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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무도' 문제는 몇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현재의 팀블로그의 전신으로 이와 비슷한 사이트(팀블로그가 아니라 홈페이지 형식의)가 운영된 적이 있었는데, 하다 보니 일정하게 침체기가 닥쳐왔었고, 그래서 "이게 무슨 동창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잡담만 할려는 거면 그냥 안 하는 게 낫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서 위기가 증폭된 일이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유지관리목적의 그룹활동이 되지 말자는 취지는 좋았는데, 지나면서 보니 그냥 그렇게 해소되어서 사는 게 서로에게 유익할 게 하나도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다시 어떻게든 해보자 하는 것이 된 거죠(여기까지는 라구르님도 대충 짐작하시는 상황일 것 같습니다).
현재의 가장무도 상황은, 가장 중요하게는, 제 생각에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시작을 했지만, 동창회(이미 권력화한 사회적 기반 혹은 사회적 네트워크와 학술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연결될 소지가 농후한)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만든 애초의 멤버십을 상기시키는 적극적인 행위를 자제하면서 새로운 팀블로그 아래에서의 인연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하다보면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상황도 없지 않다는 거죠. 문제거리다 된다고 보면 사실 문제이기도 한데요. 잘 생각해보면 어차피 팀블로그가 지속되다보면 그 안에서도(즉 새로운 팀블로그 체제 아래에서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개인적인 여러 경험들과 그들만의 이야기꺼리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하니) 개인적인 친소관계나 관심의 공통점이랄지 학문적 혹은 정치적 입장의 공통성 내지 유사성이랄지 그런 것들에 기반을 둔 더욱 내밀한 관계라는 게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니, 그게 아주 꼭 전체적으로 틀을 유지하는데 적대적인 성격을 갖는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일단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걸 너무 조장하거나 튀는 행동들은 자제될 필요도 있겠지만요.
하여간에, 일단은, 이거 너무 까다롭게 보지 않고 넘어갔으면 하는데, 글쎄요, 이조차도 사람들과 많이 이야기해본 문제는 아니므로, 실은 파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뭐 저와 라구르님과의 가장무도 역시 또 다른 쪽에서는 '월플라워' 적인 감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문제이니(저희 둘을 다 아는 사람이라면 무도장에 좀처럼 올 생각을 먹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몸매를 가진 두 남자가 '무도'를 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희극적으로 생각되어 도저히 '월플라워'적인 감각으로 바라볼 수 없을 거 같기는 합니다만), 뭐 이런 종류의 코뮤니티라는 게 일정하게 그런 상호월플화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교류하고 소통하는 건 아닌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이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활동이 갖는 본질적으로 썰렁한 면모인 것이고, 그래서 그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죽어라고 오프라인 모임을 갖는 게 아닐까요? 이 문제도 조금 더 블로그들이 굴러가게 되면 전체적으로 한 번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점검할 문제이기는 할 것 같습니다.
라구르님의 퀴즈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댓글을 통해 라구르님이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심으로써, 아니면 적어도 칼집이라도 잡으심으로써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저희들이 맥락과 계열이라는 어휘를 가지고 토론해오던 주제와 상통하는 질문인 것으로(적어도 저에게는) 생각됩니다. 잠시 상기를 시키기 위해 인용을 하면, 여기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저는 지금 쓰고 있는 학위논문에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단 바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조금 크게 본다면 용어나 개념들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 만들어진 순간의 시공간적 구체성ㆍ특수성을 벗어나서 다른 시공간 좌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되는 것인가, 열린다면 그것은 어떠한 조건에서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라구르님이 ‘계급’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 저는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의 의해 구분된 사회집단이 아닌가요?"라고 답을 하다가 아차 했는데요. 일차적으로는 계급이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의해 구분되지 않는다는 반례가 무한대로 많기에 그러한 정의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잊고 있었던) 점을 상기했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는 ‘클래스’가 영국어가 아니라 시공간을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전제가 어디에서 싹텄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봉건제(퓨달리즘)’는 더 이상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갖는 용어로 설정되고 있지 않지요. 마치 ‘직역’을 영국사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신분’도 실은 ‘봉건제’와 결부될 수 없다면 사용하기가 껄끄러운 용어인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고, 조선의 양반을 ‘신분’이라거나 ‘신분’이 아니라거나 하면서 전개된 논쟁이 실은 모두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 같은데요. 기본적으로는 그래서 그걸(계급은 거의 완전히, 신분은 경향적으로) 쓰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껄끄러운 토론에 말려드느니 조금 더 기술적(descriptive)인 용어로 쓰고 말겠다는 생각들인 거겠지요. 인류학자들의 경우에도 한때 문화라는 말을 쓰기가 조금 껄끄러운 상황에 있었습니다만(제가 기억하기로, 이 아수라장을 구성하고 있는 멤버 중 일부는 대학원 과정 중에 확실히 ‘문화’라는 용어의 해체를 주장하는 글을 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청 깨졌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사실 한국문화인류학회 전국대회에서 발표되었던 가장 래디컬한 문제제기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요즘은 또 그냥 쓰는 분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화를 공격하기에는 다들 분석틀과 밥그릇 모두가 그와 너무 심각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계급이 떨어졌고, 신분이 거의 떨어졌고, 문화는 상당히 공허한 상태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고, 다음 순서는 국가가 또 떨어지는 순서가 되려나요? 앞으로 ‘탈국가시대’ 혹은 ‘초국경시대’라는 개념이 유행하게 되면, ‘조선은 독자적인 국가였는가?’라든가 ‘중국은 어디까지였는가?’와 같은 질문이 예비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경우 떨어질 지도 모르겠네요(인류학자이신 장정아 선생님은 이러한 입론에 대하여, 적어도 현재까지 이루어진 수준에서의 사회현상에 대하여 초국가주의 혹은 탈국경화라고 이름붙이는 담론은 성급한 것이라는 취지를 포함하는 학위논문을 작성하신 바 있습니다만).
좁게 보면,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엄밀한 맥락의 추구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던 강력한 개념들을 맞춰 떨어뜨리고 있는 상황은 학계에 두 가지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예전에는 감히 구성되거나 적용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개념을 탈시대/탈지역적으로 적용시키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거겠죠. 가령,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연암을 해체적인 지식인으로 표상하는 담론의 등장 따위가 그런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학계가 가지는 전문성이 구체적인 맥락을 엄밀하게 제시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 담보되고 따라서 아카데미를 구성하기 위해 그것을 상호 확인하려드는 경향 역시 강화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딱히 왜 그렇다는 점에 대해서는 설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양자에 대해서 모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으로 입지를 삼아왔습니다만, 이것이 기본적으로 자아분열적인 포즈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고, 그래서 위에서 적은 것과 같은 맥락/계열의 구분을 도입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생각이 꼬이는군요. 다음에 또 기회가 나면 적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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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문제가 비대해서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계급, 신분, 문화 등등의 개념들이 처음에는 어떤 특정 현상 혹은 그러한 현상들의 무리를 기술적으로건 조작적으로건 지칭하게 쓰였지만, 그러한 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자꾸 다른 문제들이 끼어들고 또 상이한 철학적 입장의 논의들이 개입하고 그러면서 사실 개념적인 혼동이 오게 된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컨데 계급이란 용어도 우리가 흔히 노동계급이니 무산계급이니 하면서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규준에 의해 쓰고는 있지만 사실 노동자들이 계급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도 지난한 투쟁의 결과이듯이 (그러니까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계급이 없는 집단(classless class)이었고 이들이 계급을 얻게 된 것 자체가 바로 역사적인 것이죠) 따라서 저러한 용어나 개념 자체에도 역사성이 있음이 망각되는 데에서도 상당히 문제가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어떤 역사성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겠죠...
라구르 님이 제기하신 문제들을 제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제기하신 용어들의 면면으로 볼 때 기본적으로 베버의 사회학 범주들이 적용되어 조선시대의 역사가 해석되다가 거기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도입되어 다시 개념적인 혼동이 생겼고 그러다 최근들어 해석학적 관점과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더 혼란이 가중된 것 같습니다만... 암튼 문제는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할 때 과연 어떤 역사성(영어로는 historicity인데 혹자는 이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해석학적 함의 때문에 historicality라는 말을 대신 쓰기도 합니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일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사실 낙장불입님이 각주에 쓰셨다고 옮겨놓은 부분에서도 우린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역사성의 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맥락을 강조하는 기어츠식의 입장은 전형적인 해석학적 입장으로서 거칠게 말하면 전통의 연속성, 문화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입장이고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보수적인, 그런 역사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계열을 내세우는 입장은 주로 아날학파나 푸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단절을 강조하고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이며, 또 역사학에 대한 입장도 과학이라기보다는 예술로 보는 경향이 은근히 드러납니다.
좀 정리를 하자면 역사가들이 역사를 쓰면서 종종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이 어떤 역사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잘 모르거나 무반성적으로 쓰면서 그런 문제가 더 복잡해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제 감입니다.
역시 작은 한가지 꼬투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푸념을 과학적인 문제로 새롭게 정리하여 주신 친절하신 낙장불입님, 그리고 적절하게 문제의 핵심을 환기시켜 주신 pajinseo님의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얻고자 하는 답들이 윤곽을 드러내는 듯 합니다. 즉 저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양반층이라고 하는 집단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글들을 보다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우선 이 계층(?)이 요즈음의 용어로 계급인지 아니면 신분에 속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기존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 용어를 혼용하여 쓰거나 혹은 매우 산만하게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의 문제라는 문제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어느 것이나 양반관료층이나 혹은 재지사족층이거나 간에 원래 지배층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던 계층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 신분층으로 변모하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배신분층이 되기 이전의 양반층을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pajinseo님이 계급이라는 용어가 역사적 성취물이라고 지적하신 것은 적절한 것 같은데, 그와 같은 성취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과 유사한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어떤 논자는 신분층이 되기 이전에 그들은 계급으로 존재하였다가 법제적 특권을 취득함으로써 신분층으로 공고화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어법이 과연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째, pajinseo의 지적에 의하면 계급은 연대성을 전제로 하여 얻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데, 연대성이 과연 조선시대에도 존재하였을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국가는 상징으로 또 문화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제 산만한 생각을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친절한 낙장불입님.
근데 기어츠를 소위 계열을 강조하는 측과 대립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요?
필자가 정의한 기어츠의 '문화'와 '계열' 간의 차이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문화가 필자의 말대로 "해석 가능한 부호들(혹은 상징)의 상호 연결된 체계"이고 ‘계열'이 "관습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제된 시공간적 구분을 넘어 특정한 역사적ㆍ문화적 사상(事象)의 지속ㆍ공유나 분화ㆍ변화를 나타내는 지표들(indicators)의 상호연결된 체계"라면, 해석가능한 부호들=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사상간에 개념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양 개념은 단지 지속과 변화를 포함하는가 포함하지 않는가를 기준으로 나누어지게 되며, 따라서 계열은 문화의 통시적 고찰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문화와 해석에서 기어츠가 '계열'과 유사한 변화를 설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리고 그‘문화’라는 용어의 해체를 주장하는 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혹시 무슨 더 다른 답변이 올라왔나 들어와 봤더니 긴 침묵이 흐르고 있더군요. 그래서 든 생각인데 이게 가면무도회가 맞다면 가면을 통해 신분을 보호받는 그런 장치라고 한다면, 애초에 라구르로 들어온 제 가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저는 저의 의무를 다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친절하신 낙장불입님과의 인간적 관계로(물론 생얼로 맺은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누군지도 모릅니다.) 시작한 이 이야기에서 제가 얻은 바를 공개함으로써 침묵을 깨고 또다른 이야기로 옮겨가야 갈 것 같아서 그 토론에서 얻은 성과를 다음과 같이 공개합니다. 역시 바라는 것은 제가 성원권이 없다고 생각지 마시고 돌을 던져 탑을 쌓아주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제가 쓰고 있는 글의 일부입니다.
조선 사회의 성격에 관한 논의는 그 동안 ‘신분’, ‘계급’, ‘국가’, ‘문화’, ‘특권’, ‘직역’ 등 인간 조건을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합의와 논쟁을 거듭하며 진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개념들 중 어떤 것이 강조되었는가, 혹은 각 개념들이 어떠한 이론적 층위에서 결합하였느냐에 따라 조선은 각기 다른 풍경으로 비추어졌다.
특권은 이와 같은 풍경을 더욱 심하게 굴절시키는 프리즘과 같았다. 사전에서는 특권을 “특정인 또는 특정의 신분이나 계급에 속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우월한 지위나 권리”로 정의하고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특권을 받기 위해서는 특정인 혹은 신분이나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특권은 신분이나 계급 등의 개념과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논의되어왔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애초에 이 논의는 특권과 신분을 연결시키는 방식에 의해 접근되었다가 이후 국가의 사족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통합되는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논점의 대상이 15세기의 양반관료층에 대해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그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재지 사족층으로 시야가 확대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가령 양반층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시발을 연 이성무는 양반의 개념을 그들의 특권을 통해 접근한 바 있다. 그는 신분에 대해 한우근의 정의인 “혈연․직업․거주지․토지소유관계 등에 의하여 구별되어 계속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동권(同權)적 집단”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는 양반을 특권적인 지배 신분층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계급이 신분층으로 강화된다는 이론을 소개함으로써 양반층이 양인층에 소속된 한 계급에서 출발하여 신분층으로 강화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양반층을 고려시대에 다른 계층과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문무반에서 조선 초에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많은 특권을 가진 최고신분층으로 완성된 실체화된 신분층으로 설정하고자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성무가 양반을 지배 신분층으로 형성시킨 기반이 되었다고 지목한 특권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는 양반의 특권으로 ⅰ) ‘양반의 관계(官界)에서의 지위’, ⅱ) ‘군역복무의 특권’, ⅲ) ‘토지 소유 및 토지 경영에 있어서의 특권’, ⅳ) ‘형사상의 특권’을 지적하고 있다.
이성무가 제시한 양반의 특권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그가 제시하는 양반의 특권은 그 성격 상 정치적 독점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둘째, 군역복무의 특권이나 형사상의 특권은 정치적 독점의 결과 취득된 것이다.
셋째, 토지 소유와 토지 경영에서의 특권은 오히려 특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기반으로 이해되어야 타당하다. 따라서 이것은 특권의 영역에 포함될 수 없다.
이성무가 제시한 특권이란 사실상 관직을 독점함으로써 그로부터 발생한 제반 특혜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그가 양반 특권의 하나로서 제시한 군역 면제의 특권만 하더라도 관직을 역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대가로 받은 특혜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양반신분은 기준이 분명하다. 품관은 물론 그의 가족․친족들을 포함하여 적어도 사조(四祖)내에 현관(顯官)을 지낸 사람이 있어야만 양반층에 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성무의 논의에서 관직의 독점 여부는 그의 주장을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한영우 등은 사족층 이외의 계층이 입사(入仕)한 사례를 들어 이성무의 특권 개념을 반박하였고 이것은 곧 15세기 신분제 논쟁으로 이어졌다. 최근 김성우는 이와 같은 두 가지 대립적인 주장을 해소하는 한 방식으로 15세기 조선에서는 국가적 신분규범인 양천제와 사회 통념적 신분규범인 양반관료신분층이 동시에 존재하였다는 양시론(兩是論)적 논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리도 결국 한영우 등의 반론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16세기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신분층으로서의 재지 사족층은 위에서 언급한 15세기의 양반관료층과는 구별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은 오늘날 매우 일반적인 견해로 정착되어 왔다. 재지 사족층은 고려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재지적(혹은 토호적) 세력으로 성장하다가 특히 16세기이후 농장의 확대, 향안의 작성, 서원 건립, 향약 시행 등 자치기구의 설치와 운영, 성리학적 지식의 습득 등 일종 사회 운동의 결과로서 지배적 신분으로 형성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와 아울러 사족층에 대한 국가의 대응 방식도 중요한 한 요인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후 사족층은 자신의 사회적 세력을 넓혀가면서 결정적으로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국가는 재지 사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결과, 17세기이후로는 향촌에서 확실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배층으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17세기 초에 재지 사족층은 국가로부터 그들의 특권을 법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성우는 사족들의 법제적인 특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ⅰ) 전가사변형(全家徙邊刑)․체형(體刑)의 면제
ⅱ) 군역 면제
그런데 17세기 이후 사족들이 지배층의 특권으로 언급한 위의 규정들은 이성무가 제시한 특권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성무가 제시한 특권 개념은 정치적 지배력을 전제로 한 특권이라는 점에서 지배 권력과 특권이 표리관계를 이룬다. 따라서 그에게는 특권을 특혜와 분리하여 이해할 만큼 커다란 변별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특권을 부여하는 주체가 권력을 획득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특권은 곧 특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성우가 규정한 특권의 성격은 그 자체로는 정치적 권력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특권의 담지자가 재지 사족이라는 어휘 자체가 중앙 권력과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사실상 국가로부터 얻은 특별한 혜택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여기에서는 특권을 갖는 사족층의 범주가 문제될 수밖에 없고, 사실상 그 범주에 대한 문제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재지 사족층에 대한 정책적 논쟁점이 되었다. 한편 재지 사족층의 범주는 양반 관료층보다는 훨씬 막연한 외곽선을 그리게 됨으로써, 이 논리대로 한다면 국가가 부여하는 특혜를 지향하는 수동적인 계층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위와 같은 권리 규정만으로 사족층이 향촌에서 행사했던 지배력을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대체로 이러한 특혜들은 사족 그 자신이 받아야 할 의무를 감면받는 정도에 한정된 소극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재지 사족이 국가의 국역체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특혜를 취득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한 추상적인 설명만으로는 재지사족의 지배권 까지 설명해 주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더욱이 17세기 이후의 지주제는 16세기의 지주제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양천제는 사족이 노비를 육체적으로 지배함으로써 그를 직접적으로 예속시키는 권한을 통하여 얻어낼 수 있는 현실적 효용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16세기 농장의 확대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양천제의 붕괴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한편 재지 사족의 입장에서 보면 양천제가 가지고 있는 제도적인 맹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양천제는 생산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15세기로부터 16세기로 이행되는 신분제의 변동을 통한 사회적 과정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지된 바와 같이 17세기 이후의 농업경영 방식은 소농경영(小農經營)을 바탕으로 한 병작제(倂作制)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영방식은 지주와 작인 간의 관계가 신분제적인 긴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병작제는 노비 노동을 동원한 농장제에서 이루어지는 지주와 작인 간의 관계와는 구분된다. 병작제는 지주가 자신의 소유지를 매개로 작인과 맺는 계약방식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 과정에서는 별다른 경제외적 강제가 요구되지 않았다. 이점은 반상제의 신분제적 특성을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17세기 이후 전대보다 훨씬 느슨해진 생산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병작제가 만연되어가는 소농사회로 전환되어 가는 시점에서 하필 이때 반상제가 정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 문제는 특히 18세기이후의 사회를 더욱 불확실하고 모호한 풍경으로 만들었다. 노비를 노동에 예속시킬 수 있는 강제력을 규정하고 있는 노비제는 법적 폭력을 동반하고 있는 반면, 반상제의 경우는 이념적으로 반상의 구분을 강조하고 있지만, 법적인 면에서는 상민은 사족과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등장한다.
사족과 상민 사이에서 벌어진 송사에서 재판권자의 이상은 법리와 사회적 상식[이륜(彛倫)]에 입각하여 공정성을 확보하는 데 있었고 또 현실적으로 그러한 공정성은 그런대로 유지되었다고 본다. 상민의 소유권은 노비에게까지 소유권이 보장되고 있는 체제이므로 더 이상 언급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이와 같이 상민은 소유권과 송사에서의 평등권을 기반으로 한 법적 권한에 있어서 사족과 구분되지 않는 뚜렷한 자기 권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양천제에서 행해졌던 폭력적인 법적 강제력을 반상제가 담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확실히 양반과 상민 사이에 가로놓여진 신분적 구분은 양인과 노비 사이에 가로놓여진 그것과 같은 성격일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론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민이 법적으로 사족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족은 상민에 대한 지배권을 무엇에 통해 확보하였던 것일까? 이 지점에서 도이힐러가 “벼슬을 얻지 못한 재지사족들이 어떻게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더 자세히 연구할 과제 중의 하나”라고 제시한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재지사족을 단순히 국가에서 인정한 신분 관념의 범주에서 이해하는 정도에서 그치거나 혹은 재지 사족이 스스로를 타 계층과 구별 짓기 위한 문화적 노력에만 주목한다면, 이것만으로는 재지 사족이 향촌 사회에서 행사하였던 권력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 글에서 재지 사족의 특권에 대하여 이와 같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는 연구의 주 대상인 완문이 특혜 내지는 특권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이다. 완문의 발급과 수취라는 문서의 수수관계가 일어나는 현장은 곧 그와 같은 특혜 혹은 특권이 발생하는 지점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완문에는 그것을 둘러싸고 국가, 사족, 상민 혹은 노비로 구성된 복잡한 사회적 관계가 포진하고 있어서 그 문서의 발급과 수취가 이루어지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특권 혹은 특혜가 발생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문서의 발생, 전개, 소멸을 계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특권이 갖는 사회적 맥락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 이것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 등 여러 역사적인 요인들의 상호 연관성을 해명하는 방법과는 접근법을 달리 한다. 여기서는 오히려 완문을 맥락적, 혹은 계열적으로 인식하여 그 틈을 사변적으로 메우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둠으로써 완문을 통해 쏘아올린 불꽃에 비추어져 명멸하는 역사상을 잠시 비추어 볼 수 있을 뿐이다. 다음에서는 논점을 더욱 정밀히 가다듬기 위하여 완문의 계열적 전개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완문은 15세기 말~ 16세기 초에 출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 완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16세기 초이고 현존물로는 16세기 말의 것이 있다. 16세기의 완문들은 사족들의 사적인 청탁에 의거하여 발급되고 있다. 이는 완문 발급의 행정체계가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사족이 향촌에서 비교적 자의적인 권력 행사가 가능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7세기에 발급된 완문의 실례는 극히 드물다. 뒤에서 소개할 17세기 초의 완문 1건을 놓고 볼 때, 이를 통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완문의 발급 행정이 체계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발급근거, 탈역자의 수 등을 명기하는 서식의 양상 등을 통해 볼 때, 그 이후의 완문에 보이는 형식적 특징들을 상당부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완문이 자의적인 발급관행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사족들의 특권이 부분적으로 제한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야 완문의 발급 절차는 비로소 체계화될 수 있었다. 특히 완문의 수취 계층은 재지 사족 뿐 아니라 여러 계층으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더욱이 18세기 후반의 일기 자료를 통해 완문의 발급행정이 체계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발급행정이 체계화되었다는 두드러진 지표로는 발급근거가 국가적 이념과 사회적 공의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의 국가가 왕조 초기부터 충․효․열의 이념을 포상(襃賞)을 통해 적극적으로 유포시켜 민의 풍속을 순치시키고자 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사실상 완문의 발급근거를 검토해 보면 이와 같은 국가적 이념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같은 이념은 사회의 신분 구분을 초월하여 어떤 특정 신분이나 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완문에서 규정한 권리들이 만민에게 평등한 특혜로서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실제 행위를 인정하기만 하면 포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완문을 발급하는 근거로서 위에 제시한 이념 이외에 한 가지 더하여진 명분으로는 학행(學行)을 꼽을 수 있다. 이 학행은 존현의 이념과 곧바로 상통하는 개념이다. 사실상 이 이념은 사족층만이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사족층만의 특혜를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행에 대한 특혜는 대개 학행 그 자체에 대해 특혜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학행이 있는 자의 묘소나 그를 모신 서원의 수호를 위한 제반 이권을 특혜로 규정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사족들은 대개 선영이나 서원의 수호를 명분으로 발급한 완문을 수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때 그 이권이라는 것은 대개 선영이나 서원을 유지하기 위해 소용되는 인력의 탈역이나 토지의 사용권을 인정해 주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것은 앞서 규정된 군역이나 전가사변형이 사족 당자에 대한 특혜에 불과한 것에 비한다면, 사실상 이 같은 특혜에는 다른 계층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다시 재지사족의 특권이라는 문제로 주의를 돌려 생각하자면 사족이 국가로부터 문화적 이념을 통해 특혜를 얻어낼 수 있었고, 이를 다시 자신의 권력을 위해 특권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후기 이후 새롭게 규정된 반상제라는 국가적 신분규범과 병작제라는 새로운 소농 경영을 위주로 하는 사회적 조건에서, 사족이 지배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문화적 요소를 이용하고 있는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 댓글을 달려고 들어왔더니 라구르님께서 엄청난 분량의 댓글을 다셨군요. 일단 몇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제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계급(class)이 연대성(solidarity겠지요?)을 전제로 한다고 보지 않고, 마르크스 또한 그러한 입장이 아니라고 봅니다. 계급이라는 호칭 자체는 사회적 인지의 문제이지 결코 행위의 문제는 아닙니다. 연대성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인지되는 어떤 집단(즉 계급)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행위자이냐 아니냐 하는 게 문제가 될 때 끼어드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즉자 계급과 대자 계급을 구별했던 것은, 이러한 행위자로서, 즉 주체로서의 계급이라는 정치적 이슈를 제기하기 위해, 말하자면 그러한 정치적 희망을 언급함으로써 연대성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컨대 대자 계급만이 계급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계급이라는 용어를 산업 사회의 등장 이전의 시기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급이라는 용어가, 분명 새로운 형태의 이해관계의 출현, 즉 이해관계가 경제적인 견지에서 인식되기 시작한 시기에 등장했다는 역사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제기하고 싶은 다른 문제는, 지금 사용되고 있는 '신분'이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는 겁니다. 때로 신분은 (social) status를 의미하는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Estates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양반이라는 계급이 신분층으로 변모했다"라는 식의 서술에서 신분층은 아마 Estates의 의미로 쓴 것 같은데, 이 Estates의 문제는 정치의 영역, 그리고 그 영역에서의 대표(representation)의 문제에 대한 초점을 잃어서는 사실 별 의미없는 진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밖에도 몇 가지 논점이 더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일단 프린트를 해서 자세히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저는 신분상황(status situation)을 "명예에 대한 특수한 사회적 평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인간생활의 모든 전형적인 구성요소들"로 정의한 베버의 시각에 동조하는 편입니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양반이라도 '격'이 다르면 다른 신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격이 다른 양반끼리는 의례적인 면에서 동등한 교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경의의 표현 (고프만이 말하는 상호작용의 의례)를 주고받지도 않고, 서로 방문하거나 혼담이 오고가거나 하지 않죠.
베버에 의하면 먼저 이렇게 신분의식을 가진 집단이 자기네가 특별한 명예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고, 이를 의례적인 수준에서 관철하려고 하는데서 신분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경우에 계층화는 순전히 관습적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질서의 특정한 계층화가 '생활화'되자마자 그리고 경제력의 안정적인 배분에 의해 그것이 안정되자마자 합법적 특권으로의 길이 쉽사리 트인다"고 베버는 덧붙입니다. (막스베버선집 (거스와 밀즈 편집) 중 "계급, 신분, 정당" 참조)
조선시대 양반의 경우 먼저 신분의식, 그리고 의례적이고 관습적인 수준에서의 차별화가 이루어진 후, 국가를 통해서 이것을 합법적으로 특권화하는 과정이 이어진 게 아닐까요?
덧붙이자면, 조선시대에는 의례와 법의 관계가 오늘날과 같지 않았지요. 경국대전, 속대전 같은 법전은 의례적인 질서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내용이 채워져 있었구요. 말하자면 신분사회와 신분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차이라고 할까요. 신분사회에서의 법은 신분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의 법과 위상학적으로(topologically) 다릅니다.
위상학적 차이라... 정말 적절한 표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