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답 댓글을 적고, 실은 '지배' '지배적' '지배한다' 등의 어휘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배'는 아마 영어로는 도미네이트 혹은 룰인 듯 한데, 그 단아 자체의 뜻으로 보나 인문사회과학서적에서의 용례로 보나, 이게 이를테면 그저 '우세를 보이다'는 의미 정도로 쓰이는 경우도 있고 그게 아니라 직접적인 지휘명령적인 성격을 지닌 상당히 강한 주종관계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에릭 울프의 <농민>(박현수 역, 청년사, 1978)을 읽던 중, 농민사회와 관련하여, 토지지배권의 유형을 나누어 설명한 내용이 있어 자료 삼아 올립니다. 마침 의례의 기능을 지적한 부분이 있어, 라구르 님이 쓰신 연구사 리뷰하고도 맥락이 닿는 점이 있더군요.

물론 울프의 설명은 농민사회 내의 토지지배권과 관련한 것으로 한정되는 것이고, 저희들이 논의해야 할 주제는 이보다 광범위하거나 또는 아주 다른 맥락 위에 놓인 지배 현상에 관한 것이어야 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도 뭔가 다음의 토론을 이어가기 위해 참고할 만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중간에 꺾은 괄호 안에 들어가있는 것은 페이지 숫자(그 숫자에 해당하는 페이지가 그 꺾은 괄호 이후부터 시작한다는 뜻으로)를 뜻합니다. 끄트머리에 가까운 데에 나오는 농민사회의 구기술과 신기술이라는 표현은, 울프가 사용하는 바에 따르면, 신기술은 노포크식 윤작의 발달, 종자개량, 세계 각처로부터의 새로운 작물의 유입, 새로운 기계(주로 축력)의 도입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고, 구기술은 그 전 단계의 그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울프는 여기에서 언급한 세 가지 토지재배권의 형태 외에 마지막으로 행정적 지배권이라는 것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콜호즈와 소포즈, 중국의 인민공사 같은 것인데요. 여기까지 하면, 대충 예전의 고등학교 지리나 세계사, 대학의 교양강의 등에서 들었던 상식들이 살아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 치기에는 손이 아프기도 하고 그런다고 해도 어차피 다 읽으실 분도 없으실 듯 하여 내용은 임의로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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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이러한 예들(18세기 인도의 촌락과 중세 유럽의 장원―인용자)을 보건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농민들이 사용하는 토지에 대하여 권리를 주장하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은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인데, 지배권이란 어떤 토지를 이용하는데 대한 궁극적인 소유권이나 관리권을 뜻한다. 우리네 사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토지를 사유하여 이를 마음대로 팔거나 처분할 권리를 가지는 것은 여러 가지 지배권 형태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전통적으로 농민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쳐온 지배권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세습적 지배권과 봉록적 지배권과 상업적 지배권이 그것이다. 세습적 지배권은 흔히 봉건적 지배권이라고도 불렸는데 봉건적이라는 말에는 매우 복잡한 의미들이 얽혀있어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세습적 토지지배권이 행사되는 경우 토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치할 권력을 장악하는 사람은 어떤 특정 친족집단이나 가계에 태어난 덕분에 지배권을 상속받은 영주이며, 이러한 통치권[92]에는 토지를 점유한 주민들로부터 토지사용료를 거둘 권리가 포함된다. 이런 지배권은 영주네 가계를 통하여 세습적으로 상속된다. 그러한 권리는 피라밋식으로 구성되어, 높은 영주가 낮은 영주를 지배할 세습적인 권리를 가지며 낮은 영주는 땅을 일구는 농민들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는 수가 있다. 농민은 언제나 이러한 피라밋과 같은 위계조직의 밑바닥에서 노동력이나 물건, 또는 돈으로 잉여자금을 바쳐서 그러한 조직을 지탱한다.

봉록적 지배권은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심부름꾼이라는 자격으로 농민들로부터 토지사용료를 거두는 관리들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세습적 지배권과 다[93]르다. 그러므로 이런 지배권은 가계의 지배권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지배권은 어떤 특정한 관리에게 일한 댓가로서 수입―봉록―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가 이런 뜻으로 사용한 ‘봉록’이라는 말은 원래 유럽의 관리들에게 급여하던 봉급 또는 ‘생계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급료 형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 예컨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오스만 제국, 인도의 무갈 제국, 그리고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제국들은 정치조직에 의하여 토지와 토지사용료에 대한 상속적인 권리 주장을 막아내는 데 힘썼다. 그 대신에 절대적인 전제군주의 막강한 지배권을 내세워, 지배권을 주장하는 모든 하부세력을 깔아뭉갰다. 그래서 하부 지배권은 어느 것이나 절대자의 심부름꾼 자격을 가진 관리들에게 부여되었다.

봉록적 지배권의 또 하나의 중요 형태에서는 토지가 아니라 ―주권자로서의― 국가가 농민층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수입을 문제로 한다. 이러한 형태의 봉록적 지배권 체제 하에서는, 국가 관리에게는 국고로 돌아갈 조세에 덧붙여 자기의 몫을 거두고 이를 자기 뜻대로 사용할 권한이 부여된다. 이런 방법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른바 세금 농사꾼(tax farmer)에게 일정한 지역에서 세금이라는 형태의 조세를 거둘 권리를 하청주어, 세금 농사꾼이 국가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고 그 수입 중의 한 몫을 차지할 수 있게 하는 방법, 둘째는 우선 국가의 수입을 한 군데 모은 다음에 관리들에게 그들이 일한 대가로 봉급을 주는 방법이다. 세금 농사라는 하청방법은 중동 지역과 인도의 무갈 왕조의 봉록적 지배권의 기본적 형태였다. [94]봉급 지급이라는 방법은 보다 고도의 중앙집권적 국가를 이룩했던 중국에서 관례적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세금 농사꾼이건 봉급 받는 관리건 간에 거두어들인 세금을 상부에는 바치지 않고 자기 밑천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막스 베버가 추산한 바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좋던 때라 할지라도 중앙에 도달하는 것은 총수입의 40%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그렇다고는 하지만 지배권 장악자들이 강한 자율권을 가지는 세습적 지배권에 비하여 봉록적인 지배권은 확실히 중앙집권의 정도가 훨씬 높고 훨씬 폭넓었다.

세습적 지배권과 봉록적 지배권의 공통적인 양상은 그런 지배권 행사들이 우리가 말한 바 있는 의례에 얽혀있었던 정도에 있다. 의례적인 성격은 특히 세습적 지배권의 경우에 뚜렷하다. 그런 데서는 영주가 예속적인 농민들과 직접적으로 개인적인 관계나, 아니면 적어도 개인화된 관계를 맺는 게 보통이었다. 농민들이 이런 영주들에게 해주는 일에는 의례적인 측면이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영주와 농민과의 관계가 흔히 일종의 계약으로 이루어져서, 농민들이 바치는 것을 받는 대가로 영주는 그들을 보호하고 안심하고 땅을 일굴 수 있게 한 교환관계였다는 사실이다. 13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계약관계가 일종의 협약이라는 말로 상정되었다.…농민들이 영[95]주에게 해주는 일은 대개 주기적인 의례행사들과 얽혀있었다. 예컨대 성탄절에는 맥주나 닭을 바치고 부활절에는 계란을 바치는 따위이다. 이에 대하여 영주는 주민들에 성탄절이나 부활절 축제를 열어주고, 혼인을 축하하기 위하여 잔체를 베풀어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봉록적인 지배권이 보편화된 곳에서는 의례를 통하여 농민과 궁극적 지배자이자 지상의 보호자로서의 최고 군주 사이의 관계를 은폐시키려 하였다. 지배자를 보기를 하늘의 아들이나 지상의 초자연적 세력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배자는 그가 군림한 나라의 질서를 지탱시킴으로써 우주의 섭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런가하면 제왕의 의례적인 영광은 그를 위해 일하고 그의 명령에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졌다. 이리하여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국가 관리는 농민들이 보기에 단지 행정 기술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儀式的)인 존재이기도 했다. 페이 사오퉁은 중국에서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거나, 메뚜기떼가 농토를 휩쓸면 어떻게 대처하는 지 설명해주고 있다.… [96]이러한 의례는 여러 가지 구실을 할 수가 있다. 호만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런 의례는 의식적(儀式的)인 방법으로 농민을 보상해줌으로써 불균등한 농민과 집권자 사이의 균형을 맞춰준다. 아울러 이는 집권자의 정체를 의례적인 가치로 가려줌으로써 피지배자들의 잠재적인 반대주장에 대하여 지배자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준다.

토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배권의 세 번째 형태는 상업적 지배권이다. 여기서는 토지가 지주의 개인적인 소유물이어서 주인이 이익을 얻기 위해 사고팔거나, 이용할 물체로 간주한다.…상업적인 지배권도 다른 지배권들처럼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지배권들처럼 토지를 이용하는 대가로서 돈을 거둘 권리를 주장한다. 이러한 것을 흔히 지대(地代)라고 부른다. 토지와 토지로부터 거둘 수 있는 수입을 마치 돈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상업적 지배권은 앞에서 살핀 바 있는 지배권들[97]과 다르다.…

이러한 토지에 대한 세 가지 형태의 지배권―세습적, 봉록적, 상업적―이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어느 사회에서건 이러한 지배권들은 서로 공존한다. 어떤 특정한 사회체계의 조직적 측면을 결정짓는 것은 오히려 이런 형태의 지배권들이 어떻게 조합되거나 ‘혼합’되고, 각 형태들이 상대적으로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다.…[99]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지배권들이 단지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러한 지배권을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다.…확장 도상의 북서 유럽에서는 상업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투자하여 구기술의 생태형을 변화시키는 데 노력함으로써 생산 상의 모험을 감행한 셈이었다. 반면에 전통적인 동양이라든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구기술에 의존하는 생산기반을 보존하[100]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산의 위험을 언제까지 미루었으며 조세징수수단만을 발달시켰다. 이러한 체제를 지대자본주의라고 한다{울프 1978: 9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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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ttivoMaestro 2007/04/27 1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할일도 못하면서 이러고 있는 제 자신이 어이없습니다만, 생각난김에 적습니다.

    울프의 "지배권"은 아마도 Domain 의 번역인 것 같습니다. 저도 원문이 없어서 직접 확인할 수는없지만, 기억을 동원하고 몇개 시험삼아 확인 검색을 해보니 그렇네요. 어쨌든 만약 그렇다면 정확한 번역은 "토지소유권," 법적으로 소유권이 승인되고 정당화된 어떤 불가침적 소유권의 형식을 지칭한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네(내) 땅이니 네(내) 맘대로 해도된다는 소유권의 구성과 조건에 대한 분석인데, 그럼에도 그런 방식들이 각각 다른 형식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분석인 것 같네요. 주된 비판은 울프가 "사적" 소유권자체를 지나치게 자연화하거나 전제해버렸다 그것은 "미국물"이 들어서다였던 것 같습니다만, 이마저도 가물가물 합니다.

    아. 바쁘시겠지만 혹시나 관심이 있으실까 해서 제가 시범적으로 저널 검색해보다가 찾은 논문 하나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저도 안읽은 논문이라서 평은 못하겠구요. 언제 읽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나름 인용이 좀 된 글이고, 농업변화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인 일반론을 정리해 놓은 노트인 듯 하여 개괄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저도 곧 농민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공부를 좀 해볼까 하는 계획도 있고...

    다른분들을 위해서 서지정보를 드리자면,
    Robert H.Bates, "Some Conventional Orthodoxies in the Study of Agrarian Change," World Politics, Vol. 36. No. 2, 1984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