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학위논문을 적고 있다는 점은 앞의 글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1장 '서론'의 3절 '연구의 개요' 중 제1소절이 '연구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2월말에 학과에 절차 상(즉 형식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초고를 적고 있는데요. 그 중 '연구의 방법'이라는 글을 올려 <아수라장>에 드나드시는 여러분의 공람에 붙일까 합니다.

현재 올리는 버전은 절차 상 제출하는 초고를 위한 것이고 3월말에 심사위원에게 돌리게 될 초고에는 이를 개정한 내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지도교수이신 모 선생님이 '연구방법에 대해 조금 세게 쓰는 것이 좋겠다'는 코멘트를 주신(여기에 올릴 글을 읽지 않고 본론만 보신 단계에서) 상태인지라 아마 내용은 훨씬 공을 들인 것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쓰게 될 문제의식은 지금 올리는 내용이 골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에서 공람에 붙이는 것은, 그 문제의식의 논리적인 혹은 전략적인 오류나 한계, 미진한 점이나 강조해야할 점에 대한 코멘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아무도 댓글 안 다셔도 실망하지 않을 터이니, 일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3. 연구의 개요


 1) 연구의 방법


이 연구에서 사용한 농업 관련 인터뷰 자료는 박사과정진입과 함께 1999년 3월 24일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중말(조산동)에서 시작하여 2005년 5월 27일 안성시 도기동 도구머리 마을을 끝으로 일단락을 지은 경기남부에서의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것이다. 논문의 집필은 인터뷰 자료의 분류ㆍ정리를 마친 2005년 10월에 시작하였는데, 2005년 12월초부터 2006년 1월말까지, 그리고 2006년 9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는 문헌자료를 보완하느라 집필이 중단되었다. 본래 문헌작업은 인터뷰를 위한 현지조사를 진행하면서 혹은 논문 집필 중 간간이 진행해 왔었는데, 집필 중 크게 부족함을 느껴 집필을 중단하고 보완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각주: 이 ‘부족함’은 부분적으로 학위논문의 연구계획이 크게 두 차례의 수정을 거친 데에 따른 것이었는데, 수정 이전의 구상이 반영된 인터뷰 및 문헌 자료들은 언젠가 따로 검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현지조사 중의 인터뷰는 농업 분야로 제한되지 않았고, 반농반어촌의 어업이라든가 산촌이나 시가지 주변의 시탄(柴炭) 채취업과 같은 기타 생업, 유통과 장시, 가족과 친족, 사회조직과 신분관계, 의례와 놀이, 인구 및 마을 공간의 구성과 변화 등 촌락의 생활문화 전반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현지조사를 시작하던 당시에는 작업이 외주용역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아 그 용역의 요구를 채우다보니 그리 된 것이었는데, 중간의 어느 시기인가부터는 그럴 의무가 없는 작업인 경우에도 질문을 넓혀서 진행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그리 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불안감의 정체는 첫째로 연구주제의 해명에 당장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도 이 노농(老農)들의 이야기를 연구자는 물론 그 누구도 다시 듣고 기록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점, 둘째로 가령 친족이나 마을조직, 의례나 놀이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농업기술이나 경제관행과 관련된 설명을 찾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는 점, 셋째, 그물을 넓게 펴고 촌락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해두지 않으면, 농업문제와 관련하여 연구자가 찾아낸 설명이 개연성이 있는 것인지 여부를 해당 촌락사회 자체의 맥락에서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익한 불안감은 연구자의 학문성향이 인류학의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의 강한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던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현지조사는 인터뷰 외에 마을ㆍ가정ㆍ개인 단위의 의례와 놀이 등에 대한 참여관찰을 포함하였지만, 이는 해당 작업이 외주용역에 의해 주어지거나 순전히 호기심에서 비롯한 경우에 한정되었으며, 조사 당시에나 집필 과정에서나 그 내용들이 이 연구에 포함시킬 성질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점은 항시 전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조차 실은 말이 ‘참여’관찰이지, 연구자는 대개 사진을 찍고 있거나, 아니면 대개 연구주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묵묵히 술과 고기를 축내고 있기 십상이었다. 연구과정이 이와 같이 ‘참여’적인 성격과 거리가 먼 냉랭한 것이었던 점은, 아마 다루는 시기가 주로 일제시기와 해방직후의 상황이고, 다루는 분야가 생산과 유통이며, 이것이 ‘참여’적으로 해명되기 어렵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옳거나 바람직한 인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연구방식이 현지조사라는 장을 형성하여 만난 연구자와 연구대상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서적인 공감대가 상당히 부족한 채로 끝나버린 것이었고, 인류학의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의 영향 아래에서 훈련을 받은 연구자의 그것으로서는 상당히 미흡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의 과정은 이렇게 한 마을, 혹은 몇 사람과 긴밀한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새로운 마을, 다른 새로운 사람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면서 그의 설명을 듣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농업기술과 경제관행이 어떻게 짜여있는지, 그것이 다른 마을이나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더 이상 설명을 들을 것이 없거나 단시간 내에 듣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같은 마을의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마을의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는 식이었다. 새롭게 마련된 인터뷰의 자리에서도 역시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물론 같은 문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고 설명을 듣는다고 하여, 항상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배움을 청하고 설명을 듣는 과정에서 연구자 자신이 배우는 바가 있고, 배우는 것이 있는 이상 질문의 내용이나 문답의 요령이 점차로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1999년 3월 무렵에 가까운 조사에서 묻고 들은 내용은 2005년 5월 무렵에 가까운 조사에서 묻고 들은 내용과는 전혀 성격이 판이하였다. 그 판이함에 대해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면, 초기의 조사내용은 대개 논문의 집필과정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사초기의 그 수많은 마을 그리고 수많은 노농들과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허비해버린 것에 대해서는 현지조사가 진행될수록, 논문의 초고가 완성되어 갈수록 큰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필요할 경우에는 다시 찾아 인터뷰의 자리를 만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전화로 보완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점은 아마 한국을 조사지로 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같은 분들을 다시 찾기보다는, 앞서 적은 것처럼 새로운 마을, 새로운 사람을 찾아 인터뷰를 이어가는 방향을 택하였다. 같은 사람을 다시 찾아 묻는 시간에 다른 마을 혹은 다른 사람을 새로 찾아 배울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되었고, 실제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것이 옳거나 바람직한 방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마 연구의 목적, 그리고 연구자의 성향과 관련한 문제일 것이다.

연구의 목적과 관련하여서는 앞 두 절을 통해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후자의 문제에 대해 잠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연구자의 성향은, 정서적으로 공감하기보다는 지적으로 소통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정아(2003: 35-36)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연구자의 위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즉 인권단체 간사도 기자도 아닌 ‘학생’이기 때문에 그들은 연구자에게 인권 등의 이야기를 내세우거나 자신의 불행을 과장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덜 가졌고, 좀 더 쉽게 개인사를 이야기하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이런 이야기들(가족, 힘든 이야기, 여자 친구 등), 고향친구들에겐 안 해. 여기서 같이 거류권 싸움하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절대 안하고. 너는 이런 걸 이해해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넌 어쨌든 중국인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니까. 사실 어떨 땐 낯선 사람하고 얘기하는 게 더 편해.…”


그의 인터뷰 상황에 대해서는 연구자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아마 연구자의 그것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가 들으려고 했던 내용도 ‘가족, 힘든 이야기, 여자 친구’ 등 인간사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을 통해 연구주제에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인터뷰가 혹 그런 이야기로 흐르게 되면,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를 원래의 줄거리로 되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느라, 사실 상대의 이야기를 거의 듣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연구자의 현지조사과정을 돌아보고 장정아의 연구내용을 떠올리면, 연구주제와 관련한 내용에서도 실제로 그가 도달한 깊이나 내밀한 부분에는 결코 이를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서 그의 대화상대가 ‘낯선 사람이지만 또 낯선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고, 중국인을 이해하려는 사람이고 그러려면 이 이야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해준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국인’을 ‘농사’ 혹은 ‘농촌’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연구자가 인터뷰 과정에서 상대가 연구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와 관련해서 느꼈던 감각―장정아와 달리 연구자의 경우 이를 직접 확인해주는 이는 없었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물론 장정아의 경우 그 대화상대와 상당히 깊은 정서적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구자의 감각으로는, 이 설명의 전제는 장정아가 해당 주제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와 관련하여 진지하게 더 알고자 하며(즉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확인하기 위해 상대와 대화하려는 것이 아니며), 게다가 그 주제와 관련하여 아주 민감한 부분을 정교하게 건드리는 질문을 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이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은 극단적으로 나누자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물어보지 않은 점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설명을 하려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낯설다’든가 ‘친하다’는 것은 거의 부차적인 문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자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는 상대와는 일찌감치 인터뷰를 종료하고 다른 곳 혹은 다른 이를 찾아 떠났으며, 후자에 해당하는 상대에게는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꼬치꼬치 캐묻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한국의 농촌에는 이 후자의 종류의 인간형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며, 게다가 모든 농촌마을에 적어도 한둘씩은 이런 인간형에 해당하는 노농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농사와 생활의 달인이며, 탐구하는 자세로 경험을 축적하고 각종 정보를 흡수함으로써, 깊은 통찰력으로 사회와 역사를 보는 혜안을 갖춘 자들이다. 그리고 연구자가 연구대상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의 양과 깊이, 배우겠다는 진지한 자세, 적절한 단어와 표현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질문, 이런 것들의 구비 여부가, 일정하게 정서적 친밀감의 부재를 메워주면서, 이 노농들과 정서적인 공감대는 약하지만 지적인 쾌감은 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을 제어하는 가장 중요한 키[舵]는, 상대가 그저 ‘시골노인’이 아니라 나라의 바탕인 ‘조선노농’이라는 점, 그들에게 농사와 농촌, 농업,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배우기 위해 왔지만 결코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고 더불어 대화하고 논하겠다는 인식을 틀어쥐는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루는 시기가 주로 일제시기이고 부분적으로 18ㆍ19세기와 해방직후시기의 몇 가지 문제를 거론하므로,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 외에, 해당시기와 지역의 문헌에 대한 조사와 반영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다루는 시기와 지역을 불문하고, 역사인류학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학, 그리고 모든 인문사회과학적 연구에 불가결한 과정이므로, 이 자체가 어떤 특별한 방법론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즉 구성된 텍스트를 사용하여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특정 사회역사적 현상에 대해 분석한다는 의미에서 이 글은 어떠한 특수한 방법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단지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회역사적 현상의 분석에 사용한다는 것은, 이 ‘텍스트의 구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네 가지 정도 짚어둘 지점을 형성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인터뷰 자료를 특정 사회역사적 현상, 특히 과거의 어떤 시점 혹은 기간에 일어난 일의 분석에 사용하는 일은, 역사인류학자에게 여타의 인문사회과학자, 특히 문헌사학자에게 잘 허여되지 않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한다. 즉 역사인류학자는 무엇보다도 인터뷰 대상자와 함께 자신이 사료로 사용할 텍스트를 스스로 구성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는 역사인류학자를 포함하여 인류학자에게는 낯설지 않은 일이지만, 역사학자에게는 상당히 낯선(혹은 낯설었던) 종류의 일이다. 이 점, 역사인류학자는 인류학자로서 인류학자에게 허용되고 훈련되어왔던 규칙들에 의거하여 사료 텍스트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학자, 특히 문헌사학자와 구별되어 역사인류학자에게 부여된 특수한 지위와 역할, 방법은 여기까지가 아닌가 한다. 그 후의 작업은, 역사학자이든 인류학자이든, 과거의 사회역사적 현상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이론적 혹은 기술적(技術的)인 면에서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종류의 원리나 규칙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연구자는 전제하였다. 일단 구성된 사료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 기원이 구술(口述)이든 기술(記述)이든 동일한 원리와 규칙에 의해서 취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둘째, 그러한 취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약간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의 사회역사적 현상에 대한 지시의 능력, 특히 그 신뢰성이나 대표성과 관련하여, 구술 텍스트와 문서 텍스트 사이에는 여전히 불평등한 위계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위계관계는 구술 텍스트를 사료로 정당히 다루어야 한다고 보는 연구자의 의식 내에서도 조사와 집필 과정 내내 강력히 작용하고 있었다. 이 불평등성을 교정하는 방식, 교정되어야 할 정도, 교정의 방향은 각 연구자마다의 성향과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에 따라 제각각일 수 있다. 연구자가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농민의 기억과 구술을 ‘시골노인’의 그것이 아니라 ‘조선노농’의 그것으로 이해하고자했던 것처럼, 문서 텍스트에 담긴 사실과 내러티브를 ‘서울촌놈’ 내지 ‘일본촌놈’―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혹 민족적 편견의 결과로 여길까 우려하여 사족을 달면, 굳이 ‘일본’을 언급하는 것은 주로 다루는 시기가 일제시기이고 조선의 일본인 텍스트 작성자들은 ‘서울촌놈’이 아니기 때문이다―의 그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이 점 ‘서울촌놈’과 ‘일본촌놈’으로 이루어진 조선총독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구자의 의식 속에도 존재하는 불평등한 위계관계가 어느 정도 교정되어 양자의 위상이 그래도 비슷한 수준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고, 구술 텍스트이든 문서 텍스트이든 같은 방식으로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가능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교정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

셋째, 흔히 있는 오해 중 하나는 구술 텍스트가 문서 텍스트에 비해 개인이라는 경험의 한계에 의해 왜곡이나 편견으로 오염되었을 위험이 크지만 또 개인의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생생한 현장의 경험과 느낌―즉 사회역사적 현상의 극히 주관적인 측면―을 전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문서 텍스트는 보다 전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하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부분적으로 타당하지만 부분적으로 그릇된 것이어서, 전적으로 그러하다고 간주한다면 이는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다. 역사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문서 텍스트가 오히려 주관적인 편견과 왜곡 그리고 당대 현장의 상황과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구술 텍스트가 그러한 느낌이 배제된 채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경우를 도처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점은 이하 본문에서 연구자가 사용한 텍스트들, 그리고 그 텍스트들을 다루는 연구자의 방식을 통해 충분히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기에,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언급을 생략하기로 한다.

넷째, 이 점과 관련하여, 연구자의 경우, 객관적 성격의 구술 텍스트가 필요하고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성격이 강한 텍스트를 구성해내고자 할 때, 위력을 발휘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점을 첨언해두고자 한다. 즉 삶의 물질적인 형태들, 혹은 비담론적인 실천이나 관행 등에 관한 박물학적인 정보를 노농들로부터 확인하고 그 연원에 대한 토론을 벌임으로써 의외의 수확을 올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한 삶의 물질적인 형태들로는 가령 기후나 토양에 관한 정보, 마을 내 논밭의 구성비나 공간형태, 두둑이나 고랑의 작성법과 규격, 농기구 등 각종 생활도구의 재질이나 만듦새, 농사작업의 선후관계라든가 기후조건ㆍ다른 농사작업ㆍ다른 생활사적 사건들과의 관련성, 마을의 인구나 성씨집단 혹은 작업집단의 규모, 그리고 이것들과 그 밖의 여러 가지를 가리키는 민속용어들과, 그에 대한 설명에 사용되는 표현이나 내러티브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분포도 등이 있을 수 있으며, 당연히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문서 텍스트들이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로 인터뷰를 이끌어가며, 인터뷰를 통해 구성 가능한 사료 텍스트의 새로운 영역, 그리고 인류학에서 ‘관찰’이라는 방법이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개척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식민지 조선 삼그루판의 농학과 농속: 환경, 기술, 이념의 역사인류학"은 지금 쓰고 있는 학위논문의 제목(물론 가제지요)입니다. 그 제1장이 서론인데, 서론은 '문제의 제기'라고 이름을 붙인 절로 시작을 합니다. 그 초고를 썼는데, 인용이나 각주가 붙거나 하는 학술적인 형식도 아니고, 내용도 까다로운 성격의 것이 아니라 평이하게 문제의식을 설명하는 것인데다가, 이 블로그에서 다루는 내용들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여 여기에 옮깁니다. 혹시 아수라장 사람들과 방문자들로부터 좋은 코멘트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아 있구요. 본래는 문단들 사이가 그냥 줄바꿈으로 넘어가지만, 인터넷 환경에서는 그게 너무 빡빡하게 보이는 듯 하여, 한 줄씩 띄웠습니다.


*****************

  

1. 문제의 제기


구월리(현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전자울 마을의 앞들은 일제시기부터 거의 전부가 논이어서 밭은 산 둘레에 조금 있는 정도였다. 당시 모내기의 적기는 양력 6월 초순으로 보았으며 이를 ‘조양[早移秧]’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논들이 모두 천수답(天水畓)이라 비가 와야 이앙할 수 있었기에 ‘조양’이 드물었다. 6월말에 들어서 이앙하면 ‘마냥[晩移秧]’이라고 하였다.

한편 구월리에서 동남동으로 8㎞ 쯤 떨어진 도창리(현 시흥시 도창동)는 일제시기에 이미 수리조합구역이어서 물걱정을 하지 않았다. 해마다 제 때 모내기를 해서, 구월리와는 근 한 달 차이가 날 때도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가 늦어지면 전자울 사람들은 도창리로 ‘모품’을 팔러갔다. 여남은 명씩 몰려가 도두머리 김동식씨댁 사랑에서 자면서 모를 심었다.

어떤 때는 20일씩 ‘모품’을 팔고 돌아와도 아직 전자울에서는 모내기를 시작도 못했었다. ‘마냥비’도 오지 않으면, 이미 키가 한 자 가량으로 말뚝처럼 자란 모를 뜯어 호미로 논바닥을 파고 꽂아 나가는 ‘말뚝모’를 냈다. ‘말뚝모’로 꽂아도 “아다리가 맞아서” 수일 내로 비가 오면 제대로 자라는데, 그러면 쌀 두 가마를 걷는 논에서 한 가마가 조금 넘는 수확을 올렸다.

“6ㆍ25 나던 해도 가물어서 모를 심지 못하고 있는데 전쟁이 터졌어. 25일 새벽에 북쪽에서 번쩍번쩍 했는데, 옛날 노인네들이 마른번개 치는 건 줄 알고 비가 올 거라고 얘기들을 하셨거든. 그런데 실제로 26일인가 27일인가 비가 오기 시작해서 옛날 노인네들 얘기가 틀린 게 없다고들 하고 그랬다구(윤길용. 남. 1931년생.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농사는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 상대하는 바인 자연환경의 속성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 파악한 바에 부합하는 농업기술을 고안ㆍ도입하여 구현하며, 그 구현에 의해 검증된 바를 지식으로 축적ㆍ전승하는 일이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농가나 농촌을 찾아 농사에 대해 배우기를 청하고 문답을 이어가노라면, 결국 모든 원리는 해당 농가ㆍ농촌이 자리한 지역이나 특정 논밭의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배우기를 청하는 자의 성향이 문답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규정하는 힘의 위력이 그와 같지 않았다면 문답의 전개를 유도하는 일은 진작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노련한 농사꾼으로부터 농사기술과 자연환경의 관련성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큰 깨달음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감탄을 하거나 저도 몰래 눈물이 맺힐 만큼 기쁨에 젖는 일이 있다. 또 당장은 이해가 덜 되거나 아예 알아들을 수 없었더라도, 문답을 마치고 돌아와 내용을 곱씹고 관련 자료를 찾다보면, 비로소 각 설명들이 제 자리를 찾고 제 짝을 만나 일관된 논리적 형태로 연결이 되기도 한다. 고백하건대, 그 사실을 주위의 누군가에게든 자랑하고 싶은 나머지, 들어줄 이가 없는 줄 알면서도 괴성을 지르거나 일부러 큰 소리로 웃어본 일도 있었다.

반면 자연환경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고 농사와 농사꾼, 그들의 마을, 지역, 나라가 지나온 궤적을 논하는 일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거개가 논의대상에 대한 파편적일 뿐만 아니라 주(主)와 부(副)를 혼동하는 이해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농사꾼을 시대착오적인 정치인이자 덜 떨어진 경제인으로, 어딘지 엉성한 사회인이면서 조금 모자란 문화인으로 표상하는 입론에 길을 터주게 된다. 상세한 논의는 뒤에서 다시 이를 기회가 있겠지만, 이 점은 농사 혹은 농업을 전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제 학문분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 다소 논의의 범위를 벗어난 진술로까지 나아간다면, 농업을 비효율적인 산업부문으로 낙인찍은 현하의 사회적인 인식 역시, 농사가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을 상대하는 일이라는 점을 재인식함으로써 교정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요는 자연환경을 그저 배경적인 지식으로서 사고(思考) 혹은 기술(記述)의 서두에서 형식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자하는 바의 사회역사적인 쟁점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독립적인 힘으로서, 그 규정력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련한 농사꾼들의 경험담은, 이미 시대사조의 대세가 된 바, 자연과 사회에 대한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설명력의 모범을, 그리고 자연과 사회가 공생하는 방식에 대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자연환경은 지역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무쌍하며 예측 불가능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때로 뭍과 물의 경계라는 인식을 조롱하듯 엄청난 비를 퍼붓고, 또 때로 세상의 모든 물기를 말려버리려는 듯 끝 모르는 가뭄이 이어진다. 때로 계란만한 우박덩어리가 휩쓸고 지나가며 애써 가꾼 농작물과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을 걸레짝으로 만들고, 또 때로 봄이나 가을 심지어 여름의 서리로 들과 길을 무대로 삼는 생명체들의 숨통을 끊어놓기도 한다. 소위 자연재앙이다. 이 중 어떤 것들은 진정 유례없는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역사상 혹은 전설상의 독창적인 사건이 되지만, 그 역시 두 번째 되풀이될 때부터는 이미 참조의 지점을 갖는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삶의 패턴의 한 부분이 되어, 재앙으로서의 성격을 잃기 시작한다. 찾아오는 빈도가 이보다 잦은 것들은 이미 재앙이 아니다. 어떤 곳은 물이 흔해서 10년에 한 번쯤 마냥, 즉 늦은 모내기를 하지만, 거기서 멀지 않은 어떤 곳은 물이 귀해서 10년에 한 번쯤 조양, 즉 이른 모내기를 한다. 열 번에 아홉 번을 마냥으로 이앙한다면 마냥은 전혀 재앙이 아니다. 열 번에 한 번을 마냥으로 이앙한다면, 마냥은 일정하게 재해로 인정되지만 재앙이나 이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공장생산에서 일정한 불량률이 시스템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에 의해 시스템의 한 부분이 되어있다고 보아야한다. 경기남부의 밭농사에서는 보리나 밀을 베고 콩이나 팥, 조 등을 심는 밭 이모작을 하며, 이를 그루갈이라고 부른다. 보통 그루갈이는 6월 중하순에 보리나 밀을 베고 바로 밭을 갈아 다음 작물을 파종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땅이 축축해야 하기 때문에 땅이 아주 말라 있으면 비를 기다리는 일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끝내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을 때 대개 듣게 되는 대답은, 비가 오지 않아서 콩을 못 심는 일은 없다, 기다리면 조금이라도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이 농사꾼들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능한 자연현상의 오랜 관찰자이고, 누대(累代)의 가학(家學)으로 일가를 이룬 기상통계의 권위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찰과 통계가 반드시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천 구월동의 농사꾼들이 관측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쪽 하늘에 번쩍였던 빛은 마른번개가 아니라 전화(戰火)였다. 윤길용씨에게 그것이 마른번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 언제인지 묻지 못했다. 그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6일 혹은 27일 구월동에는 비가 왔고, 구월동의 젊은 농사꾼들은 ‘옛날 노인네들 이야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때는 이미 마른번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른번개였는지 아닌지, 그것을 언제 알았는지가 아니라, 결국 비가 왔다는 점이다. 이 비는 아무리 가물어도 6월 25일경이면 꼭 내리던 것이었으므로(<표 14> 참조), 이 해에도 결국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서 내리치는 마른번개는 가뭄의 징후이지만, 마른번개가 친다는 것은 머금은 습기가 많든 적든 구름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에, 그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비가 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6월 25일의 마른번개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충분히 ‘곧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통계적’으로 옳은 설명이다. 6월 하순의 마른번개와 비의 관계에 대한 ‘옛날 노인네’들의 설명도, 비가 올 거라는 구월동 농사꾼들의 믿음도, 1950년 6월 25일 새벽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농속(農俗)’이 성립한다.

다시,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사람들과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자. 그 두 집단의 사이에는 삼사년에 한 번쯤 마냥모를 심는 사람들과, 또 삼사년에 한 번쯤은 아예 모내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 또 다른 곳에는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쯤 마냥으로 이앙하는 사람들과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쯤 조양으로 이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자연과 농사에 대해 갖고 있는 기술, 지식, 이념은 전혀 판이한 것일 수 있으며, 이 점이 항시 전제가 되어야 한다. 구월리와 도창리 사람들처럼, 이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교류하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서로의 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게다가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 상의 압도적인 격차가 있다면, 그 기술, 지식, 이념의 간극은 천 길 낭떠러지만큼이나 현격하여 거의 넘어서기 불가능한 것이 된다. 사람이란 대개 타인을 아래로 보는 인식에 의해 자타에 대한 왜곡된 설명을 생산, 재생산하기 마련이다.

10년에 한 번쯤 마냥모를 내는 사람들로서는, 10년에 한 번 조양모를 내는 사람들이 가뭄에 대한 특별한 대비책도 없이 모내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체념적이고 게으른 행태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일제시기 일본인들이 조선과 조선인을 표상하는 흔한 수사(修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물이 맑고 흔한 곳에서 아무 물이나 마구 퍼마시던 사람도 물이 탁하고 귀한 곳에 가면 물 마실 일을 줄이게 되고, 또 역도 그러하듯이,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에서 20년을 살면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사람들도 폄훼와 조롱을 넘어 뭔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가 지겹다”며 그곳을 떠나 자기의 옛 터전으로 돌아가든지, “여기는 어쩔 수 없다”며 현지의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기술, 지식,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도 어느 정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산업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는 한, 그러는 사이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사람들이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으로 새롭게 이주하는 일도 줄어들게 된다.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방식을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에서 관철시키는 일이 쉽지 않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성공전망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지나친 모험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견지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식민통치 35년을 바라보고자 한다.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체제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이 반드시 특정 지리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직접적으로 지배ㆍ통제ㆍ규율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제국주의에 의한 직접적인 식민통치가 비효율적인 착취ㆍ팽창체제인 점, 이 비효율적인 체제들이 역사적으로 붕괴 또는 패퇴하게 되었던 점은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그것이 불가피하고 바람직하며 일종의 성스러운 의무인 것처럼 여겨졌고, 성스러운 의무로 여겼기 때문에 진정 불가피하고 바람직한지에 대해 냉정하게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것이 하도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인 체제이고 그 비효율성을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때우는 것이다 보니, 후세의 사람들 중 일부는 이것이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본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지심으로 충분히 동정이 가지만, 그 인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특정체제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이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체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제시기 조선에 진출해있던 일본인들 중에는 패전 후 일본에 돌아가서 ‘우리는 열심히 하려고 했다’는 인식을 갖고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조선/한국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우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시스템의 효율성의 부족을 관념적 도덕성으로 메우던 제국주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본농업이 조선농업에 비해 단위면적당 농업생산량에 있어서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착취적인 체제의 본성은 도덕적 의무감에 바탕을 둔 ‘선의’로 둔갑하기가 쉬웠다. 이 둔갑술의 비밀은 둔갑하는 당사자들이 본성에 대해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둔갑의 결과가 실제라고 믿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제 문제는 문화적인 과정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기술적인 우위에 서있는 자들이 선의로 식민지를 규율했다는 문화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그 선의가 전쟁과 통제체제의 광기로 왜곡ㆍ변질되어 가고,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가 식민지에서 생각한 만큼의 생산력 증대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점을 이 문화적인 믿음과 관련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환경과 기술, 그리고 각종의 이념들을 하나의 세트로 엮는 식민지 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1920년대 말 일본인 중에는 조선의 천수답 논농사가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인 ‘오포튜니스트’라고 비난하고 이를 밭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하는 자가 있었다. 이 표현을 쓴 이는 수원고등농림학교의 교수였는데, 아마 모험주의(adventurism)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앞서 구월동의 윤길용씨가 “아다리가 맞아서”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 간에, 이는 조선총독부가 한창 산미증식계획에 열을 올리던 시기의 일이었고, 곧 이어 발생한 세계대공황으로 미가가 폭락하면서 산미증식계획도 중단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천수답을 밭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탄력을 받아 일정하게 정책궤도에 오르기도 하였다. 또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면 논을 밭으로 바꾸는 사업이 도처에서 진행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는 일정하게 탁견으로 보이기도 한다.  단, 그것이 아직도 쌀 수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던 일제시기의 일이라는 점, 그리고 1990년대의 논밭형질변경은 가뭄대비책이 아니라 수입개방대비책이었다는 점을 제외했을 경우의 이야기이다. 그 전 시기에는 천수답을 밭으로 바꾸는 식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앙기(移秧期)의 가뭄은 조선의 논농사에서 이앙법의 보급을 지체시켜온 대표적인 자연환경요인이었고, 이로 인해 이앙법의 도입은 조선정부 차원에서 그 확산을 경계해온 현상이었던 바, ‘오포튜니스트’적인 천수답 논농사는 그러한 환경적 제약과 정책적 금압에도 불구하고 그 이로움으로 인해 지배적인 농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도 조선정부와 유학자들에 의해 그 위험성이 누차 지적되어왔고, 새삼스레 일본인들이 이를 비판하면서 밭으로 바꾸란다고 하여 쉽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일본인 농업기사는 가뭄으로 모내기가 지체되던 상태에서 비가 왔는데 농민들이 모내기는 하지 않고 밭농사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을 신기해하며 적은 일이 있다. 이것이 바로 농민들에 의해 ‘삼그루판’이라고 불리는 상황에서의 일로, 논농사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삼그루판’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논농사와 밭농사를 병행하는 농민들이 밭에서 이모작의 앞작물을 수확하고, 곧바로 이어서 뒷작물을 파종하며, 논에서 가뭄으로 인해 늦어진 모내기를 이루는 등 세 그루의 농사가 집중되는 시기를 가리킨다. 조선시기의 농서(農書)들에서는 이를 삼농극망지시(三農劇忙之時), 즉 세 가지의 농사일로 극도로 바쁜 시기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조선농민의 ‘오포튜니스트’적인 농업경영방식의 본성을 잘 드러내준다. 천수답과 수리답이 병존하고, 논농사와 밭농사를 병행하며, 밭에서도 각종 작물을 섞어짓고 이어짓고 사이짓기하는 것은 이 땅에서 누대를 이어온 기본적인 농업경영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오포튜니스트’라는 표현은, 부정확한 표현이었지만 해당 필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종류의 적절성을 지닌 표현이기도 하다. 이 논밭혼합영농의 기본적인 원리는 경작지를 잘게 분할하고 재배작물을 다각화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위기와 기회를 분산시키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가 되면 일본 농학계 내에서 ‘다각형 농업’이니 ‘덴마크식 농업’이니 하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되면서, 조선의 천수답 농법을 쌀만 귀히 여겨 논농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회 전부문의 생산력 및 소비수준이 소위 ‘덴마크식 다각형 농업’에서 중요한 축산ㆍ낙농생산물의 상품화를 담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그러한 비난은 본래 생계전략 자체가 다각형적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논밭혼합영농을 표적으로 삼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구월동의 윤길용씨도 적절히 지적하고 있었던 바, 이앙기의 가뭄은 이 ‘오포튜니스트’적인 논밭혼합영농이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환경요인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기술적 우위를 조선에서 구현하는 데에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뭄’에 의해 규정되는 삼그루판의 농업은, 제국주의 일본의 ‘선의’와 기술적 우위가, 조선의 농업으로 하여금 그만큼의 생산력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였던 근본요인인 식민지 조선의 농업환경,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온 식민지 조선의 농속들과 만나, 부딪히고 꺾이고 조정되면서 개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식민지 경험이 생산되는 문화접변의 현장이었다. 당시의 농업은 현재 대한민국의 자동차공업이나 반도체공업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산업적 중요성을 갖는 부문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경험의 형성이라는 견지에서도 역시 다른 부문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농업에서의 상황을 전제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무언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항상 본말이 착종된 논의로 귀결되고, 삼그루판이 그 농업을 둘러싼 문화적 논의에 중요한 창이 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그 식민지 조선의 삼그루판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