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라구르님이 블로그를 개설하셔서 먼저 글을 쓰시고, 여기에 대해 저희들이 댓글을 다는 식으로 진행되어야 전체적으로 글들이 제 위치를 찾을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제가 글을 쓰고 라구르님을 포함하여 여러 분들이 댓글을 다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군요. 뭐 이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게 딱히 부담스러울 것은 없습니다만, 하여 간에 이 글 역시 그러한 기형적인 형식에 따라 또 제가 새로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당사자들이야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겠습니다만, 혹시 보시는 분들이 논의를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애초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던 계기는 ‘시대구분’ 사이의 칸에 대한 라구르님의 문제제기(이 블로그의 <쿠이이이즈~!! 계급, 신분, 문화, 특권 + 국가, 직역>이라는 글에 달린 마지막 댓글)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로 뭔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제가 생각해왔던 어떤 점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지난 번 글에서는 쓰다 보니 흐름을 놓쳐서 이에 대한 언급으로까지 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결국 ‘시대의 구분’이라는 것은 ‘양식의 차이’를 가지고 설명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라구르님이 쓰신 글에서 일부를 차용하면, “이 시대와 저 시대는 칸이 쳐져 있어서 이 시대에서 저 시대로 넘어가면 양식이라는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고나 행동, 표현의 양식이 바뀌는 것을 두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고 ‘변화’를 운운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는데요. 물론, 그 전에, ‘그 양식으로 규정된 것 외에 다른 일은 나타나지 않으며 유사한 현상이 관찰되더라도 그것은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류학 개론에서 말하는 심리의 제일성이라는 것을 조금 더 확장 또는 변용(이게 애매하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패러디’)해서 ‘계산능력의 제일성’이라는 전제를 두고(이것은 Islands of History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차용하여 하와인의 무차별적인 실용주의를 ‘야생의 계산’이라고 불렀던 마샬 살린스의 어휘를 다시 차용한 것인데요), 그 계산에 사용되는, 그리고 그 계산에 따른 행위에 사용되는 유ㆍ무형의(혹은 물질적ㆍ관념적인) 도구들의 양식적인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는 인간관ㆍ사회관을 구현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라구르님이 댓글에서 표적으로 삼았던 사고방식들 중 ‘양식으로 규정된 것 외에 다른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대를, ‘시공간들 사이의 칸을 넘어 유사한 현상이 관찰되더라도 그것은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반대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제한적인 반대’ 즉 ‘제한적인 찬성’을 하게 된다는 것은, 역시 그것이 ‘양식’ 자체의 맥락과 어느 정도로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가에 따라서 실제 개별 사실이나 해석에 대해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양식 내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일수록 그 반대의 정도는 강해질 것이고, 계산 내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일수록 그 찬성의 정도는 강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적 사상(事象)들에 대한 설명 내지 평가들은 이 사이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게 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단순하고 회피적인 절충론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양식의 차이’라는 단일한 극점만을 설정하고 각종의 사상들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 외에 ‘계산(혹은 심리)’이라는 다른 극을 설정하고 이 설정을 통해서 새롭게 사상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자위를 해봅니다.
이 지점이 역사학과 민속학(그리고 인류학)의 경계점이라고 보시는 견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대구분을 그 본령이자 궁극적인 지향으로 삼는 학문이고, 민속학은 그 본령이나 궁극적인 지향에 대한 인식이 모호한 상태에서 흔히 이를 넘나드는 일을 일삼아왔기 때문입니다. 민속학사(그리고 인류학사)에는 이로 인한 뻘짓들의 흔적이 마치 수십, 수백 구의 시체를 절단 낸 토막살인현장의 혈흔처럼 어지럽게 널리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 분간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난만한 혈흔들로 인해 모종의 성취의 가능성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으로 님의 논평과 관련해서는 “관습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제된 시공간적 구분을 넘어”라는 문장이 제가 맥락과 계열의 개념적인 차이를 설정하기 위해 집어넣은 것인데, 역시 모호한 표현인데다가 설득력도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집으로 님의 논평이 적절했고, 저의 논지의 약한 고리를 날카롭게 짚어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제가 생각하기에 ‘맥락’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들의 내적 일관성이 해석대상에 실재하거나 적어도 해석자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전제 아래 성립하게 되는(혹은 성립해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식’도 맥락이 될 수 있겠지요. 물론 다른 것들이 맥락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계열과의 대비를 위한 정의가 아니라, 우리가 ‘맥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그 개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려고 할 때 그렇게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본성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실은 그러한 의미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일회적이고 돌발적이며 뜬금없기 마련인 각종의 사상(事象)―저는 사물과 현상, 사건 등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이 말이 적합한 것 같아 이 ‘사상’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이건 일본식 한자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들에 대한 '해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미들의 체계 혹은 구조’라는 차원에서의 내적 일관성이 있다는 전제가 불가결할 것입니다. ‘하나의 사회’에 ‘하나’가 아닌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입론을 하는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그러한 입론 역시 ‘그보다 작은 사회’에서는 그 고유한 하나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전제되어야 ‘그보다 큰 사회’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입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그건 뒤집어 말하면 ‘그 작은 사회’에는 ‘일관된, 공유되고 학습된 하나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한 셈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연구분석은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맥락화’가 중요한 것이고, 그 맥락을 잡아내지 못하거나 잘못 잡아내면 뻘짓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며, 하여튼 맥락에 관한 우리의 모든 대화가 이러한 정의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계열’은 이러한 맥락의 존재, 그러니까 ‘의미들의 체계 혹은 구조’라는 뜻에서의 ‘내적 일관성’ 혹은 ‘학습되고 공유된 성격’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그러나 역시 맥락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역사적 사상들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련의 연쇄관계 혹은 인덱스들의 반복적 출현이라는 거죠.
둘째, 그런 의미에서 맥락과 계열은 절대적인 구분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식의 성격 상, 그리고 일단 지식과 해석을 성립 가능케 하는 기존의 맥락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계열들이 끄집어내져서 새로운 해석과 지식이 성립하면,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일수록 그 계열들은 이제 새로운 맥락으로 바뀌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맥락과 계열은 절대적인 구분이 아니라, 지식과 해석, 설명과 이해라는 세계에 존재하는 임의적이고 실천적인 구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가령 마을의 역사는 맥락이고 세계체제의 역사는 계열인 것이 아니라, 또 공시적 연구는 맥락적 지식을 정리한 것이고 통시적 연구는 계열적 지식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마을의 역사가 기존의 지식의 맥락인 상황에서 세계체제의 역사가 지식의 계열이 되었다면, 전제가 반대인 경우(즉 세계체제의 역사가 맥락으로 기능하고 있을 경우) 마을의 역사가 새로운 지식의 계열이 되기도 한다고 일단 정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지지지지난 번 쯤의 글(이 블로그에 올린 <문진(問診) 그리고 청진(聽診), 촉진(觸診)..―인류학에서 관찰의 지위(3)>)에서 “계열과 맥락을 구별해서 부르는 것은 사실 말장난입니다만, 일단 개념적인 구분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맥락은 하나의 형태의 발생과정 혹은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재현(representation)을, 계열은 하나의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 사이의 상대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구축된 지식이나 재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현상들 혹은 현상+맥락들’이라고 쓴 것은 현상과 맥락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호성은 지적인 혼란 혹은 연구자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대개는 현상 자체가 시공간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즉 항상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열과 맥락을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만, 이 발생적 맥락에 대한 아카데미의 신화는 상당히 막강하므로, 이 신화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바꿔 말하면 이 신화의 신봉자들로부터 쏟아질 탈맥락적인 지식이라는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서(브라가님의 표현을 빌자면 아마추어 정신분석학자의 황당한 상상―사실상 광기―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단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 편의적으로 맥락과 계열을 분리하여 개념화하자는 것입니다.”라고 적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데요. 이러한 인식은 이에 대한 브라가님(및 그 룸메이트) 그리고 빠진서님의 논평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불가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락과 계열이라는 이상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지지지지난 번 글로부터의 인용에 적은 것처럼 맥락에 대한 지식과 이에 대한 접근방법이 제도화되고 권력화함에 따라 다른 종류의 맥락들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접근의 여지 자체를 차단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런 의미에서, 공시적인 것에 대한 통시적인 것만이 계열인 것이 아니고, 국지적인 것에 대한 광역적인 것이 계열적인 지식일 수 있으며, 또한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통시적이고 광역적인 지식들만이 맥락적 지식으로 설정되어 있을 경우 공시적이고 국지적인 지식들이 계열적인 지식들로 설정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매 개별 연구의 출발점에서 맥락은 연속적이고 일관된 연쇄관계들을 표상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계열은 단속적이고 분절적인 연쇄관계들을 표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특징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실제로 우리가 역사적 사상들을 검색해나갈 때 자료들 그리고 역사적 실재들 중에서 맥락으로서 연속적인 관계들을, 계열로서 단속적인 관계들을 검출해나간다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전제가 되어야 할 인식은 맥락이든 계열이든 모두 본성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다는 점이 되어야 하겠지요.
기어츠의 세부 논지에 대해서는, 사실 저는 ‘중층기술’,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논평’ ‘발리의 시간과 인간과 행동’, ‘발리 닭싸움’ 이 네 가지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이와 관련해서 논쟁할 여지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기어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하는 식으로 일단 자위를 하고, 추후에 시간이 날 때 조금 더 읽어보고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그 글은 1997년 쯤의 한국문화인류학회 전국대회 발표초록집에 “문화의 재고와 재고의 감옥”인가 하는 제목으로 실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혹시 ‘발표자 중 누군가’가 그 글 원고를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빠진서님의 논평은 몹시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클래스’가 영국어가 아니라 시공간을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어디에서 싹텄는지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적었을 때는 “계급이라는 용어를 산업 사회의 등장 이전의 시기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조금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인 것 같군요. 스테이터스와 에스테이츠, 그리고 대표(레프레젠테이션)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것만으로는 잘 모르겠군요. 단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질문을 던져본다면, 빠진서님의 설명에서는 산업화 이후의 사회에서의 사회관계의 본성은 경제적인 것이고 그 이전(왜냐하면 거기는 정치적인 대표성을 사회조직의 기본원리로 삼는 신분사회일 뿐만 아니라 또한 경제적인 원리로만 조직되는 사회관계로서의 계급조차 없었으니까)에서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식의 도식이 느껴지는데요. 이 도식 자체가 빠진서님의 설명틀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보입니다만, 또한 그러한 왜곡이 성립할 수 있는 여지가 지금의 설명틀에서는 너무나 명백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조금 더 설명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라구르님의 지지난 번 댓글(이 블로그의 <가장무도 및 시공간들 사이의 '칸'에 대하여(1)>에 달린 세 번째 댓글)에서는 그 중 두 번째로 제기하신 문제, 즉 “어떤 논자는 신분층이 되기 이전에 그들은 계급으로 존재하였다가 법제적 특권을 취득함으로써 신분층으로 공고화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어법이 과연 맞는 것인가”가 이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생각에는 이 어법이 그 자체로 틀린 점은 없지 않은가 생각되고, 라구르님은 그렇지 않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에 대해서 별로 많이 생각해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라구르님께서 이 어법의 어떤 점이 문제라는 것인지 다시 조금만 설명을 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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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블로그를 개설해서 낙장불입님의 수고를 덜어드려야 할 것 같네요... 뭐 암튼 곧 학교에 가야 해서 충분한 얘기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곧 하기로 하고, 당장 보충해야 할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마지막 문단의 "어떤 논자는 신분층이 되기 이전에 그들은 계급으로 존재하였다가 법제적 특권을 취득함으로써 신분층으로 공고화되었다"는 진술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저도 계급, 신분 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헷갈리는데요. 저는 저와 같은 어법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계급이라는 말을 쓸 때 상당히 느슨하게, '사회적으로 인지가능한 집단' 정도의 의미로 쓸 수도 있고 또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구별을 함축하는 표현으로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위의 표현의 경우 두번째의 의미로 쓴 것이라면 다소 비역사적 진술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며, 첫번째의 의미, 그러니까 인지가능한 하나의 사회집단 정도의 의미로 쓴다면 어폐가 있는 게 신분층 역시 계급의 외연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status'라는 의미에서 '신분(혹은 지위)'이라는 용어를 쓴다해도 위의 진술은, 제 생각엔, 베버를 따라, "원래는 성취 지위였던 양반이 정치적 의사결정 독점과 경제적, 법제적 특권의 취득에 따라 귀속 지위로 공고화되었고 그리하여 하나의 변별적인 사회계급으로 등장하였다"라는 식의 표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state'라는 의미에서 쓴다면, 이는 분명 유럽사에 있어 세 신분(성직자, 기사, 평민)의 유비일 것 같은데, 그럴 경우 '신분층'의 의미는 estate에 비견될만한 지리적, 역사적 구체성과 질을 담보해야 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특수한 또다른 용어인 (두번째 의미의) '계급'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뭔가 대단히 비역사적이고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너무 넘치거나 혹은 너무 모자라거나....
아래 빠진서님은 댓글을 달면서 "비대"한 문제라고 그랬던데요. 그래서 뼈만 발라내시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비슷한 글을 썼었는데, 제 글은 뼈조각 살코기인 것 같아서 제 검역도 통과를 못 해 폐기해버렸네요. 그래서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는데요.
낙장불입님이 다시 칼을 쥐시고, 문제들의 결을 따라 칼집을 내주시니 다시 끼어들 틈이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여전히 그 칼집이 무엇을 표시하는가에 이해력이 좀 딸리는 것 갈습니다. 특히 맥락, 계열, 양식에 관한 논의는 그게 왜 중요한 논의로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기가 버겁거나 제가 저항해서 특히나 좀 어렵네요.
다시말하면 저는 좀 이 논의지형에서 참조할만한 텍스트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나마 살린스와 기어츠에 얼마간 기대고 있으신 것 같다는-분위기상 그리고 어투상-인상을 받아서 또 제 나름대로 조합을 해보는데 잘 안되네요.
좀 더 이해를 해보고 싶어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질문이 좀 기본적인 것들이지만 일단 "정육"의 기본으로 털은 꼬시르거나 깍아는 줘야 할 것 같아서요.
시공간이라는 복합어는 기본적으로 역사를 지칭하기 위해서 쓰신 것인가요? 역사가 시공간을 전제한다고 배워 온 우리의 역사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가 곧바로 시공간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역사는 좀 비켜서라고 하더라도, 형이상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구별되는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요. 시공간을 세계 그 자체 혹은 존재적 조건으로 보는 논의도 있고 이때는 사실 "역사"는 시공간의 특수한 재현태이거나 특수한 운동(뭐 대개 진화적 모델입니다만)으로 간주되기도 하니까요. 논의에서 좀 벗어난 것도 같지만 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질문을 드려봅니다.
다른 하나는 "칸"에 관한 것인데요. 이 칸이 실재한다는 혹은 실체적으로 증명가능하다는 선에서 논의를 하시고 계시는 것인가요? 역사학에서 중요시 했기 때문에 중요해진 문제기도 합니다만, 한편에서 보면 시간에 대한 진화주의적 태도를 배제하고나면 그 칸이라는 것은 그저 연속성의 감각내에서의 인지적 배열의 교집합에 관한 문제가 아니겠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면 교집합을 제외한 나머지의 극단적 배타성을 선언해줘야하기 때문에 끝없는 교집합의 교집합을 범주화해야하는 딜레마가 발생하지 않을까 싶네요.
또 다른 한편에서보면 이른바 "아래로 부터"의 사관들에서 강조되 듯 하나의 "시대"를 끝장내는 혹은 "장강의 윗물이 아랫물을 밀어내는"식의 압박이 칸으로 제시되기도 했었는데요.사실 이 자동차 엔진 운동으로 달달외웠던, 4행정 싸이클 기관의 마지막 과정처럼 보이는 "압축-폭발"의 과정이라는 것도 완전연소는 불가한 것이고 보면 "칸"이란 결국 설명을 위한 장치, 혹은 맥락화된 인지적 실리콘 팩 같은 것 아닌가도 싶습니다.
양식을 언급하셨는데, 그것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의 "생산양식"에서, 남의 것 같은 "생산"을 떨궈내고 쓰시는 것인가요? 그런데 생산을 떼내면 그것이 모드, 트랜드, 스타일과 다를게 없어지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양식이 실체인지 추상인지의 구분도 좀 불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사실 추상일텐데 말이지요. 개념의 의미화가 즉자적 일상어로의 가치절하(적당한 단어가 안떠올라서)로 이해 할 것인가는 학문함이 하나의 실천행위라는 점에서도 주된 논쟁점을 형성하는 것 갈습니다. 여기서 상당수 현대 인류학자들은 개념적 인식을 거부하고 설명적 기술(중층기술이라고들 하는)을 통해 개념이 가진 폭력적 경제성의 압박을 해체하려고도 했었던 것 같구요. 사실 그것이 손쉽게 가능한 기획일 턱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기어츠를 두꺼운 필드노트를 들고 돌아온 인류학자로 상징화하는데 멈춤으로써 중층기술의 전제인 해석학은 사라지고 의미는 텍스트 밖에서 빌어와 삽입되는 묘한 텍스트 구조가 있었지 않았나도 싶습니다. 사실 저는 해석학적 인류학이 그럴싸함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이중텍스트의 생산을 결과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기어츠보다는 저자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데리다가 백배 천배 인류학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만. 이건 제 개인적 견해고..그래도 어쨌든 기어츠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레비스트로스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랬던 것 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거든요.
이야기가 샛습니다. 다른 한가지 질문은 이렇습니다. "역사학"이 시작된 이래도 가장 중요한 시기 구분은 "체제"가 아니었나요? 앙시앙레짐과의 구분을 통한?
사실 사적유물론이 주창하는 바는 이런 "체제"론에 더 가까운 것도 같은데요.
그 동안 인류학에서는 야만과 문명 혹은 primordial(요걸 어찌 번역해야 잘했달까요? 시원적? 그나마 영어단어도 철자가 틀려서 한참 해맸습니만 ^^) 과 동시대적 contemporary의 이분법적 사고의 다양한 쌍들로만 주구장창 분석을 해 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칸"에 대한 논의는 중요한 문제인데요.
언급하신 양식과 문화의 논의를 보면 칸은 이미 실재하고 어찌 넘나들고 복제되고 재생되고, 족보없는 비슷한 현상들이 생겨나고 하는 것들에만 관심을 표명하신 것 같기도 해보여서 말이지요. 좀 단순합니다만, 저도 EH Carr 의 먼지쌓인 말을 좀 빌어보자면, 역사는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의 "통방 (감옥 독방들에서 한다는)" 같은 것으로 일단 밑그림을 그리고 계시지 않는가도 싶네요.
(아 참 그 하나의 문화라고 말하실때 어떤 시원적 문화를 전제하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하나의 개별 문화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최근 라비노가 쓴 글에 보면 60년대 분자생물학과 사이버네틱스에 열광했던 인류학자들에 내재한 두가지 경향은 어떤 단자(헤겔적 일자나 개별자를 대신하는)에 대한 열광이 한편에 있고 사이버네틱스적인 의미체계의 종합성이라는데,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여서...라비노는 오늘날의 Anthropos 의 조건은 달라져서 그런 일방의 방식으로 해결이 안되니까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해는 문제화 (문제설정)을 통한 의미체계의 생산으로 나가야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의 개념은 모든 것이 불충분 하거나 넘치는 의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는 것인데. 이게 제가 여기다 이렇게 싸질러 놓을 것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제가 가지는 "칸"에 대한 관심은 사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것과 비슷한 "Partitioning"의 논리 혹은 정치에 관한 것인데요. 푸코는 그 공간적 칸나누기, 독방 수용이라는 연속된 공간에 대한 구분선을 만들어 내는 기획에서, 그 구분의 효과가 작동하는 근대성의 등록기를 발견해 냈었지요. 다른 한편에서 많은 역사가들이 이미 이야기 했듯이 사실 벤담의 기획은 반드시 성공적인 것도 아니고, 일부가 말하는 "역사도 모르는 놈이..." 할 수도 있는 것인데요.
저는 어쨌든 이 "칸"을 넘나드는 현상의 묘기나 아크로바틱한 기술들에 대해 대해서 관심을 갖는 한 문제설정 자체가 펼쳐 놓은 지형은 새로운 개념의 생산과 그것을 통한 인식론적 재편이기 보다는 서술적 기술에 관한 실용적 문제들의 어지러운 지세들로 그려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처음 글을 올렸을때 불과 3분 전에 빠진서님이 댓글을 다셨더군요. 간발의 차이로 일등을 못했네요. ^^
낙장불입님께서 하신 지적에 대해 간략한 보충을 하겠습니다.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에서는 삼신분(estates of the realm)에 의한 정치적 대의제가 프랑스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이것이 인민 대의제로 대체되었지요. 그리고 삼신분 체제의 붕괴가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구요. 이로써 유럽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계급들의 질서로 재편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인 얘기구요. 요컨대 유럽사는 신분제에서 계급제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된 주장은 조선 사회가 이와는 반대의 순서, 즉 계급으로서의 양반이 신분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계급이라는 말이건 신분이라는 말이건 조선 사회의 특수한 현실을 지칭하기 위해 우리 역사학자들이 새로이 고안한 용어가 아닌 이상, (물론 서양사나 한국사나 공히 과문한) 제가 볼 때 서양사와 정반대의 진행 과정을 시사하는 저러한 주장은 솔직히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주장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제 얘기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회관계의 본성이 '정치적인' 사회가 '경제적인' 사회로 단절적인 이행을 했다는 도식을 함축하고 또 이에 수긍하는 식으로 전달된 것 같아 유감이긴 합니다만, 뭐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적하고자 했던 바는 class나 estate라는 용어가 시사하는 역사성에 주목하자는 것이었고, estate가 지시하는 바는 (직접적이었건 대표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이었건) 정부, 혹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한 집단들이기 때문에 (분명 그들이 사회에서 담당했던 역할, 의무와 권리 등에 주목해야 하지만) 정부 및 정치 영역에서의 대의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핵심적인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정치적 (의사결정) 독점과 관직의 독점은 연관되었지만 논리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것임을 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입사했을지라도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배제될 수도 있고 또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더라도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구요. 그러한 대의 과정을 통해 여러 신역을 면제받거나 특정 혜택을 받거나 할 수도 있을 것이구요...
잘 읽었습니다. 제가 뭘 몰랐는지도(빠진서 님은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하셨습니다만) 알게 되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궁금한 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성직자-귀족-평민이라는 세 신분에서 공화정*대의제로의 이행-부르조아지의 성장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정치적) 신분제에서 (경제적) 계급제로의 이행이라는 틀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 부족한 세계사 지식으로 들이밀어본다면, 삼부제 의회라는 것은 절대왕정 하에서 일시적으로(라기에는 조금 기간이 긴 것도 같습니다만, 하여튼 절충적으로) 등장하는 체제이고, 그 기본에 있어서는 영주와 농노라는 정치적*신분제적이지만 경제적*계급적이기도 한 사회집단의 대립이라는 축이 기본적인 사회관계로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요?
대의 시스템, 발언권, 정치적 의사결정과 관련한 논점을 잡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습니다. 관직 독점과 발언권 독점을 분리해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설명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분리적인 이해를 전제로 하면서, 그 발언권을 키우기 위해서 관직에 진출하고 이를 독점하기 위해 사투(대외적으로든, 자아 내적으로든)를 벌이는 과정이 전개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 한 가지 궁금했고 그래서 '분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또다른 편향을 낳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러한 분리와 관련하여 뭔가 다른 흥미로운 사례나 이론적인 논점이 있다면 소개를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쁘실테니, 그냥 시간 나실 때 한 번 이야기를 들려주셔도 됩니다.
논의의 주제가 계급과 신분입니까?
신분문제는 굉장히 예민하고 어려운 문제라서 정리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일단 저는 계급이 신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좁은 의미의 계급을 신분에서 인격적 관계를 제거해 버린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일단 그 논의는 접어두고, 아직 부족해서 말하기는 뭐하지만, 제가 정리하고 상상하는 바에 따라서 조선의 신분변천사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단 조선시대를 계급=>신분으로 이행하였다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의 신분에서 또 다른 신분으로 그리고 또 다시 또 다른 신분으로 이행해 나갔다고 정리하는 사람이 가장 최근의 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듯합니다.
조선의 성립은 대체로 고려의 귀족층을 이어받아서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지방의 호족세력이 강하여 중앙집권을 이룩하지 못하였고 모든 군현에 관리를 파견하는 것도 불가능하였습니다. 조선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과는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우선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당수의 지역은 지역세력이 산성을 가지고 있어서 지방세력이 군웅할거도 가능했던 것 같고, 일정부분 정치적 군사적 자치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권력기반은 농장과 자신에게 귀속된 사병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역사학 지리학 민속학에서 몇몇 연구가 나와있습니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서 초기 조선의 왕 중에서는 강력한 전제권력을 휘두르는 태조나 세조 같은 사람도 나타났지요.
차차 새로운 세력, 곧 중앙에서 관직을 하고 중앙권력을 등에 업고 지방으로 낙향하여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들이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발휘한 임진왜란 이후입니다. 임진왜란는 조선과 왜국과의 싸움이 아니라,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 몸을 던진 지방의 리더와 왜군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조선의 왕은 북으로북으로 도망갔고, 조선민중은 왕을 보고 열받아서 경복궁을 태워버렸습니다. 이때부터 힘없는 조선군주의 역사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조선은 구해지고 조선은 자신의 기반이 왕과 군대가 아니라 바로 조선을 구해낸 '양반층'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부터 양반에게 군역면제와 각종 면제라는 특권이 부여되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의 상층계급은 국가조세에 저항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특권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제 향약과 주자가례와 국가적 특권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의 기반이기도 하면서 또 국가(왕권)에 약화시키는 세력이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국가가 한 왕조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선은 절대황권인 중국과는 달랐습니다. 17세기 이후로 가장 왕권이 강했던 영조조차도 절대왕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또 세력을 점차 늘려나간 재지사족층은 직접적으로 토지를 경영하고 생산하는 계급이라는 점에서 소비계급인 유럽의 귀족이나 일본의 사무라이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들의 경영방식은 인격적 예속을 기반으로 한 노예경영제에서 토지소유에 기반한 병작제로 발전해 나갔지만, 토지소유만으로 향촌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 '양반'이라는 계급은 도시에 거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시골에 거주하면서 하층계급과 인격적 유대를 공공히 하였고, 국가에 대해서는 자신의 특권(때로는 지역민의 특권)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 공적을 들추어내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하여, 면세특권을 얻어내었습니다. 또 이렇게 얻어낸 특권은 지역에서 경제적으로는 부를 축적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 이 시기 양반들은 이 특권이 자신의 타고난 신분에 대해서 받는 응당한 권리가 아니라, 자신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였고 유교적 원리를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받아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기론, 동물성이원론 등등과 같이 상당히 난해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이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면서, 이 같은 양반과 다른 새로운 계층이 부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직을 독점하고 도시에 거주하며 생산을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층... 아직 정립된 말은 없지만 '경화사족(아마도)'이라는 '계급'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의 생산기반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한 듯합니다만, 대체로 기존의 토지소유와 인신예속과는 달리 상권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상권이라고 해서 직접적으로 자신이 상업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독점권을 부여하는 특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짐작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이 일제시기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했는지도 아직까지 뚜렷하게 연구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아는 것은 대체로 여기까지 입니다. 그다지 믿을 만한 정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제가 읽은 것을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지역별로 가문별로 연구하고 종합하면 더 풍부한 연구결과가 나올걸로 생각됩니다. 현재 그러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니 아마도 조선의 '계급'에 대한 보다 명확한 상이 그려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여하튼 지금 제 생각으로는 조선을 서구와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 우리가 조선에 대해서 아는 바도 적을 뿐더러 서구유럽(유럽도 나라가 많을 뿐더라)에 대해서도 최근에 이르는 구체적인 연구성과를 담지하고 있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습니다.
아는 내용을 매우 읽기 쉬운 평이하고 흥미로운 문장들로 풀어내는 데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신 점을 느낄 수 있었고, 제가 잘 아는 어떤 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일단 들었던 생각은, 설명체계 내에서 '경화사족'이 다소 '난데없이'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조선전기에 '재지사족'을 기성의 것으로 설정하고, 임란 후 이들의 '전면으로의 부상' 혹은 '발언권 강화'로 설정하며, 다시 경화사족의 등장시기를 '조선후기'로 규정한 데에 따른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틀에서는 맞는 것으로 보이지만, 세부적인 시기설정이나 그 시기마다의 단계적(이라는 표현이 좋지 않은 표현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하여튼 그 국면마다의 고유한) 성격이 세밀하게 드러나지 않거나 착종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가령 재지사족과 경화사족은 '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같은 시기인가? 이들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역사과정에서 임란의 비중이 너무 크게 해석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임란 이후 왕조가 사족에 지배의 근거-랄지, 하여튼 기반-를 의존하게 되었다는 설명도 너무 일방적이지 않은가 등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유의 날렵하고 섬세한 안목과 문장으로, 논의의 전망이랄지, 나아갈 방향이랄지, 어떤 과제랄지, 그런 것들에 대한 지적도 해주셨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저처럼 젊은 공부하는 이들에게 빛을 주셔야죠..
한달 전 쯤인가 저는 비대한 개념들을 제시하며 이것으로 글짓기를 해달라는 부담을 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저의 글짓기의 일부를 공개해 올렸습니다. 저는 그 이후 그 글짓기가 너무 맥락이 없다고 생각하여 여러 학자들의 글을 읽고 정리하여 보충하고자 하였고 조금 전에 그전보다는 여러 모로 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글을 완성하였습니다. 여러 현자들 께서 한번 읽어보시고 난장질을 해주시면 저로서는 너무나 큰 영광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5.1. 사족의 특권에 관한 기존 논의의 검토
1980년대 말 동구권의 급격한 몰락 이후 조선의 총체적인 사회 성격을 묻는 물음들은 공식적인 논의의 장에서 극히 자제되어 왔다. 이는 총체적인 사회성격에 대한 논의가 주로 맑시즘에 기반한 거시적 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대안으로 대두된 미시사, 생활사 등 신문화사(新文化史)는 시각의 전환을 통하여 기존의 역사 연구로부터 급격히 연구의 방향을 돌려놓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와 같이 현실세계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연구 시각의 빠른 변화는 우리를 여전히 당황스럽게 하고 있지만, 조선사회의 성격에 관한 지난 세기의 지적 유산들이 우리에게 여전히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 자산을 거울삼아 그 속에서 사족의 특권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였는가하는 문제를 비추어 보고자 한다.
그 동안 조선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로서 ‘계급’․‘신분’․‘특권’․‘지배’․‘국가’․‘경영’․‘문화’ 등의 개념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들 중 어떠한 것에 강조점을 두었느냐, 혹은 각 개념들이 어떠한 이론적 층위에서 결합되었느냐에 따라 조선은 각기 다른 풍경으로 비추어졌다.
‘계급’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조선 사회를 바라보던 근대적인 눈이었다. 계급을 통해 바라 본 조선사회의 풍경은 비교적 선명해 보였다. 지주는 생산 수단인 농지를 사유하고 노예[혹은 농노]적 성격의 작인(作人)을 사역하여 노동의 결과 생산된 잉여 생산물을 소유하였다. 이때 토지의 소유는 잉여 생산물을 분배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따라서 지주의 소유권은 분배, 혹은 지배의 근거가 되었으므로 여기에는 더 이상 특권이라는 개념이 개입할 틈은 없었다.
위의 논리에 따르면 지주와 노예[혹은 농노] 간에 형성된 생산 관계는 사회적 지배관계와 표리를 이룬다. 그런데 논리적 수순을 따질 때 이 두 가지 관계 중 어느 쪽이 선행되었느냐에 따라 그 이론적 지평에 드러난 조선은 풍경을 달리하였다. 생산관계를 우위로 할 때, 생산관계가 곧바로 사회적 지배 관계로 전환된다는 논리로 설명되어졌다. 따라서 지주는 작인을 경제적으로 지배하였고 그러한 경제적 지배는 사회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로 이어졌다.
그런데 조선후기 사회에서 ‘경제적 관계[소유권에 의거한 생산관계]=사회적 관계[신분제에 의거한 지배 관계]’의 논법이 반드시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실증이 제기된 바 있다. 이것은 조선이 계급과 신분의 이중적 잣대에 의해 움직였던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와 같이 신분은 조선의 풍경을 더욱 심하게 굴절시키는 프리즘과 같았다.
‘신분’은 특히 이성무가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였다. 그는 신분에 관해 “혈연․직업․거주지․토지소유관계 등에 의하여 구별되어 계속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동권(同權)적 집단”이라고 한 한우근의 정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양반층이 고려시대에는 양인 신분층에 속하는 한 계층에서 출발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많은 특권을 가진 최고 지배신분층으로 변모하기까지의 과정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특권’이란 양반관료층이 지배신분층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지표였다. 그렇다면 이성무가 지목한 특권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는 양반의 특권으로 ⅰ) ‘양반의 관계(官界)에서의 지위’, ⅱ) ‘군역 복무의 특권’, ⅲ) ‘토지 소유 및 토지 경영에 있어서의 특권’, ⅳ) ‘형사상의 특권’을 꼽고 있다.
위의 특권들 중 정치권력의 독점은 첫 번째 요소였다. 군역복무의 특권이나 형사상의 특권은 이 같은 정치적 독점의 결과 취득된 것이며, 토지 소유와 경영에서의 특권조차도 정치적 특권의 결과 성취된 경제적인 수확물이나 그 기반이 되는 특권인 셈이다.
이와 같이 이성무에게 양반의 관직 독점은 양반 신분층 형성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므로, 그가 이 같은 신분제론을 제시한 이후 양반의 관직 독점 여부는 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여겨졌다. 한영우 등은 사족신분 이외의 신분층이 입사(入仕)한 사례를 들어 이성무의 신분제 개념을 반박하였고, 이것은 곧 15세기 신분제 논쟁으로 이어졌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6세기 이후 향촌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재지 사족층은 이러한 15세기의 양반관료층과는 구별하여 이해하여야 한다는 입장은 오늘날 매우 일반적인 견해로 정착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재지 사족층은 고려시대부터 재지적(혹은 토호적) 세력으로 성장하다가 특히 16세기 이후 농장의 확대, 향안의 작성, 향약․동계의 시행, 서원 건립, 성리학적 지식의 습득 등 사회 운동의 결과로서 지배적 신분층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재지 사족이란 개념 자체가 중앙의 양반관료층과의 분리를 전제로 하였던 만큼, 중앙권력에 의지하지 않은 고유한 지배형식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사족 신분이 타 신분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지배라는 관점은 양반 신분층을 이해하는 전제 조건이 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지배라는 관점을 염두에 둘 때 ‘벼슬을 얻지 못한 재지 사족들은 어떻게 다른 신분의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의당한 질문이었다.
이와 같이 ‘지배’는 재지 사족층의 성격에 관한 논의에서 중심 개념이자 입증되어야 할 과제로 등장하였다. 향촌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시켰던 이른 바 향촌사가들은 이 지배의 개념을 재지사족의 권력을 설정하는 작업을 통해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사족의 지배권은 향권(鄕權)으로 개념화되었고 사족의 향촌 지배에 대한 탐구는 주로 이 개념을 중심으로 조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향권은 어떠한 성격의 권력으로 설정되었던 것일까? 김인걸은 향권에 대해 조권(朝權), 관권(官權)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그에게 향권은 애초에 유향소의 운영권이었으나 16․17세기에 이르러서는 향촌의 지배기구 운영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족이 이민(吏民)을 지배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향권에 관한 정의는 대부분의 향촌사회사 연구자들이 공유하였던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을 바탕으로 재지사족의 지배권을 실증하고자 하였던 일련의 연구들이 이어졌다. 이 연구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중앙권력의 지배권과 마찬가지로 향촌 지배의 주체인 재지 사족이 그 지배 대상인 향촌[혹은 촌락]을 어떻게 지배할 수 있었는가하는 논의에 초점을 두었다.
향촌사가들은 향권의 실체를 향안(鄕案)과 향약(鄕約)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 중 향안에 대해서는 김현영의 실증적인 연구가 주목된다. 그는 향안을 “그 지역의 사족임을 증명해 주는 명부”로서, 향안의 입록(入錄)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과 “군역 면제의 한 전제조건”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향안은 그 기능 중 하나인 과거의 응시 자격인 명부로서의 기능은 현실적으로 발휘되기 힘들었고 그 주된 기능은 군역의 면제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향안에 입록된 결과 취득할 수 있는 특권인 군역 면제나 과거 응시 자격 등은 사족이 국가가 부여한 신분관념에 대응한 것이었다. 더욱이 후대에 서얼이나 평민까지도 향안에 들어가는 매향(賣鄕)이 가능하였다는 것은 향안이 갖는 지배적 도구로서의 성격을 더욱 모호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17세기 이후의 향안은 향촌 내의 지배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작성된 자료라기보다는 향촌에서 국가의 신분 관념인 반상제적 질서에 대응하여 사족의 범주를 확정짓기 위하여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배의 문제에 관한 한 정진영은 매우 일관된 문제의식을 견지하였다. 그는 앞서의 논자들과 마찬가지로 향안은 물론 특히 향약에 주목하여 사족의 향촌 지배를 실증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가 16세기 예안향약에 대해 실증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오히려 그가 갖는 애초의 의도를 뒤엎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다.
그 결과에 따르면 “사족 이하의 신분층에 대한 통제는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이 결론은 향약이 16-17세기 사족의 상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담보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동계(洞契)가 노비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지적한 또 다른 그의 지적과는 대조적이다.
18세기 이후 사족의 지배권에 대한 정진영의 설명은 더욱 모호하였다. 당시 사족들은 향론의 분열로 향권을 상실하였고 그 결과 지배권의 범위를 촌락으로 좁혔다. 이때 촌락 농민들에 대한 사족의 지배 수단은 교화권과 부세운영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제시된 교화권이나 부세운영권은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교화라는 것은 사족 자신에 대한 도덕적 규제를 통한 솔선수범을 주 내용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교화는 권력이 아닌 권위에 의존한 도덕적 감화와 같은 류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농민은 상민과 노비를 구별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교화 방식에 대해 정진영은 사족들이 자기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양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교화방식은 사족이 노비에게까지 그러했는지가 일단 의문이다. 그의 논증을 위해서는 직접적 예속 관계에 있던 노비에게 최소한의 양보가 왜 필요하였는지가 설명되어야 할 것이고, 상민에 대한 교화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교화방식을 취한 것은 오히려 상민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지배권의 행사가 용이치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부세운영권 역시 부세 행정에서의 운영권으로서 위에서의 이른바 향권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겠지만, 상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 권력으로서의 의미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배방식은 정진영의 지적대로 “최소한의 양보”가 아니라 재지사족이 농민에 취한 최대한의 적극적인 대응방식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향권을 중심으로 향촌 사회를 설명하려 하였던 연구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재지사족들의 지배권이 관권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향촌을 중앙권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독립적인 사회공간으로 설정하려 하였다. 이는 이들 연구자들이 관권조차도 중앙권력과 독자적인 권력으로 보는 것은 물론 재지 사족 권력의 독자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향촌 고립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와 같은 이론적 전제에서는 국가로부터 부여된 특권이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김성우는 이와는 달리 재지사족의 지배권을 ‘국가’가 재지 사족에 대해 부여한 특권이 결정적인 조건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는 국가적 신분규범에 입각하여 15세기를 양천제가 지배하는 시대로, 16세기 이후를 양천제가 붕괴되면서 재지 사족층이 성장하는 시기로, 17세기를 양천제를 대신하여 반상제가 확립되어 상민을 지배하는 시기로, 18세기 이후를 국가가 다시 재지사족층에게 간섭하는 시기로 정리하였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재지 사족층은 16세기 이후 자신의 사회적 세력을 넓혀가면서 중앙정부로부터 토호적인 성향에 주목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당해 의병 활동 등에 의해 국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냈다고 한다. 17세기이후로는 국가로부터 사족에게 부여된 특권에 의해 사족의 향촌 지배권은 확실한 법적 장치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사족들의 법제적인 특권으로는 ⅰ)전가사변형(全家徙邊刑)․체형(體刑)의 면제, ⅱ) 군역 면제를 꼽았다. 이 같은 반상제(班常制)는 국가가 사족의 성장에 대해 대응한 결과 나타난 것이면서 사족이 지배층으로 확립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김성우는 재지사족층을 고립된 향촌으로부터 벗어나서 훨씬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국가가 재지사족층에 끼쳤던 영향력을 환기시켰다. 이때 국가가 재지사족층에게 부여한 특권은 재지사족층이 향촌에서 지배층으로 확립될 수 있는 사회적 근거가 되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양천제에서 반상제로 국가적 신분규범이 바뀌게 됨에 따라 그로 인해 나타난 재지사족의 존재 방식의 변화를 지적하였던 것은 학문적 성과로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그가 제기한 재지사족의 이와 같은 특권은 이성무가 제시한 양반관료층의 특권과는 질적인 차이가 난다. 이성무가 제시한 특권 개념은 정치적 지배권을 전제로 한 특권이었다는 점에서 지배 권력과 표리를 이룬다. 반면, 김성우가 규정한 특권은 그 자체로는 지배를 담보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데 특색이 있다.
따라서 재지사족에게 부여된 특권은 사실상 국가로부터 얻은 혜택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특권을 부여해야 할 사족층의 범주가 문제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로부터 국가의 사족에 대한 신분규범이 매우 중시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특권이 지배를 상정하지 않은 특혜였다는 반증일 수 있다. 김성우는 이러한 특권을 통해 재지 사족이 국가의 국역체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신분이 됨으로써 지배신분층으로 확립되었다고 주장하였지만, 위와 같은 국역체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특권만으로는 사족층이 향촌에서 행사했던 지배권을 설명하기에 무리가 있다.
이 같은 연구 성과를 검토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지배는 피지배와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피지배 쪽의 실상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배 양태만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지배관계를 해명하는 데 균형있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이다. 따라서 피지배층으로 상정된 작인인 상민과 노비의 지배에 대한 대응양상이 해명되지 않는 한, 지배의 방식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15세기 양천제로부터 17세기 반상제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사족의 지배 방식은 특히 문제될 수 있다. 여기서의 지배방식은 상민의 사회적 존재 방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족이 양천제인 현실적 양상인 노비제를 통하여 관철시키고자 하였던 지배양상을 반상제의 그것과 동일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천제는 사족이 노비의 육체를 소유하여 지배함으로써 그를 직접적으로 예속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농장경영의 현실적 효용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16세기 농장의 확대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양천제의 붕괴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 재지 사족의 입장에서 보면 양천제가 가지고 있는 제도적인 맹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양천제는 생산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15세기로부터 16세기로 이행되는 신분제의 변동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반상제가 갖는 신분제로서의 의미는 여전히 모호하였다. 상민(常民)이 사회에서 누리는 법적 지위는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족과 상민 사이에서 벌어진 송사에서 재판권은 법리와 사회적 상식[이륜(彛倫)]에 입각하여 공정성을 확보하는 데 이상이 있었다. 더욱이 그러한 공정성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었다고 보는 박병호의 연구는 이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상민의 사유권에 있어서도 상민은 물론 노비에게까지 소유권이 보장되고 있는 체제였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상민은 소유권과 송사에서의 평등권을 기반으로 한 법적 권한에 있어서 사족과 구분되지 않는 뚜렷한 자기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양천제는 노비를 노비의 생사여탈이 가능할 정도의 권력를 통하여 노비를 노동에 예속시킬 수 있는 폭력적인 강제를 허용하고 있었다. 반면, 반상제의 경우는 이념적으로 반상의 구분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법적인 면에서 상민은 사족과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의 지배 방식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양천제에서 행해졌던 폭력적인 강제성을 반상제가 담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확실히 양반과 상민 사이에 가로놓여진 신분적 구분은 양반과 노비 사이에 가로놓여진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한편 ‘경영’의 관점에서 본 농민의 모습은 더욱 생생하게 부각되었다. 경영은 소유와는 다른 이론적 지층에 속해 있었다. 소유 이론은 그 이론적 귀결이 분배에 쏠리기 마련이다. 소유이론은 결국 분배를 위한 투쟁을 위해 설정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영은 소유와는 달리 일단 경영주체의 의지를 강조한다. 상식적으로 경영을 한다는 것은 경영의 결과 얻어지는 이익을 고려한 행위이다. 경영이 역사적 개념으로 도입되는 한 그 속에서 경영주체는 창조적 행위를 관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가령 조선시대의 농업경영만 하더라도 경영주체 혹은 경영대상에 따라 양반경영, 토호경영, 종가경영, 부농경영, 서민지주경영, 소농경영 등 다양한 형태의 경영이 소개된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경영들이 역사적 개념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영주체가 경영의 의지를 생성시킬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이 가능하였는가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경영은 경영의 결과 발생된 잉여생산물에 대하여 법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자신의 몫을 보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는 경영 의지가 생산수단의 소유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생산물의 분배에서 자신의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적 보장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재지사족의 농업경영에 대한 이태진의 연구는 이 점에서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연구를 통해 16세기 사족들은 향촌에 거주하면서 경영을 통해 농업에 직접 참여하는 생산계층으로서 조명 받았다. 이러한 재지사족은 도시에 거주하였던 소비계급인 중앙 양반관료는 물론 일본의 사무라이, 유럽의 귀족과도 성격을 달리 하였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후 김건태는 사회 내부의 관계를 반영한 고문서나 일기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매우 미시적인 관찰의 지점에서 사족의 농업경영 방식이 특히 17세기 이후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해명하였다. 그는 16세기 노비제로부터 17세기이후 병작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작개제(作价制)에 주목하여 재지 사족의 농업경영이 매우 능동적인 성격의 것이었음을 입증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족경영의 과정을 추적하면서 노비에 기반한 농업 경영이 노비의 태업 (怠業) 등으로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자 17세기 이후 재지 사족은 작인의 소농경영(小農經營)을 바탕으로 한 병작제(倂作制)로 농업경영 방식을 전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병작제는 지주가 자신의 소유지를 매개로 작인과 맺는 계약방식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 과정에서는 별다른 경제외적 강제를 필요치 않았다.
이와 같이 강제를 느슨하게 하였던 것은 오히려 병작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병작제 아래에서 맺는 지주와 작인 간의 관계가 신분제적인 긴박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작인으로 하여금 자발적 노동 혹은 경영 의지를 고취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소농경영이란 개념이 대농, 중농 등과 대비하여 단지 농지의 단위나 참여하는 인력의 수에 의한 구분에 의한 것 뿐 아니라, 경영주체인 소농의 노동의지와 관련지어 이해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노예나 노비의 작업규모를 두고 ‘소농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소농경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경영의 상식적인 뜻과는 거리가 있다.
병작제는 지주경영의 한 형태이며 그 하부에는 다시 소농 경영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의 설명대로라고 한다면 노비제[작개제를 포함] 보다는 병작제를 택하였던 지주의 선택은 작인의 소농경영이 노비제에서의 경영 방식 보다는 비교적 안정되었다는 전제에서라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소농경영의 존재 방식을 해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론적 과제로 남았다.
이영훈은 이와 같이 중요한 현안이었던 소농경영에 집중적인 관심을 표명하였다. 무엇보다 그의 의도는 부농형 경영 등에 기반한 자본주의 맹아론에 의의를 제기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가 소농경영을 중심으로 펼쳐낸 조선의 풍경에서 사족은 미미한 인상만을 남겼을 뿐이다. 사족이나 작인 모두 국가의 수취 대상으로 표현되는 호(戶)로서 표현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에 의하면 양반지주는 주호로 그의 예속농인 작인은 협호로 표현되었다. 호가 국가적 수취단위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가 호를 강조하였던 까닭은 조선의 역사상을 국가적 시각에서 재편하려하였던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사회를 매우 낯설게 보이게 하였다.
이영훈이 국가적 시각을 강조하였던 이론적 전제는 국가가 지주로서 소유권의 상위에 위치해 있고 다시 그 하부에 지주가 소유권을 갖는 이른바 중층적 소유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을 수용한 결과였다. 여기서 국가는 농지의 소유와 농민의 인신 지배를 통해 농민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에서 상당부분 세와 공납, 역의 명목으로 자신의 몫으로 수취할 수 있는 수탈적인 수조권을 가지고 있다고 설정되었다.
그는 이 같은 중층적 소유구조 아래에서 다시 농업경영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는 농업경영을 주호경영과 협호경영으로 구분하고 그 실체에 있어서 이 두 경영이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전제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론적 전제와는 달리 “주호경영의 복합적 구조”나 주호의 소유구조 자체를 그의 논의에서 추방하였다. 그 대신 그는 국가적 소유와 협호의 존재방식 또는 협호경영에 과도하게 연구의 촛점을 맞추려 하였다. 그런데 그도 지적하였듯이 협호 경영은 그 자체로는 직접적으로 사료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협호의 모습은 국가의 시선에 매개되어 반영되어 있거나 주호경영[양반경영]의 복합적 구조를 통해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가 실증을 위해 동원한 방대한 자료들은 주로 양안, 호적, 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민정서 등으로 대개 국가의 시선이 강조된 자료들이었다.
양안이나 호적 등의 자료는 국가적 토지소유, 혹은 인신지배의 실상 및 관념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자료이다. 그리고 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에 수록되어 있는 계나 장계 등에 반영된 논의들은 대부분 관료들이 자신의 논지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억양이 강한 논법을 쓰고 있으므로 문제를 지적한다는 수준에서 이용할 수 있을 뿐, 그 자체로 향촌의 사정을 객관적으로 이해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따라서 국가적 시각을 반영한 자료들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이용하는 한 그로부터 도출된 사회상이 국가의 입장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국가 중심의 접근방식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 국가의 수탈성과 협호경영의 불안정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데 이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더욱이 이영훈은 협호의 개념을 매우 자의적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제시한 좁은 의미의 협호 개념은 사료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적출하고 있는 반면, 넓은 의미의 협호 개념은 논리적 논법에 의해 구성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넓은 의미의 협호 개념에 노비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 같은 협호 개념을 도출하였던 것은 이를 통해 노비와 상민을 통합하여 ‘불안정한 소농경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 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노비와 상민에게 각각 지워진 역사적 조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노동의 주체가 노비로부터 상민으로 옮아가는 역사적 전개를 무차별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다는 데에 이론적인 맹점이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노비가 경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점이 문제될 수 있다. 이것은 상민의 사회적 조건을 노비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게 하였다.
그 결과 주호경영과 협호경영의 관계는 그의 이론적 전제와는 달리 유기적으로 파악되지 못하였고, 협호는 주호경영으로부터 고립되어 국가와 지주로부터 수탈당하는 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신분의 관점에서 볼 때, 상민은 오히려 노비적 수준으로 통합되어 상민이 갖는 고유한 역사적 특성은 사상되었다. 이와 같은 협호경영의 부정은 “주호로 부터의 지대수취는 거의 없거나 상징적인 수준에 불과”한 주호경영의 부정에 봉착하게 됨으로써 결국 국가적 소유구조 안에서는 농민경영 자체가 불가능하였다는 우울한 풍경을 만들었다.
이는 조선후기 농민의 경영 의지 전체를 지나치게 가치 절하하고 국가의 수탈 구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편향된 연구시각에서 초래된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그가 강조하는 것처럼 실증적인 논증의 결과가 아니라 아마도 그의 이론적 전제로부터 도출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는 국가적 토지 소유를 일의적인 소유로 규정하고 이를 다시 경영과 접목하여 설명함으로써 경영이 소유로 귀속된 결과 도출될 수 있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수 있다. 그러나 이영훈이 김성우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위상을 환기시키는 데 큰 성과를 남겼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은 기존의 연구를 검토하면서 재지 사족의 사회적 위상은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축소하는 것 모두 편향에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17세기 이후 재지 사족은 향촌에 거주하며 지배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생산계층이라는 점에서 양반관료층과는 구별되며,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신분이라는 점에서 그 이하의 계층과는 차별되었다.
더욱이 고문서나 일기와 같이 구체적인 사회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를 통하여 재지사족은 그 중 대부분이 지대 생활자였으며 생산에 참여하는 경영의 주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노비에 의한 농장경영이 주류를 이루었던 16세기의 재지사족은 수많은 노비를 소유한 노비소유주였으나 17세기이후 병작제로 전환되면서 재지 사족이 노비소유주로서 갖는 성격은 점차 반감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병작을 운영하는 주체로서 상민과의 사회적 관계가 더욱 중시되었다.
17세기 반상제의 출현은 이후 만연된 생산관계인 병작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사족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뿐 아니라 노동 주체인 작인들의 사회적 성장에 따른 대응이라는 점에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는 국가로부터 부여된 특권에 기반한 반상제가 노비제 아래에서보다 느슨한 사회적 관계를 상정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노비제와는 달리 병작제가 경제외적 강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생산관계라고 한다면,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상민들이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에 처해 있었다면, 17세기이후 정착하기 시작한 반상제는 신분제로서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도이힐러가 “벼슬을 얻지 못한 재지사족들이 어떻게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더 자세히 연구할 과제 중의 하나”라고 제시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표명하고 않지만 17세기 이후 조선후기 사회에서 문화[혹은 이데올로기]가 갖는 의미를 천명하였던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문화’는 17-18세기 이후 지배의 문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창이었다. 도이힐러는 15-17세기에 유교문화가 사족층의 생활양식을 전환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로써 사족층이 상민층과 구별 짓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논증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문화적 구별 짓기는 국가가 부여한 특권과 마찬가지로, 지배의 조건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를 지배 그 자체로 환치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승모는 문화를 단순히 사족 내부의 유교문화에 한정시키지 않고 군현제의(郡縣祭儀)의 헤게모니와 관련하여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였다. 이 헤게모니는 중앙정부의 이데올로기와 지방의 향권이 대립된 가운데 지역마다 다양한 편차를 보이며 결정되었다는 관점을 유지하였다. 이 같은 연구 태도는 그가 향권을 바라보는 지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향권에 대해 “군․현을 단위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이권에 대한 개입 능력과 결정력”이라고 정의하면서 “기본적으로는 중앙권력의 영향력에 따라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지만 그 내에서는, 즉 내부적으로는 자치적이고 비공식적인 조직들 간의 경쟁과 그 결과에 따라 향방이 결정된다.”고 덧붙였다
정승모는 대부분의 향촌사가들과는 달리 향청을 중심으로 한 향권 개념을 수용하고 있지 않다. 그는 권력을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배권에 있다고 보고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의례로부터 발생한다는 대전제에 서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향권을 권위적 측면에서 해석한 것으로 그 같은 권위는 군현의 공식적인 의례의 장악으로 드러나며 이것이 향촌 지배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국가 이데올로기와 군현제의의 수직적 관계를 기본 전제로 두고 그 하부에서 다시 향권에 주목하였다는 것은 결국 지역 사회에서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반영한 것이다.
사족들을 포함한 재지 세력들이 국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은 국가가 향촌에 관철시키고자 하였던 이데올로기도 큰 몫을 차지하였다. 국역이 국가와 양인을 소통시키는 매개가 되었듯이 조선의 국가 이데올로기인 유교도 국가가 사족을 포함한 전 백성을 간섭하는 이데올로기였다. 그런 점에서 정승모의 연구는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국가 이데올로기가 향촌에 관통되는 역사적 추이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우리는 위에서 기존에 조선사회를 연구해 왔던 궤적을 ‘계급’․‘신분’․‘특권’․‘지배’․‘국가’․‘경영’․‘문화’ 등의 일곱 가지 개념을 통해 거칠게 검토해 보았다. 이 같은 검토를 통해 이 각각의 개념들은 모두 사회사 연구의 필수 개념이 되어야 하며 상호 연관성 있게 해석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의 본격적인 연구 주제인 특권문서인 완문에 반영된 사회현상 역시 이와 같은 개념들이 폭주하는 지점이다.
완문의 발급과 수취라는 수수관계가 일어나는 현장은 곧 ‘특권’이 발생하는 지점이 된다. 특히 완문에 규정된 특권의 내용이 사족 당자의 군역이나 잡역 면제만을 규정하고 있지 않고 그 수하인의 특혜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사족이 다른 신분층과 맺는 관계, 즉 ‘지배’와 ‘경영’을 관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따라서 완문의 발급과 수취가 이루어지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특권 혹은 지배가 발생하는 구조를 이해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문서의 발생, 전개, 소멸을 계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특권과 지배의 사회적 맥락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 이것은 정치․사회․경제적 요소 등 여러 역사적인 요인들의 상호 연관성을 해명하는 방법과는 접근법을 달리 한다. 여기서는 오히려 완문을 맥락적, 혹은 계열적으로 인식하고, 여기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틈을 사변적으로 메우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둠으로써 완문을 통해 쏘아올린 불꽃에 비추어져 명멸하는 역사상을 잠시 비추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완문은 15세기 말~ 16세기 초에 출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 완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16세기 초이고 현존물로는 16세기 말의 것이 있다. 16세기의 완문들은 사족들의 사적인 청탁에 의거하여 발급되고 있다. 이는 완문 발급의 행정체계가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재지 사족들이 향촌에서 비교적 자의적인 권리 행사가 가능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17세기에 발급된 완문의 실례는 극히 드물다. 뒤에서 소개할 17세기 초의 완문 1건을 놓고 볼 때, 이를 통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완문의 발급 행정이 체계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발급근거, 탈역자의 수 등을 명기하는 서식의 양상 등을 통해 볼 때, 그 이후의 완문에 보이는 형식적 특징들을 상당부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완문이 자의적인 발급관행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사족들의 특권이 부분적으로 제한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야 완문의 발급 절차는 비로소 체계화될 수 있었다. 특히 완문의 수취 계층은 재지 사족 뿐 아니라 여러 계층으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더욱이 18세기 후반의 일기 자료를 통해 완문의 발급행정이 체계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발급행정이 체계화되었다는 두드러진 지표로는 발급근거가 국가적 이념과 사회적 공의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의 국가가 왕조 초기부터 충․효․열의 이념을 포상(襃賞)을 통해 적극적으로 유포시켜 민의 풍속을 순치시키고자 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사실상 완문의 발급근거를 검토해 보면 이와 같은 국가적 이념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같은 이념은 사회의 신분 구분을 초월하여 어떤 특정 신분이나 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완문에서 규정한 권리들이 만민에게 평등한 특혜로서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실제 행위를 인정하기만 하면 포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완문을 발급하는 근거로서 위에 제시한 이념 이외에 한 가지 더하여진 명분으로는 학행(學行)을 꼽을 수 있다. 학행은 존현의 이념과 곧바로 상통하는 개념이다. 사실상 이 이념은 사족층만이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사족층만의 특혜를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행에 대한 특혜는 대개 학행 그 자체에 대해 특혜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학행이 있는 자의 묘소나 그를 모신 서원의 수호를 위한 제반 이권을 특혜로 규정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사족들은 대개 선영이나 서원의 수호를 명분으로 발급한 완문을 수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다.
방대한 내용의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크게 공부가 되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 많았고, 몇몇 부분은 무릎을 치며 감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너무 많은 반면 저의 공부는 너무 짧아, 논의를 살려나가기가 조금 어렵네요. 하여튼, 새로 찾아내신 점 말고도 기존의 연구사 검토로서 여러 연구서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맥락을 찾아내서 정리하신 점에서 이 자체로 대단한 노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논의의 맥락을 살리는 이야기는 조금 더 궁리한 후에 하기로 하고, 이게 지금 당장 쓰신 글이고 조만간 인쇄하실 글인 것 같아, 우선 그와 관련하여(즉 조금 실무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만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첫째로, 명문이 많은 반면 비문이나 잘못된 단어사용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급하게 쓰시느라 그리 되셨겠지만, 이건 또 쓰신 당사자는 잘 안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니, 인쇄를 하시려면 조금 교정을 보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둘째로, 연구사 검토에서 중요한 지적 중 하나가 '신분적 지배' 혹은 '계급적 지배'라고 할 때 '지배'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기존의 연구서에서 공란 처리되어 있었다는 점인 것으로 생각되는데요(가령 구별짓기는 그 자체로 지배의 양상이나 기제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 등). 그래서 찾아낸 조선후기에서의 지배의 원리랄지, 기제랄지, 핵심적인 양상이 무엇이다라는 점을 알아보기 쉽게 한 번 정리해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혹시 있었는데 제가 설렁설렁 읽느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독자 중에는 저처럼 설렁설렁 읽는 이도 있을 것이므로).
셋째, 완문의 성격과 관련하여, 그리고 이 글에서 검토해오신 계급, 신분, 국가, 특권 등 개념과의 관련 하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된 설명이 되어 있으나, 18세기에 대한 것은, 아마 설명할 내용이 많으셔서인 것 같습니다만, 그만큼 눈에 탁 들어오지 않는 것 같고, 그건 아마 연구사 검토에서 조명해오신 용어와 관련하여(라기보다도 그 용어들을 사용하여) 명료하게 정리하는 문장 몇 개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조금 도식적인 틀(이들 용어를 사용하는)을 만들어주시고, 이것을 완문의 내용이나 성격, 발급체계, 발급대상, 빈도 등(여기에 적으신 내용)과 관련하여 설명해주시면, 여기에서 다루신 내용들이 정말 완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드러나겠구나 하는 독자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보다 효과적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씀드리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집으로님께 질문이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조선시대에 <동물성이원론>이라는 논쟁도 있었나요? 저만 모르는 논쟁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혹시 <인물성동이론>을 잘못 표기하신건지 궁금해서요...
그러게요 그거네요. ^^ 역시 잘못된 정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