 출처는 추후 공식적으로 글을 쓸 때(지금 쓰고 있습니다) 밝히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19세기 조선의 산림황폐화와 조선농민의 '무분별한 산림남벌론'에 대해, '산림을 황폐화시켜 스스로 파멸의 길을 재촉했던 무지막지한 19세기 조선의 농민들'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에게, 새로운 이해의 계기가 되셨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