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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조선의 산림이, 특히 사람이 사는 마을주변의 산림이 완전히 헐벗어서 민둥산 상태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부 경제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 진영으로부터 <산림황폐화로 인해 수리시설이 메워져서 옛(18세기까지의) 수리관개몽리구역이 관개불가능의 지경에 빠져들게 되고, 이것이 19세기 위기의 일단이자 또 일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되었지요. 이러한 입론은 일제시기의 식민사관 이데올로기와 상통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현대 학계의 주류적인 패러다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생태사관적인 아이디어의 반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미묘한 쟁점이 됩니다. '산림황폐화에 따른 19세기 농업생산력의 위기'라는 논지에 대해 한편으로 황당해하면서도 막상 논리적으로 어떤 반론이 가능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자료나 여러 가지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론적인 함의라는 문제를 고민할 때, 생태사관과의 관련성 문제도 있어 섣부른 반격이 곤란한, 상당히 고급 수준에 속하는 난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적어도 저 개인적으로는).

그게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산림의 수분함양과 토사유실저지 기능’이라는 자명한 명제가 저희들에게도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부정되어서도 안 될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민둥산의 합리성’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조선의 농민들은 왜 산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게 없다면 무지막지하게 삼림을 벌목하여 자멸한 민족이라는 논리를 이기기 어렵지요. 이건 경제사 주류진영만 아니라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구요. 우리 역시 쉽게 부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손쉬운 이데올로기적 단정에 또 무력하게 끄떡이고 있거나 얼굴을 붉히고만 있는 것도 연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선 지적해둘 것은, 헐벗었던 것은 주거지와 경작지 인근의 산림들이지, 까마득한 원시림이나 관청 혹은 민간에 의해 금산으로 봉해진 산에 대해서는 엄격히 남벌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조선에서 땔감 수요는 컸지만 목재수요-주로 건축자재겠지요-는 크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추후 정식으로 쓸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일제시기에 축조된 저수지들조차 어떤 상황에서 제 구실을 못하고 끝내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이 점은 1925년 조선의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왕시 도처에 수전관개용의 유지(溜池)가 축조되어 상당히 이용되었다는 사적(史蹟)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일 그 유지가 황폐된 것 많음은 왜인가, 신정(新政) 전의 유지(황폐화―인용자)가 비정(秕政)의 결과임은 어느 누구나 이론(異論)이 없는 바로, 원래 유지였던 토지가 현재는 양전(良田)이 되어 그 소유권은 구(舊) 아무개 군수의 소유로 귀착된 것과 같은 경우는 살아있는 실례이다. 그렇다면 신정 후 수축된 유지가 지금 그 쓰임새를 다하지 못함에 이른 것은 왜인가, 나는 그 원인의 하나는 동기(冬期) 지층의 결빙에 있다고 믿는다. 제언은 저수지바닥보다 한풍(寒風)에 노출되어 지표가 다섯 치 내지 한 자 심하면 두 자 내지 세 자의 동결을 이룬 결과, 이듬해 물을 가두려고 할 때는 이미 제언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만수시기에 이르면 즉각 파손의 재해를 만나는 것이 아닌가 (인용처 생략).


조선시기의 저수지 황폐화와 일제시기의 저수지 황폐화의 원인을 애써 구별하여 찾으려는 모습에서 일종의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는 이 서술에서, 조선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에 대한 것이든 일제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에 대한 것이든, 그가 찾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한쪽은 타락한 정치의 결과이고 다른 한쪽은 불가피한 자연영력의 결과라는 주장의 이데올로기성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요. 요는 일제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조차, 그것을 축조한 일본인들 스스로 불가사의하게 여길 정도로, 황폐화되어 제 구실을 못하고 심지어 파손의 위기에 처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촉진하는 자연환경요인이 조선농업의 기본조건으로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사실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수리시설의 폐지가 아니라 산림황폐화이니까요.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 토쿠사부로(山本德三郞)라는 일본인은, 조선과 같은 기후ㆍ지형특성에서는 산림이 ‘헐벗어’ 있는 것이 천수답 경영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여기에 산림을 만들려면 산밑에서 천수에 의존하는 경작방식으로 농사지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칩니다. 역시 1926년에 쓰인 글인데요. 천수답 영농과 산림황폐화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통찰력이 있는 견해이므로 오늘은 이걸 조금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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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천수답’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흔히 논은 관개답과 천수답으로 나눕니다. 관개답은 물을 대는 설비가 갖추어진 논, 천수답은 하늘에서 비가 와야 물을 댈 수 있는 논이지요. 천수답은 봉천답이나 하늘바라기논이라고도 합니다. 관개답은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로부터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는 논과 작은 하천이나 개울 등에 만든 간단한 수리시설을 통해 물을 공급받는 논으로 구분 가능합니다. 전자의 경우 수리안전답, 후자의 경우 천수답과 묶어서 수리불안전답이라고 하게 됩니다. 후자는 가뭄이 들면 수리시설로서 제구실을 할 수 없어서, 천수답과 거의 다를 바가 없게 되기 때문이지요. 조선의 경우 대개 2, 3년에 한 번, 적어도 4, 5년에 한 번은 이런 가뭄을 만나게 됩니다.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조선의 천수답 비율은 70% 안팎이었고 수리안전답은 10%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으므로, 이 땅의 논농사는 상당히 수리가 불안정한 환경에서 영위되어 왔다는 점도 일단 확인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국사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들은 조선에서는 가뭄의 우려가 커서 조선전기에 이앙법 보급이 지체되었다는 설명을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그 상황이고, 이는 일제시기와 현대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야마모토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조선 땅에는 발도 들여 본 적이 없는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사람인데, 그의 설명에서 동원되는 조선의 지세와 농업에 대한 지식은 견문으로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대신 아마 오카야마의 지세와 농업에 대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고, 조선에 대해 통찰력이 있는 설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 지식에 기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우선 “조선남부의 기후풍토는 내지(內地)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내지의 어느 지방과 가장 많이 비슷한가 하면, 산양도(山陽道) 남부 특히 오카야마현(岡山縣) 남부지방일 것”이라고 한 후, 오카야마 남부와 조선의 자연지리적 특성의 공통성을 지적합니다(내지라는 게 일본이지요?). 이에 따르면, 우선 “그 가장 혹사(酷似)한 점은 우량이 적고 공기가 건조하며 모암(母巖)은 화강암 석영반암 종류인 점”이며, “하계에는 호우 패연(沛然)히 이르는 일도 있는 것 같지만 일조시가 많고 온도가 높은 점” 또한 닮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산양도와 조선의 자연지리적 특성이 어떻게 비슷한지를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은 탁월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오풍십우(五風十雨)의 상태라면 그 지형여하에도 불구하고 천수(天水)의 부족을 느끼는 일이 적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량(雨量)의 배포가 편벽되고 지형이 협소한 계역(溪域)을 지니고 있다면 누누이 한발에 걸리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남선의 기후풍토가 이상과 같은 상태라면 계역은 황폐하여 벌거벗은 붉은 흙(荒廢禿赭) 상태에 빠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산지에서 사방조림(砂防造林) 기타 방법에 의해 삼림이 성립한다고 하면 그 결과 천수에 매달린 논의 용수나 유지(溜池)의 저수량에 여하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대책을 여하히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미리 음미하여 둘 필요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적은 것과 같은 지형과 기상상태인 곳에 삼림이 생긴다면, 우기에 있어서 출수량(出水量)을 조절하기에 홍수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건조기의 소우기(少雨期)가 되면 임목(林木)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수량(水量)과 지피물(地被物)의 습윤에 필요한 양 등으로 상당히 삼림 내에서 수분을 소비하므로, 건조기에 있어서의 적은 비 정도는 전부 산지의 삼림이 가져가버리고 산기슭ㆍ산아래에는 (물을―인용자) 내주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천수에 매달린 다소의 논을 지탱하고 있던 곳에서도 성림(成林)으로 인해 그 천수의 은혜를 입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삼림의 수원함양(水源涵養)이라고만 훈련된 지식계급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옅은 산을 안고 있는 삼림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대책은 여하히 하면 좋은가. 상당한 대규모의 유지(溜池)를 설치하여 우기에 쓸데없이 방하(放下)되는 수량의 일부를 모아놓고, 건조기에는 천수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 유지의 물로 관개하는 것이 아니라면 논물에 생각지 못한 부족을 초래하는 일이 있다. 삼림은 수원(水源)의 함양능력이 있으니까 무입목시대(無立木時代)의 천수가 점점 더 많아져서 관개 상 편리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크게 잘못 본 것이며, 구릉지에서 수원지구와 이용지구가 가까운 경우 무입목시대의 천수는 성림과 함께 이용수(利用水)로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아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풍십우로 우기가 편벽되지 않은 경우라면 쉽게 이런 일은 실제 문제가 되지 않으며, 또 유원(幽遠)한 계곡을 지닌 산악지대에서 수원지구와 이용지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이쪽저쪽에서 조금씩이나마 모아 와서 한 줄기가 되고 상당한 양이 되어 이용지대 쪽으로 당겨오기 때문에 수원함양의 의미를 지니지만, 남선과 같이 비가 편중되고 수원이 얕은 구릉지에서는 삼림이 성립하면 홍수에 대해서는 유리하더라도 소우기(少雨期)의 관개 상 이전과는 관계를 달리하므로, 소우ㆍ소나기 등 빗물을 상대로 하지 말고 우기에 있는 대량의 물을 상당히 커다란 유지로 모으는 식의 방침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삼림번무로 인하여 수원고갈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인용처 생략).


 

이러한 설명은 조선의 소위 ‘헐벗은 산’ ‘붉은 산’의 농업생태학적 기능을 지적한 것으로, 이앙법 보급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수답이 대종을 이루었던 조선의 농업환경에서, 경작지 인근의 산이 점차로 헐벗게 되었던 ‘자연사적 과정’의 존재이유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림의 수원 함양이라고만 훈련된 지식계급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이라는 단서는 일제시기는 물론 현대의 농학ㆍ농업사 연구자들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지니고 있고, ‘무입목시대의 천수는 삼림의 성립과 함께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을 갖추었습니다. 한마디로 가뭄과 강수, 삼림과 경작지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지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인 확신을 근본에서 뒤흔드는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참, 잠시 오카야마현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설명을 드리면, 오카야마가 그 연안에 위치한 세토내해(瀨戶內海)란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의 사이에 놓인 내해입니다. 관동지방에서 주로 남북방향으로 뻗었던 일본열도가 이 일대에 해당하는 관서지방에서는 동서로 놓이고, 열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산맥도 동서로 놓입니다. 산맥의 남쪽-세토내해 연안-은 산요, 그러니까 산양(山陽)이 되고, 북쪽-동해 연안-은 산인, 그러니까 산음(山陰)이 되겠네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해 첨가하자면, 일본 산양도와 조선의 자연지리조건 사이의 공통점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모암이 위나 아래나 같다면 중허리 이하의 산록완사지와, 중허리 이상의 산정(山頂) 부근은 산림 토리(土理)의 상이성이 나타나는 것이 상례인데, 이상과 같은 기후풍토인 경우 그 차이가 특히 심한 것으로 보인다. 산록, 골짜기의 토층의 깊고 오래 쌓여서 양질화(壤質化)한 곳은 소나무 등의 생육이 매우 좋으며, 약간 산허리로 가면서는 표토가 얕아지고 또 기껏 양질화한 것도 경사가 있으므로 빗물과 함께 씻겨서, 후에 남는 것은 모래자갈뿐으로 수목의 생육이 심히 나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산록완사지, 농경지의 토양은 세월의 추이에 따라 양질(壤質)을 띠기도 하고, 또 반영구적으로 점토가 되지 않는 석영과 같은 것이 있으므로 치밀함이 지나칠 정도의 토양이 되지도 않아, 기수(氣水)의 유통이 양호한 절호(絶好)의 사질양토(砂質壤土)를 구성하여 농업작물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산지(山地)가 일단 황폐화한 곳은 그 회복이 용이하지 않으며, 모암으로부터 풍화ㆍ분리된 모래알갱이를 산허리에 머물게 하고 산허리에서 양질화시키는 방법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이상 일조일석에는 황폐를 복구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방공사(砂防工事)의 필요를 느끼고, 사방공사는 토사(土砂)의 유출을 방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그에 수반하여 산허리에 토사를 머물게 하고 수분의 분배를 평등하게 하기 위해 양질화에 의해 산지의 생산력을 조장하고 성림(成林)을 용이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사명인 것, 이상과 같은 기후풍토의 관계는 산양도 남부와 서로 닮아 있다.”

조금 길었지요? 인용문 출처는 추후 공식적으로 글을 쓸 때(지금 쓰고 있습니다) 밝히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19세기 조선의 산림황폐화와 조선농민의 '무분별한 산림남벌론'에 대해, '산림을 황폐화시켜 스스로 파멸의 길을 재촉했던 무지막지한 19세기 조선의 농민들'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에게, 새로운 이해의 계기가 되셨기를 빕니다.

 병원에 가면 먼저 문진(問診)을 하지요.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 언제부터냐, 자주 있는 일이냐, 어떤 증상이 있느냐 등등. 그리고 청진(聽診)과 촉진(觸診)을 합니다. 한의사 같으면 진맥(診脈)도 하겠지요. 청진기로 심장 뛰는 소리라든가, 숨 쉬는 소리라든가를 듣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속에서 나는 소리도 듣나요? 이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여기 저기 만져보고 눌러보고 합니다. 목구멍 같은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어라고 부르나요? 시진(視診)? 가끔은 환자에게 특정부위를 움직여보라고 하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뼈나 근육, 신경의 상태를 유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승과 교육을 통해 배운 사실, 진료경험으로 깨달은 사실 등에 비추어 환자의 환후(患候)에 대한 판단을 내립니다. 배탈 났네요, 감기입니다, 혹은 꾀병입니다, 그런 식이지요. 상상임신입니다, 같은 충격적인 진단도 있겠고요.

병원과 의사, 간호사에 관한 에로틱한 환상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청진ㆍ촉진ㆍ진맥 등의 행위는, 실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혹은 환자가 자각하지 못한, 아니면 환자가 언어로 잘못 표현한, 환자의 증상을 파악하는 유력한 방법들이지요. X-Ray나 CT, MRI 같이 환자의 몸속을 산 채로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사실 이런 방식이 진료행위의 거의 전부가 아니었나요? 물론 X-Ray 등도 진료의 원리는 사실상 동일합니다만. 그것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의 유형을 계열화한 지식을 바탕으로 병의 징후로부터 바로 진리(의학적 진료행위의 경우 병환의 원인)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문진의 방법을 통해 환자의 의식 혹은 언어를 매개 혹은 경유하는 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기는 하되, 청진ㆍ촉진ㆍ시진ㆍ진맥 등의 행위는 문진과는 별도의 인식론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편의상 여기에서 ‘지각 가능한 현상’을 추상화한 용어로 ‘형태’를, ‘청진ㆍ촉진ㆍ시진ㆍ진맥 등 형태를 감각하는 행위’를 추상화한 용어로 ‘관찰’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형태적 규칙'이란 '형태들에 대한 유형적 파악과 그 축적을 통해 형성된, 형태들의 속성에 대한 계열화된 지식' 정도로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요?


계열과 맥락을 구별해서 부르는 것은 사실 말장난입니다만, 일단 개념적인 구분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맥락은 하나의 형태의 발생과정 혹은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재현(representation)을, 계열은 하나의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 사이의 상대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구축된 지식이나 재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이라고 쓴 것은 현상과 맥락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호성은 지적인 혼란 혹은 연구자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대개는 현상 자체가 시공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즉 항상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열과 맥락을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만, 이 발생적 맥락에 대한 아카데미의 신화는 상당히 막강하므로, 이 신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바꿔 말하면 이 신화의 신봉자들로부터 쏟아질 탈맥락적인 지식이라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브라가님의 표현을 빌자면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의 황당한 상상―사실상 광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단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 편의적으로 맥락과 계열을 분리하여 개념화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략 다음과 같은 구분을 이룬 것 같습니다. 연구(혹은 관찰, 아니면 그저 호기심)의 대상인 바 행위자의 의식을 경유하여 그에 의해 언어적으로 구축된 지식의 맥락, 같은 식으로 구축된 지식의 계열, 행위자의 의식을 경유하였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 간에 이를 성립의 본질적인 계기로 삼지 않으면서 비언어적으로 구축된 지식의 맥락, 그리고 같은 식으로 구축된 지식의 계열.


그리고 한 가지만 단서를 달면, 언어적인 현상에도 형태적인 측면이 있어서 맥락적으로가 아니라 형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죠. 음운론이라든가 음성론이라든가 방언연구라든가, 역사언어학ㆍ비교언어학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언어현상을 형태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번에 썼던 "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과 비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그걸 계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에 대한 지식이 정교화된다면)이 반씩(물론 정확히 '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섞여 있다"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단지 오늘의 용어정리를 바탕으로 이를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겠네요. 언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과 형태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 맥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과 계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진실들이 반씩(물론 정확힌 '반'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섞여있겠네요. 그러면 지난 번처럼 '맥락론/형태론'이 아니라, 언어적 지식(의미론)/형태적 지식(형태론), 맥락론/계열론의 대립쌍을 설정해야 되겠군요.


레비-스트로스보다는 브로델이 맞지 않느냐는 브라가님의 논평을 읽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형태의 구조주의적 방법론, 혹은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실천되어 왔던 제가 원하는 형태의 방법론의 한 이상적인 모습을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발견한 바 있습니다. 브라가님이 브로델을 떠올리시는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지금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공부의 폭이 좁고 또 그 쪽으로 많은 공부를 하게 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조금 뭐 합니다만, 특히 맑시스트적인 구조주의는 조금 안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구조주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이런 형태론적인 관심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브로델은 이를 역사학에 적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제가 소화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브라가님의 논평으로 돌아가면, 제가 브로델에게서 역사방법으로서의 형태론을 찾았고, 그것에 매료되어 형태론에 대한 관심을 키워온 것이기 때문에 브라가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제가 이해한 레비-스트로스와 브로델의 구조주의에 대해서는 또 다음 기회에 적도록 하겠습니다.

저 일부러 포토샵을 건 듯한 빨간색이 환타라는 점은 놀랍군요. 그리고 환타 중에 저렇게 빨간 색이 나는 맛이 무슨 맛 환타인가 하는 점도 궁금합니다.


책의 탑은 책 빼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올렸더라면 대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저 책의 탑은 그 학생의 특수한 개인기가 아니라 그곳 대학생들이 널리 활용하고 있는 방식인 겁니까?


특수한 현상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맥락'이라는 것-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등등 여러 관형어를 붙일 수 있겠지요-이 실은 단속적이라는 점은 동의합니다. 인터뷰에 대해 종속적이지 않은 관찰이라는 방법의 독자적인 인식론적 지위를 이야기할 때 지적하고 싶었던 점이 바로 그것인데요. 그러니까 맥락 외의 형태적 규칙들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관찰에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레비스트로스가 역사적 방법과 구조적 방법이 실은 같은 거다라고 계속 말하면서도 구조적 방법이 더 본질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실은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방식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저는 현명한 절충론자 스타일인지라..) 그러니까 구조를 형태로, 역사를 맥락으로 전환하면, 우리의 이야기가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된다는 아이디어라는 거죠(..통하였느냐?)

그래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구조적 규칙을 열쇠로 동서고금을 넘나들었던 것처럼, 형태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우리가 맥락들을, 역사들을 벗어나(여기에서 맥락이나 역사는 인도네시아와 미국, 혹은 학문분과나 학계의 규칙처럼 각 지식들을 유효한 것으로 만든 기존의 질서들이 조직되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갑이라는 학문을 배울 때 갑학사를 먼저 배우는 것처럼.


물론 저는 기본적으로 '현명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반역사적인 방법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은 인식론이겠지요.


쓰고 나서 보니 이게 뭔 말이다냐 싶군요. 그러니까 제 말씀은, 책탑 쌓기든, 환타우유든, 광화문이든, 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과 비맥락적인 진실들의 계열(그걸 계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이에 대한 지식이 정교화된다면)이 반씩(물론 정확히 '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섞여 있다는 거죠.

후자는 맥락을 벗어나서, 맥락에 구애받지 않고, 가령 전 세계의 미친놈들이 발작을 할 때마다 보이는 열다섯 가지 행동양식이라는 탈맥락적인 지식의 체계가 훨씬 설득력 있게 그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뭐 꼭 '전 세계'일 필요는 당연히 없는 것이겠습니다만). 그때 우리는 인터뷰와 구별되는, 문헌사료분석과 구별되는, 통계분석과 구별되는, '관찰'이라는 학문기법의 독자적인 인식론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 비용문제는 당분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책으로 읽는 21세기>의 원고료가 아직 상당히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수라장.넷이 외우기 어렵고 복잡한 문제는 어찌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그다지 복잡하다는 생각을 안 해보았는데, 역시 처음 가르쳐주고 하기에는 복잡한가보죠? 그러고 보면 경묵이는 아수라의 알을 꼭 엘로 쓰는 경향이 있었던 듯도 하군요. 너무 길다면 asura나 asur 정도로 줄여도 되겠고, 굳이 도메인 네임을 따로 유지할 필요가 없다면 그냥 아수라장.카페24.콤으로 놔두어도 되겠지요. 이 문제는 일단 기권.


관리자 계정을 별도로 운영하는 것은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아이프레임이나 웹 알에스에스 리더라니, 어렵군요. 일단 지난번에도 물어보았던, 다른 서버에 존재하는 블로그들과 ‘팀 블로깅’을 하기 위한 기술적 대안으로 경묵이가 찾아낸 방식인 것으로 이해하기로 하겠습니다.


이건 일단 저도 질문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아이프레임이나 웹 알에스에스 리더를 활용하여 다른 서버의 블로그 글제목도 불러들이는 초기화면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이 시각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지금 것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요.


제 생각에는, 지금 상태에서 가장 좋은 것은 현재 구축된 체제를 가지고 어떻게든 운영을 해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누군가가(효진이나 주형이나 혹은 그 외의 누군가) 기존에 있는 블로그를 가지고 이 팀 블로깅에 합류할 의사를 밝히면, 그때 가서 별도의 초기화면 구축작업을 해도 늦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새로운 초기화면을 만드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고(이건 애매한 문제이므로, 구축에 하루 이내의 시간이 걸리는지를 기준으로 삼읍시다), 시각적으로 기능적으로 지금의 것 못지않거나 이보다 나으며, 효진 또는 주형이가 당장 참여의사를 밝힌다면, 당장 새로운 초기화면을 구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효진이의 의사는 경묵이가 조금 내밀하고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형이는 내밀한 의사를 파악하기가 사실 쉽지 않은 상대이지만, 지금과 같은 국면에서 뜻이 있다면 밝힐 수 있는 상황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초기화면으로 바꾸든 현재의 초기화면으로 가든, 저는 아래 네 가지의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현재의 아수라장 쩜 카페24 쩜 콤 안에 <아수라장 기획토론>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어서 어느 개인의 블로그에서 다루기 애매한 공통의 토론자리를 개설하였으면 합니다. 아수라장 팀 블로그 운영에 관한 문제를 다룰 수도 있고, 학술적인 토론을 할 수도 있겠지요.


둘째, 그리고 가능하면(이게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쉬운지 어려운지를 모르겠네요) 지금 우측 메뉴의 <notice>라는 제목 아래 공지사항 블로그의 글 목록이 올라오는 것처럼, 같은 식으로 <토론방>이라는 제목을 <notice> 밑에 만들어서, <기획토론> 블로그의 글 목록이 역시 우측 메뉴에 올라오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대개 그 목록에는 토론의 발제문이라든가 발제문에 단 답글들이 올라오게 되지 않을까요?). 자신의 블로그에서 토론방 블로그에 트랙백을 달거나 했을 때 초기화면에 토론방 메뉴에 글 제목이 올라오지 않고 개인블로그 글목록에 올라온다는 문제가 있겠지만 이건 큰 문제가 아닐 거 같습니다.


셋째, 현재 상태에서 기존 아수라장 멤버 외에 참여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저희가 분양해줄 수 있는 블로그에 수적인 제한이 없다면, 자유롭게 블로그를 분양받아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민감한 문제이지만, 실은 정아 누나랑 선아가 웹진을 만든다고 했을 때도 그 편집진과 필진을 일정하게 오픈하는 문제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다고 볼 수도 있고, 그게 결정된 사항이었든 아니든, 현재 2명의 블로거(그나마 하나는 몹시 부실한)만으로 팀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창단멤버의 폐쇄된 멤버십에 의한 논의의 틀이 필요하다면, <아수라장 구편집진 인트라넷>이라는 제목으로 우측 메뉴 최하단 ‘연결고리’ 항목에 링크를 달아 프리챌 아수라장 커뮤니티를 연결하여 사용하면 어떨까 합니다(당연히 로그인이 필요하겠지요). 이 경우 가능하면 공지사항 게시판을 사용하여 글이 실리면 프리챌 커뮤니티 멤버에게 바로 글이 발송되도록 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