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지 조선 삼그루판의 농학과 농속: 환경, 기술, 이념의 역사인류학"은 지금 쓰고 있는 학위논문의 제목(물론 가제지요)입니다. 그 제1장이 서론인데, 서론은 '문제의 제기'라고 이름을 붙인 절로 시작을 합니다. 그 초고를 썼는데, 인용이나 각주가 붙거나 하는 학술적인 형식도 아니고, 내용도 까다로운 성격의 것이 아니라 평이하게 문제의식을 설명하는 것인데다가, 이 블로그에서 다루는 내용들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여 여기에 옮깁니다. 혹시 아수라장 사람들과 방문자들로부터 좋은 코멘트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아 있구요. 본래는 문단들 사이가 그냥 줄바꿈으로 넘어가지만, 인터넷 환경에서는 그게 너무 빡빡하게 보이는 듯 하여, 한 줄씩 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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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제기
구월리(현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전자울 마을의 앞들은 일제시기부터 거의 전부가 논이어서 밭은 산 둘레에 조금 있는 정도였다. 당시 모내기의 적기는 양력 6월 초순으로 보았으며 이를 ‘조양[早移秧]’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논들이 모두 천수답(天水畓)이라 비가 와야 이앙할 수 있었기에 ‘조양’이 드물었다. 6월말에 들어서 이앙하면 ‘마냥[晩移秧]’이라고 하였다.
한편 구월리에서 동남동으로 8㎞ 쯤 떨어진 도창리(현 시흥시 도창동)는 일제시기에 이미 수리조합구역이어서 물걱정을 하지 않았다. 해마다 제 때 모내기를 해서, 구월리와는 근 한 달 차이가 날 때도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가 늦어지면 전자울 사람들은 도창리로 ‘모품’을 팔러갔다. 여남은 명씩 몰려가 도두머리 김동식씨댁 사랑에서 자면서 모를 심었다.
어떤 때는 20일씩 ‘모품’을 팔고 돌아와도 아직 전자울에서는 모내기를 시작도 못했었다. ‘마냥비’도 오지 않으면, 이미 키가 한 자 가량으로 말뚝처럼 자란 모를 뜯어 호미로 논바닥을 파고 꽂아 나가는 ‘말뚝모’를 냈다. ‘말뚝모’로 꽂아도 “아다리가 맞아서” 수일 내로 비가 오면 제대로 자라는데, 그러면 쌀 두 가마를 걷는 논에서 한 가마가 조금 넘는 수확을 올렸다.
“6ㆍ25 나던 해도 가물어서 모를 심지 못하고 있는데 전쟁이 터졌어. 25일 새벽에 북쪽에서 번쩍번쩍 했는데, 옛날 노인네들이 마른번개 치는 건 줄 알고 비가 올 거라고 얘기들을 하셨거든. 그런데 실제로 26일인가 27일인가 비가 오기 시작해서 옛날 노인네들 얘기가 틀린 게 없다고들 하고 그랬다구(윤길용. 남. 1931년생.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농사는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 상대하는 바인 자연환경의 속성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 파악한 바에 부합하는 농업기술을 고안ㆍ도입하여 구현하며, 그 구현에 의해 검증된 바를 지식으로 축적ㆍ전승하는 일이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농가나 농촌을 찾아 농사에 대해 배우기를 청하고 문답을 이어가노라면, 결국 모든 원리는 해당 농가ㆍ농촌이 자리한 지역이나 특정 논밭의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배우기를 청하는 자의 성향이 문답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규정하는 힘의 위력이 그와 같지 않았다면 문답의 전개를 유도하는 일은 진작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노련한 농사꾼으로부터 농사기술과 자연환경의 관련성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큰 깨달음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감탄을 하거나 저도 몰래 눈물이 맺힐 만큼 기쁨에 젖는 일이 있다. 또 당장은 이해가 덜 되거나 아예 알아들을 수 없었더라도, 문답을 마치고 돌아와 내용을 곱씹고 관련 자료를 찾다보면, 비로소 각 설명들이 제 자리를 찾고 제 짝을 만나 일관된 논리적 형태로 연결이 되기도 한다. 고백하건대, 그 사실을 주위의 누군가에게든 자랑하고 싶은 나머지, 들어줄 이가 없는 줄 알면서도 괴성을 지르거나 일부러 큰 소리로 웃어본 일도 있었다.
반면 자연환경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고 농사와 농사꾼, 그들의 마을, 지역, 나라가 지나온 궤적을 논하는 일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거개가 논의대상에 대한 파편적일 뿐만 아니라 주(主)와 부(副)를 혼동하는 이해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농사꾼을 시대착오적인 정치인이자 덜 떨어진 경제인으로, 어딘지 엉성한 사회인이면서 조금 모자란 문화인으로 표상하는 입론에 길을 터주게 된다. 상세한 논의는 뒤에서 다시 이를 기회가 있겠지만, 이 점은 농사 혹은 농업을 전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제 학문분과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 다소 논의의 범위를 벗어난 진술로까지 나아간다면, 농업을 비효율적인 산업부문으로 낙인찍은 현하의 사회적인 인식 역시, 농사가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을 상대하는 일이라는 점을 재인식함으로써 교정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요는 자연환경을 그저 배경적인 지식으로서 사고(思考) 혹은 기술(記述)의 서두에서 형식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자하는 바의 사회역사적인 쟁점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독립적인 힘으로서, 그 규정력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련한 농사꾼들의 경험담은, 이미 시대사조의 대세가 된 바, 자연과 사회에 대한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설명력의 모범을, 그리고 자연과 사회가 공생하는 방식에 대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자연환경은 지역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무쌍하며 예측 불가능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때로 뭍과 물의 경계라는 인식을 조롱하듯 엄청난 비를 퍼붓고, 또 때로 세상의 모든 물기를 말려버리려는 듯 끝 모르는 가뭄이 이어진다. 때로 계란만한 우박덩어리가 휩쓸고 지나가며 애써 가꾼 농작물과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을 걸레짝으로 만들고, 또 때로 봄이나 가을 심지어 여름의 서리로 들과 길을 무대로 삼는 생명체들의 숨통을 끊어놓기도 한다. 소위 자연재앙이다. 이 중 어떤 것들은 진정 유례없는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역사상 혹은 전설상의 독창적인 사건이 되지만, 그 역시 두 번째 되풀이될 때부터는 이미 참조의 지점을 갖는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삶의 패턴의 한 부분이 되어, 재앙으로서의 성격을 잃기 시작한다. 찾아오는 빈도가 이보다 잦은 것들은 이미 재앙이 아니다. 어떤 곳은 물이 흔해서 10년에 한 번쯤 마냥, 즉 늦은 모내기를 하지만, 거기서 멀지 않은 어떤 곳은 물이 귀해서 10년에 한 번쯤 조양, 즉 이른 모내기를 한다. 열 번에 아홉 번을 마냥으로 이앙한다면 마냥은 전혀 재앙이 아니다. 열 번에 한 번을 마냥으로 이앙한다면, 마냥은 일정하게 재해로 인정되지만 재앙이나 이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공장생산에서 일정한 불량률이 시스템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에 의해 시스템의 한 부분이 되어있다고 보아야한다. 경기남부의 밭농사에서는 보리나 밀을 베고 콩이나 팥, 조 등을 심는 밭 이모작을 하며, 이를 그루갈이라고 부른다. 보통 그루갈이는 6월 중하순에 보리나 밀을 베고 바로 밭을 갈아 다음 작물을 파종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땅이 축축해야 하기 때문에 땅이 아주 말라 있으면 비를 기다리는 일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끝내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을 때 대개 듣게 되는 대답은, 비가 오지 않아서 콩을 못 심는 일은 없다, 기다리면 조금이라도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이 농사꾼들은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능한 자연현상의 오랜 관찰자이고, 누대(累代)의 가학(家學)으로 일가를 이룬 기상통계의 권위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찰과 통계가 반드시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천 구월동의 농사꾼들이 관측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쪽 하늘에 번쩍였던 빛은 마른번개가 아니라 전화(戰火)였다. 윤길용씨에게 그것이 마른번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 언제인지 묻지 못했다. 그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6일 혹은 27일 구월동에는 비가 왔고, 구월동의 젊은 농사꾼들은 ‘옛날 노인네들 이야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때는 이미 마른번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른번개였는지 아닌지, 그것을 언제 알았는지가 아니라, 결국 비가 왔다는 점이다. 이 비는 아무리 가물어도 6월 25일경이면 꼭 내리던 것이었으므로(<표 14> 참조), 이 해에도 결국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서 내리치는 마른번개는 가뭄의 징후이지만, 마른번개가 친다는 것은 머금은 습기가 많든 적든 구름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에, 그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비가 올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6월 25일의 마른번개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충분히 ‘곧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통계적’으로 옳은 설명이다. 6월 하순의 마른번개와 비의 관계에 대한 ‘옛날 노인네’들의 설명도, 비가 올 거라는 구월동 농사꾼들의 믿음도, 1950년 6월 25일 새벽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농속(農俗)’이 성립한다.
다시,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사람들과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자. 그 두 집단의 사이에는 삼사년에 한 번쯤 마냥모를 심는 사람들과, 또 삼사년에 한 번쯤은 아예 모내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 또 다른 곳에는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쯤 마냥으로 이앙하는 사람들과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쯤 조양으로 이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자연과 농사에 대해 갖고 있는 기술, 지식, 이념은 전혀 판이한 것일 수 있으며, 이 점이 항시 전제가 되어야 한다. 구월리와 도창리 사람들처럼, 이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교류하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서로의 사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게다가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 상의 압도적인 격차가 있다면, 그 기술, 지식, 이념의 간극은 천 길 낭떠러지만큼이나 현격하여 거의 넘어서기 불가능한 것이 된다. 사람이란 대개 타인을 아래로 보는 인식에 의해 자타에 대한 왜곡된 설명을 생산, 재생산하기 마련이다.
10년에 한 번쯤 마냥모를 내는 사람들로서는, 10년에 한 번 조양모를 내는 사람들이 가뭄에 대한 특별한 대비책도 없이 모내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체념적이고 게으른 행태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일제시기 일본인들이 조선과 조선인을 표상하는 흔한 수사(修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물이 맑고 흔한 곳에서 아무 물이나 마구 퍼마시던 사람도 물이 탁하고 귀한 곳에 가면 물 마실 일을 줄이게 되고, 또 역도 그러하듯이,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에서 20년을 살면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사람들도 폄훼와 조롱을 넘어 뭔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가 지겹다”며 그곳을 떠나 자기의 옛 터전으로 돌아가든지, “여기는 어쩔 수 없다”며 현지의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기술, 지식,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신념도 어느 정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산업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는 한, 그러는 사이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사람들이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으로 새롭게 이주하는 일도 줄어들게 된다. 10년에 한 번 마냥을 하던 방식을 10년에 한 번 조양을 하는 곳에서 관철시키는 일이 쉽지 않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성공전망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지나친 모험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견지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식민통치 35년을 바라보고자 한다.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체제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이 반드시 특정 지리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직접적으로 지배ㆍ통제ㆍ규율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제국주의에 의한 직접적인 식민통치가 비효율적인 착취ㆍ팽창체제인 점, 이 비효율적인 체제들이 역사적으로 붕괴 또는 패퇴하게 되었던 점은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그것이 불가피하고 바람직하며 일종의 성스러운 의무인 것처럼 여겨졌고, 성스러운 의무로 여겼기 때문에 진정 불가피하고 바람직한지에 대해 냉정하게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것이 하도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인 체제이고 그 비효율성을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때우는 것이다 보니, 후세의 사람들 중 일부는 이것이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본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지심으로 충분히 동정이 가지만, 그 인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특정체제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것이 착취적이고 팽창적인 체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제시기 조선에 진출해있던 일본인들 중에는 패전 후 일본에 돌아가서 ‘우리는 열심히 하려고 했다’는 인식을 갖고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조선/한국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우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시스템의 효율성의 부족을 관념적 도덕성으로 메우던 제국주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본농업이 조선농업에 비해 단위면적당 농업생산량에 있어서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 착취적인 체제의 본성은 도덕적 의무감에 바탕을 둔 ‘선의’로 둔갑하기가 쉬웠다. 이 둔갑술의 비밀은 둔갑하는 당사자들이 본성에 대해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둔갑의 결과가 실제라고 믿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제 문제는 문화적인 과정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기술적인 우위에 서있는 자들이 선의로 식민지를 규율했다는 문화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그 선의가 전쟁과 통제체제의 광기로 왜곡ㆍ변질되어 가고,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가 식민지에서 생각한 만큼의 생산력 증대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점을 이 문화적인 믿음과 관련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환경과 기술, 그리고 각종의 이념들을 하나의 세트로 엮는 식민지 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1920년대 말 일본인 중에는 조선의 천수답 논농사가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인 ‘오포튜니스트’라고 비난하고 이를 밭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하는 자가 있었다. 이 표현을 쓴 이는 수원고등농림학교의 교수였는데, 아마 모험주의(adventurism)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앞서 구월동의 윤길용씨가 “아다리가 맞아서”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 간에, 이는 조선총독부가 한창 산미증식계획에 열을 올리던 시기의 일이었고, 곧 이어 발생한 세계대공황으로 미가가 폭락하면서 산미증식계획도 중단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천수답을 밭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탄력을 받아 일정하게 정책궤도에 오르기도 하였다. 또 실제로 1990년대에 들어서면 논을 밭으로 바꾸는 사업이 도처에서 진행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는 일정하게 탁견으로 보이기도 한다. 단, 그것이 아직도 쌀 수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던 일제시기의 일이라는 점, 그리고 1990년대의 논밭형질변경은 가뭄대비책이 아니라 수입개방대비책이었다는 점을 제외했을 경우의 이야기이다. 그 전 시기에는 천수답을 밭으로 바꾸는 식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앙기(移秧期)의 가뭄은 조선의 논농사에서 이앙법의 보급을 지체시켜온 대표적인 자연환경요인이었고, 이로 인해 이앙법의 도입은 조선정부 차원에서 그 확산을 경계해온 현상이었던 바, ‘오포튜니스트’적인 천수답 논농사는 그러한 환경적 제약과 정책적 금압에도 불구하고 그 이로움으로 인해 지배적인 농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도 조선정부와 유학자들에 의해 그 위험성이 누차 지적되어왔고, 새삼스레 일본인들이 이를 비판하면서 밭으로 바꾸란다고 하여 쉽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일본인 농업기사는 가뭄으로 모내기가 지체되던 상태에서 비가 왔는데 농민들이 모내기는 하지 않고 밭농사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을 신기해하며 적은 일이 있다. 이것이 바로 농민들에 의해 ‘삼그루판’이라고 불리는 상황에서의 일로, 논농사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삼그루판’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논농사와 밭농사를 병행하는 농민들이 밭에서 이모작의 앞작물을 수확하고, 곧바로 이어서 뒷작물을 파종하며, 논에서 가뭄으로 인해 늦어진 모내기를 이루는 등 세 그루의 농사가 집중되는 시기를 가리킨다. 조선시기의 농서(農書)들에서는 이를 삼농극망지시(三農劇忙之時), 즉 세 가지의 농사일로 극도로 바쁜 시기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조선농민의 ‘오포튜니스트’적인 농업경영방식의 본성을 잘 드러내준다. 천수답과 수리답이 병존하고, 논농사와 밭농사를 병행하며, 밭에서도 각종 작물을 섞어짓고 이어짓고 사이짓기하는 것은 이 땅에서 누대를 이어온 기본적인 농업경영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오포튜니스트’라는 표현은, 부정확한 표현이었지만 해당 필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종류의 적절성을 지닌 표현이기도 하다. 이 논밭혼합영농의 기본적인 원리는 경작지를 잘게 분할하고 재배작물을 다각화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위기와 기회를 분산시키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가 되면 일본 농학계 내에서 ‘다각형 농업’이니 ‘덴마크식 농업’이니 하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되면서, 조선의 천수답 농법을 쌀만 귀히 여겨 논농사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러나 사회 전부문의 생산력 및 소비수준이 소위 ‘덴마크식 다각형 농업’에서 중요한 축산ㆍ낙농생산물의 상품화를 담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그러한 비난은 본래 생계전략 자체가 다각형적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논밭혼합영농을 표적으로 삼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구월동의 윤길용씨도 적절히 지적하고 있었던 바, 이앙기의 가뭄은 이 ‘오포튜니스트’적인 논밭혼합영농이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환경요인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기술적 우위를 조선에서 구현하는 데에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뭄’에 의해 규정되는 삼그루판의 농업은, 제국주의 일본의 ‘선의’와 기술적 우위가, 조선의 농업으로 하여금 그만큼의 생산력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였던 근본요인인 식민지 조선의 농업환경,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온 식민지 조선의 농속들과 만나, 부딪히고 꺾이고 조정되면서 개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식민지 경험이 생산되는 문화접변의 현장이었다. 당시의 농업은 현재 대한민국의 자동차공업이나 반도체공업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산업적 중요성을 갖는 부문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경험의 형성이라는 견지에서도 역시 다른 부문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농업에서의 상황을 전제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무언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항상 본말이 착종된 논의로 귀결되고, 삼그루판이 그 농업을 둘러싼 문화적 논의에 중요한 창이 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그 식민지 조선의 삼그루판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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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있습니다. 특정한 지역에 국한된 기상, '자연'에 관한 민속지식이 구역을 크게 나누어 예보하는 근대과학보다 더 정확하다는 점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근대과학이 상대하는 것은 민속지식이 상대하는 '마을단위', '고개넘어 마을 하나하나'가 아니니까요.
현재까지의 농법은 주로 생산도구, 품종, 비료, 노동시간 등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저자께서 보시려는 부분은 이와는 다른 부분 곧 작부체계, 자연에 대한 민속지식, 농민의 생계전략인 것 같습니다. 외부자적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가시적으로 통계화하고 비교할 수 있는 전자이겠지만, 농업에서 후자를 빼놓아서는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도외시된 훌륭한 종합적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몇가지 궁금한 점을 짚어보면, 우선 저만의 생각이거나 사소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지만, 도입부분의 '자연환경'이라는 개념을 조금 한정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대립항, 또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인간'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 논문은 이러한 견지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식민통치 35년을 바라보고자 한다'부터 2단락이 정확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비효율적인 착취ㆍ팽창체제'라는 것은 효율적인 착취팽창체제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또 일제시기의 생산력 증가를 비록 계획한 것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비효율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한 것은 아닐런지요. 1920년까지는 생산력증가가 미미하였지만, 1930년대 들어서면 비료부분과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상당정도 증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수치적인 부분은 제차하고서도 '비효율적'이다 아니다는 말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런지요. 다음 기회에 조금 더 쓰겠습니다.
재미 있으셨다니 기쁩니다. 우선 지적하신 내용과 관련하여 설명을 드리면,
우선, '자연환경'을 한정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은 저도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기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그게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수동적인 존재로 느껴지게 만든다'는 부분은 어떤 말씀이신지 잘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러니까 제 말씀은, 제가 좀 자연-인간 관계에서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성향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거하고 '자연환경'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문제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요? 혹시 몹시 바쁜 상태가 아니시면 조금만 더 설명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음 그 두 단락의 문제와 관련하여, 저는 보다 효율적인 착취팽창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맞고, 그래서 식민지를 개척하는 구 제국주의가 비효율적인 착취팽창체제였다는 점을 쓴 것입니다. 이 점에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지배ㆍ통제ㆍ규율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다음에 "이 불필요한 일을 굳이 하려드는 것이 옛 제국주의들이 성립한 비밀이며, 그 불필요한 일을 고집하기에 나타나는 비효율성이 그것들이 역사무대에서 사라져간 비밀이다."라는 문장을 첨가하였습니다. 실제로 제국의 질서는 2차세계대전 종료를 분기점으로 삼아 그 이전시기부터 이미 성장하고 있던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행한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 제가 드리고자 한 말씀은, 그 체제 자체가 원래 조금 '광'적인 것이었고,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도덕적인 의무감 같은 걸로 때우는 경향이 강했으며, 말기에는 그 '광'적인 성향을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다는 거죠. 마치 한국축구가 기술과 체력의 열세를 장기합숙훈련과 정신력 강화(실제로는 매질 및 장기간의 매질로 인한 경로의존효과, 경로의존효과라는 말이 어색하다면 그 뭐죠. 종 치고 밥을 줘 버릇하면 종만 쳐도 개가 침을 질질 흘린다는 실험)로 때우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죠.
따라서 이건 1930년대의 생산력 증대와는 완전히 별도의 문제입니다만, 이것도 얘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면, 1935~1937년 기간 비약적으로 성장한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은 이후 1939년을 예외로 하여 급강하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데요. 첫째는 전시체제의 강화에 의한 비료부족현상, 둘째는 한국의 농민들에 의해 '칠년가뭄' 혹은 '칠년대한'이라고 불리는 대가뭄의 도래입니다. 흔히 경제사학계 혹은 조선의 일본인들은 이를 일본식 근대농법의 도입 혹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농사개량 자체의 능력 외부로부터 주어진 조건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만, 저는 기본적으로 이것을 일본식 근대농법과 조선총독부 혹은 일본제국주의의 능력 내부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조선이 일본보다 생산력 수준이 떨어졌던 것을 설명할 수 있고, 그걸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농사라는 게 원래 자연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자연에 수동적인 인간이라는 가정은 일정부분 일정부분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자연을 능동적으로 조작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자연이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자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이라는 문장에서, '자연'은 역사적으로 제한적인 개념이며, '인간' 역시 역사적으로 제한적인 개념입니다.
두번째, 읽다보니 필자의 거대한 역사관하고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2차대전을 전후로 하여 효율적인 제국으로의 전환이라는 생각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국의 효율성에 대해서 논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 효율성은 다소 구조기능주의적 개념을 아닐런지요..
또 한국축구에 대해서 예를 들으셨는데, 한국 축구가 기술과 체력이 딸린 것은 아마도 축구의 후발주자이고 기술과 체력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장기합숙훈련과 정신력 강화로 보강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조건에서 그것이 축구선진국과 나름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후발주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기술과 체력을 강화하는 시스템과 적은 돈을 들여서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정신력을 만드는 시스템 중에서 무엇이 효율적인가를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조건들이며, 그것이 가능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1930년대에 대한 설명은 사실 저도 잘 모르고 필자께서 조선총독부 내부의 능력의 문제로 보셨으니, 앞으로 그에 대한 연구를 내놓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논의의 여지가 없네요.
우선 제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후자를 수동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이 수동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도, 자연이 인간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하나의 팩터로서, 인간세계의 제반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는 주요요인들의 하나로서 다루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도 그러하지만 자연도 역시 근본적으로 통제불가능한 대상이고 말을 알아먹는 정도가 거의 제로인지라, 인간이 맞추어가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강하다는 거죠. 그리고 전에 까띠보.. 님에게 잠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그 기후요인이라는 것을 이 농민사회의 근본적으로 장기지속적인 구조적 특징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국의 효율성에 대해 논하기 어렵다면, 이윤창출의. 혹은 노동착취의, 공장생산이나 농업생산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도 구조기능주의적인 개념인가요? 물론 저는 그걸 논할 능력이 별로 없습니다만, 혹시 일본? 님은 그게 가능한 분이 아니신가요?
한국축구 이야기는, 그게 후발주자가 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저도 쓴 거고, 이건 일본? 님이 쓰신 내용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1900년대 전반의 제국 일본이 했던 방식과 같이 해야했던 이유는 없는 것이고, 혹시 그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반대(그게 어려웠다면 지금에 와서라도 비판 혹은 반성)해야 마땅한 방향이겠지요. 그걸 제가 긍정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게 후발주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후발주자든 선발주자든 할 수 있는, 해도 되는 게 있고,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거겠지요. 제가 축구의 비유를 든 것은 그 원리의 일반성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였는데, 그것이 후발주자 중 일본이라는 특수성에 대한 변명을 위해 일반적인 원리를 갖다대서 구실을 만들어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