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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조선의 산림이, 특히 사람이 사는 마을주변의 산림이 완전히 헐벗어서 민둥산 상태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부 경제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 진영으로부터 <산림황폐화로 인해 수리시설이 메워져서 옛(18세기까지의) 수리관개몽리구역이 관개불가능의 지경에 빠져들게 되고, 이것이 19세기 위기의 일단이자 또 일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되었지요. 이러한 입론은 일제시기의 식민사관 이데올로기와 상통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현대 학계의 주류적인 패러다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생태사관적인 아이디어의 반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미묘한 쟁점이 됩니다. '산림황폐화에 따른 19세기 농업생산력의 위기'라는 논지에 대해 한편으로 황당해하면서도 막상 논리적으로 어떤 반론이 가능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자료나 여러 가지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론적인 함의라는 문제를 고민할 때, 생태사관과의 관련성 문제도 있어 섣부른 반격이 곤란한, 상당히 고급 수준에 속하는 난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적어도 저 개인적으로는).

그게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산림의 수분함양과 토사유실저지 기능’이라는 자명한 명제가 저희들에게도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부정되어서도 안 될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민둥산의 합리성’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조선의 농민들은 왜 산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게 없다면 무지막지하게 삼림을 벌목하여 자멸한 민족이라는 논리를 이기기 어렵지요. 이건 경제사 주류진영만 아니라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기도 하구요. 우리 역시 쉽게 부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손쉬운 이데올로기적 단정에 또 무력하게 끄떡이고 있거나 얼굴을 붉히고만 있는 것도 연구자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선 지적해둘 것은, 헐벗었던 것은 주거지와 경작지 인근의 산림들이지, 까마득한 원시림이나 관청 혹은 민간에 의해 금산으로 봉해진 산에 대해서는 엄격히 남벌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조선에서 땔감 수요는 컸지만 목재수요-주로 건축자재겠지요-는 크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추후 정식으로 쓸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일제시기에 축조된 저수지들조차 어떤 상황에서 제 구실을 못하고 끝내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이 점은 1925년 조선의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왕시 도처에 수전관개용의 유지(溜池)가 축조되어 상당히 이용되었다는 사적(史蹟)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일 그 유지가 황폐된 것 많음은 왜인가, 신정(新政) 전의 유지(황폐화―인용자)가 비정(秕政)의 결과임은 어느 누구나 이론(異論)이 없는 바로, 원래 유지였던 토지가 현재는 양전(良田)이 되어 그 소유권은 구(舊) 아무개 군수의 소유로 귀착된 것과 같은 경우는 살아있는 실례이다. 그렇다면 신정 후 수축된 유지가 지금 그 쓰임새를 다하지 못함에 이른 것은 왜인가, 나는 그 원인의 하나는 동기(冬期) 지층의 결빙에 있다고 믿는다. 제언은 저수지바닥보다 한풍(寒風)에 노출되어 지표가 다섯 치 내지 한 자 심하면 두 자 내지 세 자의 동결을 이룬 결과, 이듬해 물을 가두려고 할 때는 이미 제언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만수시기에 이르면 즉각 파손의 재해를 만나는 것이 아닌가 (인용처 생략).


조선시기의 저수지 황폐화와 일제시기의 저수지 황폐화의 원인을 애써 구별하여 찾으려는 모습에서 일종의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는 이 서술에서, 조선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에 대한 것이든 일제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에 대한 것이든, 그가 찾은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한쪽은 타락한 정치의 결과이고 다른 한쪽은 불가피한 자연영력의 결과라는 주장의 이데올로기성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요. 요는 일제시기에 축조된 수리시설조차, 그것을 축조한 일본인들 스스로 불가사의하게 여길 정도로, 황폐화되어 제 구실을 못하고 심지어 파손의 위기에 처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촉진하는 자연환경요인이 조선농업의 기본조건으로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사실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수리시설의 폐지가 아니라 산림황폐화이니까요.

이와 관련하여 야마모토 토쿠사부로(山本德三郞)라는 일본인은, 조선과 같은 기후ㆍ지형특성에서는 산림이 ‘헐벗어’ 있는 것이 천수답 경영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여기에 산림을 만들려면 산밑에서 천수에 의존하는 경작방식으로 농사지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칩니다. 역시 1926년에 쓰인 글인데요. 천수답 영농과 산림황폐화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통찰력이 있는 견해이므로 오늘은 이걸 조금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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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천수답’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 흔히 논은 관개답과 천수답으로 나눕니다. 관개답은 물을 대는 설비가 갖추어진 논, 천수답은 하늘에서 비가 와야 물을 댈 수 있는 논이지요. 천수답은 봉천답이나 하늘바라기논이라고도 합니다. 관개답은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로부터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는 논과 작은 하천이나 개울 등에 만든 간단한 수리시설을 통해 물을 공급받는 논으로 구분 가능합니다. 전자의 경우 수리안전답, 후자의 경우 천수답과 묶어서 수리불안전답이라고 하게 됩니다. 후자는 가뭄이 들면 수리시설로서 제구실을 할 수 없어서, 천수답과 거의 다를 바가 없게 되기 때문이지요. 조선의 경우 대개 2, 3년에 한 번, 적어도 4, 5년에 한 번은 이런 가뭄을 만나게 됩니다.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조선의 천수답 비율은 70% 안팎이었고 수리안전답은 10%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으므로, 이 땅의 논농사는 상당히 수리가 불안정한 환경에서 영위되어 왔다는 점도 일단 확인해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국사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들은 조선에서는 가뭄의 우려가 커서 조선전기에 이앙법 보급이 지체되었다는 설명을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그 상황이고, 이는 일제시기와 현대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야마모토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조선 땅에는 발도 들여 본 적이 없는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사람인데, 그의 설명에서 동원되는 조선의 지세와 농업에 대한 지식은 견문으로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대신 아마 오카야마의 지세와 농업에 대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고, 조선에 대해 통찰력이 있는 설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 지식에 기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우선 “조선남부의 기후풍토는 내지(內地)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내지의 어느 지방과 가장 많이 비슷한가 하면, 산양도(山陽道) 남부 특히 오카야마현(岡山縣) 남부지방일 것”이라고 한 후, 오카야마 남부와 조선의 자연지리적 특성의 공통성을 지적합니다(내지라는 게 일본이지요?). 이에 따르면, 우선 “그 가장 혹사(酷似)한 점은 우량이 적고 공기가 건조하며 모암(母巖)은 화강암 석영반암 종류인 점”이며, “하계에는 호우 패연(沛然)히 이르는 일도 있는 것 같지만 일조시가 많고 온도가 높은 점” 또한 닮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산양도와 조선의 자연지리적 특성이 어떻게 비슷한지를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은 탁월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오풍십우(五風十雨)의 상태라면 그 지형여하에도 불구하고 천수(天水)의 부족을 느끼는 일이 적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량(雨量)의 배포가 편벽되고 지형이 협소한 계역(溪域)을 지니고 있다면 누누이 한발에 걸리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남선의 기후풍토가 이상과 같은 상태라면 계역은 황폐하여 벌거벗은 붉은 흙(荒廢禿赭) 상태에 빠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산지에서 사방조림(砂防造林) 기타 방법에 의해 삼림이 성립한다고 하면 그 결과 천수에 매달린 논의 용수나 유지(溜池)의 저수량에 여하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대책을 여하히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미리 음미하여 둘 필요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적은 것과 같은 지형과 기상상태인 곳에 삼림이 생긴다면, 우기에 있어서 출수량(出水量)을 조절하기에 홍수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건조기의 소우기(少雨期)가 되면 임목(林木)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수량(水量)과 지피물(地被物)의 습윤에 필요한 양 등으로 상당히 삼림 내에서 수분을 소비하므로, 건조기에 있어서의 적은 비 정도는 전부 산지의 삼림이 가져가버리고 산기슭ㆍ산아래에는 (물을―인용자) 내주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천수에 매달린 다소의 논을 지탱하고 있던 곳에서도 성림(成林)으로 인해 그 천수의 은혜를 입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삼림의 수원함양(水源涵養)이라고만 훈련된 지식계급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옅은 산을 안고 있는 삼림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대책은 여하히 하면 좋은가. 상당한 대규모의 유지(溜池)를 설치하여 우기에 쓸데없이 방하(放下)되는 수량의 일부를 모아놓고, 건조기에는 천수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 유지의 물로 관개하는 것이 아니라면 논물에 생각지 못한 부족을 초래하는 일이 있다. 삼림은 수원(水源)의 함양능력이 있으니까 무입목시대(無立木時代)의 천수가 점점 더 많아져서 관개 상 편리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크게 잘못 본 것이며, 구릉지에서 수원지구와 이용지구가 가까운 경우 무입목시대의 천수는 성림과 함께 이용수(利用水)로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아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풍십우로 우기가 편벽되지 않은 경우라면 쉽게 이런 일은 실제 문제가 되지 않으며, 또 유원(幽遠)한 계곡을 지닌 산악지대에서 수원지구와 이용지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이쪽저쪽에서 조금씩이나마 모아 와서 한 줄기가 되고 상당한 양이 되어 이용지대 쪽으로 당겨오기 때문에 수원함양의 의미를 지니지만, 남선과 같이 비가 편중되고 수원이 얕은 구릉지에서는 삼림이 성립하면 홍수에 대해서는 유리하더라도 소우기(少雨期)의 관개 상 이전과는 관계를 달리하므로, 소우ㆍ소나기 등 빗물을 상대로 하지 말고 우기에 있는 대량의 물을 상당히 커다란 유지로 모으는 식의 방침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삼림번무로 인하여 수원고갈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인용처 생략).


 

이러한 설명은 조선의 소위 ‘헐벗은 산’ ‘붉은 산’의 농업생태학적 기능을 지적한 것으로, 이앙법 보급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수답이 대종을 이루었던 조선의 농업환경에서, 경작지 인근의 산이 점차로 헐벗게 되었던 ‘자연사적 과정’의 존재이유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림의 수원 함양이라고만 훈련된 지식계급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이라는 단서는 일제시기는 물론 현대의 농학ㆍ농업사 연구자들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지니고 있고, ‘무입목시대의 천수는 삼림의 성립과 함께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을 갖추었습니다. 한마디로 가뭄과 강수, 삼림과 경작지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지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인 확신을 근본에서 뒤흔드는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참, 잠시 오카야마현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설명을 드리면, 오카야마가 그 연안에 위치한 세토내해(瀨戶內海)란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의 사이에 놓인 내해입니다. 관동지방에서 주로 남북방향으로 뻗었던 일본열도가 이 일대에 해당하는 관서지방에서는 동서로 놓이고, 열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산맥도 동서로 놓입니다. 산맥의 남쪽-세토내해 연안-은 산요, 그러니까 산양(山陽)이 되고, 북쪽-동해 연안-은 산인, 그러니까 산음(山陰)이 되겠네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해 첨가하자면, 일본 산양도와 조선의 자연지리조건 사이의 공통점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모암이 위나 아래나 같다면 중허리 이하의 산록완사지와, 중허리 이상의 산정(山頂) 부근은 산림 토리(土理)의 상이성이 나타나는 것이 상례인데, 이상과 같은 기후풍토인 경우 그 차이가 특히 심한 것으로 보인다. 산록, 골짜기의 토층의 깊고 오래 쌓여서 양질화(壤質化)한 곳은 소나무 등의 생육이 매우 좋으며, 약간 산허리로 가면서는 표토가 얕아지고 또 기껏 양질화한 것도 경사가 있으므로 빗물과 함께 씻겨서, 후에 남는 것은 모래자갈뿐으로 수목의 생육이 심히 나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산록완사지, 농경지의 토양은 세월의 추이에 따라 양질(壤質)을 띠기도 하고, 또 반영구적으로 점토가 되지 않는 석영과 같은 것이 있으므로 치밀함이 지나칠 정도의 토양이 되지도 않아, 기수(氣水)의 유통이 양호한 절호(絶好)의 사질양토(砂質壤土)를 구성하여 농업작물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산지(山地)가 일단 황폐화한 곳은 그 회복이 용이하지 않으며, 모암으로부터 풍화ㆍ분리된 모래알갱이를 산허리에 머물게 하고 산허리에서 양질화시키는 방법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이상 일조일석에는 황폐를 복구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방공사(砂防工事)의 필요를 느끼고, 사방공사는 토사(土砂)의 유출을 방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그에 수반하여 산허리에 토사를 머물게 하고 수분의 분배를 평등하게 하기 위해 양질화에 의해 산지의 생산력을 조장하고 성림(成林)을 용이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사명인 것, 이상과 같은 기후풍토의 관계는 산양도 남부와 서로 닮아 있다.”

조금 길었지요? 인용문 출처는 추후 공식적으로 글을 쓸 때(지금 쓰고 있습니다) 밝히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19세기 조선의 산림황폐화와 조선농민의 '무분별한 산림남벌론'에 대해, '산림을 황폐화시켜 스스로 파멸의 길을 재촉했던 무지막지한 19세기 조선의 농민들'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에게, 새로운 이해의 계기가 되셨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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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lagur 2007/01/31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있군요. 그렇다면 19세기 농민들이 도리어 산림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이것도 생태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2. 낙장불입 2007/01/31 0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과 삼림의 관계에서 삼림이 인간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개체수가 지극히 적을 때뿐인 것 같습니다. 아주 크지 않은 일정한 개체군 규모에만 이르면 그때부터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보존하고 균형을 취하려 노력하지 않는 한 삼림은 황폐화의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조선의 자연지리환경이 삼림의 유지 혹은 확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조선에서 그 인간 개체군 규모는 타지역에 비해 아마 상당히 적은 편에 속했을 것입니다.

    조금 이야기가 꼬이는 것 같습니다만, 요는 19세기 조선의 삼림황폐화는 천수답 영농을 강화하려는 의도적인 농업증산책의 하나로 추진된 것은 아니리라는 것입니다. 반면 18, 19세기의 농민들이 산림을 보존하려고 금송을 하거나 봉산조치를 취하는 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정책적 행위-관에 의한 것이든 민에 의한 것이든-이겠지요. 제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18, 19세기에도 역시 이러한 행동들의 결과가 농민들에 의해 충분히 인지되고 결과적으로(이 '결과적으로'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선택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야지, 결코 '아무 생각 없이 무지막지하게 남벌을 해서 자멸을 초래하는' 종류의 인간집단으로 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혹 이에 대해 현대와 같이 발달한 사회에서도 그게 어려운데 무지막지한 옛날 사람들이 그게 가능했겠냐 싶으실 수도 있지만 실은 반대입니다. 그게 반대라는 건 옛날 사람들이 똑똑하거나 무진장한 신비한 지식으로 가득한 현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기술수준을 가지고 살았기에 그거 외에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농업은 기본적으로 자연환경과의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고 당시의 농촌사회라는 것은 자연환경의 무분별한 파괴에 이르기에는 생산력 수준이나 기타 기술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수퍼맨이나 배트맨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악당이 있어서 그러한 무분별한 생태적 파괴를 성취하려고 해도 결코 그걸 이를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지요.

    그런 점에서 19세기의 산림황폐화에 의한 생산력 저락을 이야기하는 아류 생태사관들은 이데올로기적입니다. 19세기에 산림을 보호하는 정책을 취하는 관청이나 농촌조직이 있었다면 그 이유가 있는 것처럼, 같은 시기에 산림이 황폐화되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거죠.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당연히 생태학적으로 접근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길이 있고, 실제로 그런 종류의 분석도 있습니다. 문제는 농업사회에 존재하기 마련인 그러한 종류의 산림보호관행의 생태학적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삼류생태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것과 함께 진행되던 산림황폐화를 금송과 같은 당대의 산림보호책과 함께 엮어 생태적인 설명을 할 수 있어야 A급의 조선생태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로 한 가지 더 팁을 달면, 엄격히 벌채가 금지된 산에서도 바닥에 떨어진 솔가지, 나뭇잎은 산밑동네에서 아무나 긁어갈 수 있는 정책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것도 역시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3. rlagur 2007/01/31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산림보호가 곧 생태학적인 무엇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죠. 남벌을 했다면 남벌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금송을 했으면 금송을 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그 어느 쪽도 농민이 자신의 생리를 유지해나가는 데 기여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생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태란 생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농민이 생리를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농업의 생리와 깊이 연관된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농업의 생리는 농업의 조건을 포함한 사회적 조건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 인터뷰한 결과 특히 19세기 후반에 농민의 삶에 산림의 경제적 가치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거의 재산을 상속 받지 못한 어느 집안이 이후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기반은 그나마 사용권을 인정받은 선산의 나무를 해다 팔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잔솔가지를 치고 썩은 나무를 해다 파는 것은 오히려 산의 생리를 돕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 낙장불입 2007/02/01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벌이든 금송이든 농민의 생리 유지와 관련된 것이라면 생태적인 것이라는 점, 농민의 생리를 농업과 환경의 생리 그리고 사회적 조건과 결부시켜 설명해야 한다는 점은 탁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수 앞에서 잘난 척을 했던 것 같아 민망하군요. 라구르(라고 읽는 것이 맞나요?)님의 인터뷰자료와 쓰신 글들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조만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요. 저도 수년 안에 경기남부 농민의 나무장사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구상 중이라서,서로 뭔가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분을 만난 것 같아 기쁩니다.
      잔솔가지 문제는, 일제시기 자료를 보다보니 지주간담회에서 지주들이 산에서 나뭇가지를 긁어오게 해달라고 총독부 정무총감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이 있더군요. 그걸 못하게 하면 농민들이 다 죽는다고요. 지주들이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역시, 강수패턴과 산림의 기능, 기후나 지형조건 등과 관련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있던 차이가 반영되어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라구르님이 적절하게 보시는 것 같고, 혹시 어딘가에 공식적으로 쓰신 것이 있으면 한 번 읽고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4. 똠비 2007/02/01 0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의 모르는 단어가 반 이상이었지만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조선에 와본 적도 없으면서, 조선의 사정을 날카롭게 추리하여 '삼림의 수원함양으로만 훈련된 지식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다분한 공격에 대해 '무력하게 끄덕이거나 얼굴 붉히고 있는'자들을 대신하여 저런 주장을 펼칠수 있었던 야마모토 토쿠사부로상은 정말 저의 꿈인 암체어 인류학자의 이상형을 보여주는군요..!^^ (사실 그의 논리를 다 쫓아가진 못했습니다만...)

    • 낙장불입 2007/02/01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 '추리'라는 방법이 이 학문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던 것 같은데, 암체어 안스로폴로지스트니 뭐니 하면서 학사적인 발전과정에서 그러한 방법들이 거세당해왔던 것 같습니다. 똠비님이 부디 꿈을 이루시길,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학계 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랍니다.
      한문이나 일제시기 일본어로 된 텍스트를 번역해서 사용할 때는 저도 상당히 고민이 됩니다. 사실 그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글의 분위기가 살고 왠지 문장도 유장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걸 살리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살리면 보통 사람이 전혀 읽을 수 없는 글이 되고 말거든요. 전에 대학졸업을 앞두고 언론사시험준비를 할 때, 신문기사는 중학생 수준의 어휘와 문장으로 구성하는 거라고 조선일보 간부 되시는 분이 호통을 치시는 걸 들은 일이 있었는데, 평균 이상의 학력을 가지신 똠비님이 그럴진대 중학생 수준의 글로 이걸 만들려면 얼마나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앞이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게 글쓰기라는 게 두 모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오덕, 하나는 김수영(그리고 그 중간에 김현이나 정운영, 아니면 유홍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사실 거의 화해가 불가능한 모델이 아닌가 싶어서 근래에는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한데 최근에 새로운 모델로 오주석을 추가했는데, 여기에서 이 두 모델을 화해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보이더라구요. 지금 하고 있는 급한 일이 끝나면 이걸 조금 연구해볼까 하고 있습니다.
      글쓰기를 둘러싼 외부 환경을 조금 점검해보면, 저희들 조금 밑(그러니까 현재의 30세 전후)부터 지금 고등학생 정도까지는 한문은 커녕 한자 자체에 대해 거의 접할 기회가 없이 초중등교육을 마치게 되었던 세대 같은데, 지금 중학생 이하는 한자능력검정시험의 유행으로, 특히 초등학생 이하는 마법 천자문이라는 만화책의 유행으로 어느 정도 한자의 식자능력을 가지고 초중등교육과정을 마치게 되는 것 같더군요. 이게 앞으로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10대 후반부터 30대 중후반까지의 한 20년간이 역사적으로 한자식자능력의 공백지대 세대로 자리잡게될 공산이 큰 것 같습니다(그런 점에서 최근 박노자가 한글전용론의 황당함에 대해 지적한 글들을 유의해서 읽었습니다. 뭐 내용은 별 게 아니었지만, 진보적 지식인에게 워낙 영향력이 막강한 양반이어서 반향이 없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더군요). 이 지형이 저희들의 글쓰기의 미래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도 아마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물론 영어공용화라는 변수가 돌출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 위에서의 이야기입니다만..

  5. CattivoMaestro 2007/02/04 2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몇번 쓸까 말까 하다가, 아니 사실은 한번 썼다가, 봉사가 꼭 문고리를 잡는 것도 아니고 봉사도 대충 감각적 추리를 하며 세상을 더듬어 사는 것인지도 모를 것이기에 관두었다가, 불끄고 누운 이밤에 자꾸 생각이 나서 또 적습니다. 자기가 잡은 것이 문고리라고 믿는 것도 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오독이 상당할 테지만-사실 잘 못 따라가겠던데요-어쨌든 잠이 안오니까…. 그러려니…

    사실 저는 조선 산림이 19세기에 그 모양이었는지 알길이 없는 생을 사는 사람인데요. “메아리가 살게 시리 나무를 심자” 세대라서 그런가 봅니다. 그런데 그게 이른바 경제 사학자들에게는 식민지 시대에 대한 중요한 논거를 제공하는 것이었나 보네요. 조선의 아궁이가, 또 척박한 기후와 환경이 나중엔 어떤 "팩트"가 “식민주의 필연론”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섬뜩합니다.
    정말 19세기적인 논리들의 장기지속입니다. 다른 것은 19세기 인들은 그래도 미래를 쳐다보고 그런 추리와 논리를 펼쳤는데, 요즘 배운자들은 어쩌자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으니 좀 다르긴 하겠지요. 어쨌든, "기존 논리"를 반대로 해석한다거나 그럴만한 자료를 찾아 낸다해도 제 생각엔 많이 다를 것 같지가 않아서 그게 좀 자꾸 걸리네요.

    산림의 경제적가치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겠지요(벌목꾼이 "범인"은 아닌거로 보아 있어도 쌀이나 다른 농산물하고는 쨉이 안됐나 봅니다). 그 가치에 기대어 사는 사람도 있었수도 있고, 그런 가치가 하찮아 보이거나 범접할 수 없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구요. 조금은 허당합니다만, 이 꼬리의 꼬리를 무는 합리주의적 설명에 기대어 추리를 해보면 이도 저도 없고, 금송제도 지켜야했으면서, 자꾸만 목부러지고 손에서 빠져나가 “산신령”이나 “선녀”라도 기대해 볼 도끼자루마저 없었을 어떤 이들도 추론이 되지요. 이 자들이 떼로 불어나서, 잔가지 나뭇잎들까지 긁어모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게 토양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설명도 제법 그럴싸 해보이는 추론입니다. 껍질을 벗겨 먹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오늘날 솔잎 흑파리병 같은 것이 있었거나 농약을 쳤다면 사실 추론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지도 않겠지요.

    천수답이 일반적이었다니, 물대고 나기를 위해서 주변 나무를 치는게 그나마 비왔을 때 물 담는데는 효과가 좀 있었을 법도 싶습니다만, 저수지도 토사가 흘러들어 난리였다니 논 밭은 또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여간 머리아픈 농삿일이 아니었겠나 밖에 상상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제 상상력과 추리는 그것이 농민과 농업을 중심에 두는 순간에 사실 아주 결정적으로 딜레마에 빠져 버립니다. 그것도 19세기라는데…
    누군가는 그때, 그리고 지금 그것을 그당시 농민과 농업의 관점에서 잘 설명할 수 있겠지요. 또 얼마간 필요한 작업인 것 같습니다. 이른바 “대항논리”라는 점에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19세기 농민이 지금 살아계시는 장수촌이 있는 것입니까? 앞에 어떤 분이 인터뷰를 하셨다고 해서..

    글을 읽으면서, 제가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러니까저는 한편에선 오히려 산림의 역사가 더 궁금해졌달까요? 안나 칭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지요. 그래도 어쨌든 그 이야기는 산림과 삶이 또 세트로 묶여있는 이야기니까 좀 강력하긴 합니다.

    이글에서 보면, 19세기 조선 산림은 어쨌든 벌목꾼들의 이야기나 화전민 이야기로 재구성이 안될 것 같아 보이는데요. 그래도 제 의문은 사람들이 농업과 농민- 사실 둘이 하나지요. 아감벤식으로 보자면 삶의 형식이 삶을 날 것으로 고립해서 규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만들었으니-을 중심으로 해서 생태적 문제를 볼려고 할까였습니다. 사실 생태 문제라고 했을때도 여기서는 산림인 것 같은데요.
    어떤 부분적이고 미시적이나 결정적인 설명의 자리가 있다고 보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지요. 제임스 스캇이 그 오래된 책에서 유럽의 산림을 언급하는 식은 아니더라도 뭔가 다른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자꾸 생각이 들더군요.

    좀 더 나아가보면, 저는 경제사가들이 “틀렸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다른 방식 그러니까 그들이 현상을 해석하고 논리적으로 조립하는 근본적 “추리”구조를 무화시키는 것이 핵심이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좀 더 분명히 그런 가능성을 펼쳐 놓았으면 하는바램이지요.

    예를들어, 산림하고 농업하고 별 관계가 없었다 (그 일본 추리농업학자께도 한수 훈수를. 그분 논리는 좋지만 그 당시로 보면 “진단”의 시대에 좀 착오적이시지요.^^ 뭐 사실 말리노브스키도 도서관에서쓴 박사학위 논문이 더 논리적으론 완벽했다더군요.) 혹은 산림과 농업의 관계가 저수지를 매개로 새롭게 형성되는 어떤 과도기에 있었다(이건 사실인것 같네요. 그 기존 논자들의 탄식인지 탄성인지가 있었다 하니) 그런데 이건 왜냐? 뭐 이런 질문. 그러니까 농업 외적 조건과 농업기술 이식의 탈콜 구조 혹은 웃자란 구조가 농민을 벌목꾼 겸업을 시켰다던가, 원래 농지 근방 일정부분을 자기땅으로 인정해주는 관례가 있었다던가, 그땐 산림지키는 공익근무요원이 없었다던가 또 어쨌던 간에 결국 산림을 홀라당 민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산림을 관리하기 시작하니까 이젠 시장과 사회가 아사리판이 되어가버렸다.. 사실 생태파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과도한 경제적 “생산력”주의의 효율성에 기반한 추리구조가 개념없이 삽입되는 행태가 존재하는 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농민이 생태 보존에 무지몽매했었다면, 그 무지몽매 인식 구조는 결국 그런 "추리구조"가 생산해 낸 것이다. 그 "무지몽매"는 그러나 결국 경관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으로 대체되어갔다등등이 제 “반추” 논리의 구근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농민은 산에서 어떻게 왜 관계답으로 내려갔나?" 혹은 "산림은 어떻게 농민을 내려보냈나?" 랄까요? 제 관심사을 요약하자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지금은 “메아리”와 함께 산림 중간중간에 쓸려나가지 않을만큼 조화롭게 누워계신분들이 버럭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관두껑 열고 나오시면 그때 인터뷰 하기로 하지요.. ^^

    어떤 글이 될지 궁금하네요.

    • 낙장불입 2007/02/05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19세기 노인분들이 살아계시는 장수촌이라니.. 재미있기도 하셔라. 아마도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현재 살아계시는 분들(장수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도 하여튼 주로 노인들이시겠죠)이 자기 집안 내력을 설명하면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싶군요. 실은 19세기말에 그전까지 어렵게 살던 사람이 급작스레 큰 돈을 벌어들였다,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길쌈을 해서 돈을 모았다는 둥, 소금장사를 했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인데요. 아마 그런 식의 이야기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나무장사로 큰돈을 모았다니 홍미로운 거지요. 마치 현대의 아파트나 해외펀드처럼, 길쌈이든 소금장사든 모든 시대의 블루오션은 그 시대마다의 독특한 분위기 내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일 테니까요.

      안나 칭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생태사관의 19세기 버전은 청은 왜 망했는가 하는 동양사의 핵심적인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청의 산림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는 생태사적 설명이거든요. 사실 19세기 조선사와 관련된 문제는 이 이야기를 들은 논자들이 이를 종속적으로 소화해낸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뭐 그 분들 머리와 대화 판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닌 만큼 확정할 수 없고, 또 그분들을 모욕하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이게 동양사, 동아시아사, 중국사, 일본사 등의 맥락과도 관련된 핵심적인 논제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창창히 궁리해볼 만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까띠보.. 님의 도전은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는 19세기의 산림이 어땠는지 정확히 잘 모릅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선교사나 탐험가 등 외국인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남긴 답사기록 같은 것들이 거의 전부입니다. 이들이 찍은 사진도 몇 장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보고서와 사진들이 있는 거지요.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들도 대충 알고 있는 '붉은 산'에 대한 것들입니다. 산림과 농업의 관계가 별로 없었다, 이런 가능성은 실은 그런 점에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시기에도 일본인들이 산림에 주목하기 시작하는 것은 주로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이래입니다. 이 을축년 대홍수라는 것은 지금도 100년 단위 홍수기록의 기준으로 쓰일 만큼 엄청난 비가 퍼붓고 또 하천연안의 모든 지역을 완전히 싸그리 쓸어버린 대단한 홍수였는데요. 그래서 조선의 자연환경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지요. 조선총독부에서도 이 이래로 홍수나 하천의 상황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작업을 시작하고, 댐 건설 적합지를 전국으로 확인하러 다니고(그래서 예를 들어 동강댐 예정지 같은 데도 이미 그때 적합지 중 하나로 꼽혔었던 거고, 그 구전이 지금도 그쪽에 있다죠. 옛날에 일본놈들이 여기에 댐을 만들 거라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는 식의), 하천제방사업 같은 것도 많이 하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조선에 산림 없음이 홍수의 일 원인으로 지목되고, 식림사업에 대한 강조 같은 것들도 많이 하고 그럽니다. 산림령인가 뭐 그런 게 아마 이때 만들어질 겁니다. 그리고 조선인의 원시적인 산림황폐화 방치에 대한 조롱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죠(일본인들의 산림정책에 대한 조선인의 기억은 대조적인 두 가지가 공존하는데, 하나는 산림단속을 굉장히 엄하게 했다는 거하고, 다른 하나는 보호림의 수백 년짜리 아름드리 나무를 엄청 벌목해갔다는 겁니다. 당연히 나무 베어가다 병신이 된 일본 순사 이야기라든가 병신이 되는 걸 보고 갑자기 그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모시게 된 일본인 이야기라든가 하는 것들도 도처에 있죠. 반면 일본은 하도 호우가 많고 태풍내습이 잦고 하다보니 식림과 보호림 육성에 대한 강조는 상당히 일찍부터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잘한 마을 이야기로부터 한중일 혹은 동아시아의 사회시스템의 비교에 대한 이야기까지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거죠.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선망국 불가피론으로만 이용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산림과 시장(마켓)의 관계 혹은 농업과 저수지의 관계가 변천 중에 있었고 그 결절의 지점들을 찾아냄으로써 새로운 생태사를 구성한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인데요. 이것도 좋은 방식이 될 것 같네요. 산이 어떻게 사람들을 내려보냈는가 하는 문제는 더욱 더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인데, 단지 18, 19세기에, 그리고 일제시기에 산지와 저지대 혹은 도서지역으로 뚜렷한 인구이동의 경향이 있었다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산이 사람들을 내려보냈는가 하는 쪽보다는 제가 생각했던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산지를 개간하여 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만, 역시 산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보면, 단지 '개간을 하러 고지대로 이동을 하였다'는 것보다는 산과 사람들이 맺는 관계 자체가 변화하고 상호작용의 방식이 변하면서 산이 사람들에게 뭔가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설명이 더 섹시하고 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브라가님의 액터 네트워크 시오리라고 하셨던가요, 비인간 행위자 개념이 상당히 잘 살아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꼭 19세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제나 해방 이후와 관련해서도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땔감은 연탄이 이를 대체할 때까지는 굉장히 중요한 생필품이었던 거고, 일제하 전시통제경제체제에서 주요한 통제물자였고, 이로 인해 상인과 소비자, 총독부 사이에 상당한 갈등도 있었던 것 같고, 지역 레벨의 문제로서도 여러 마을들이 서로 적극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땔감을 구하는 문제이기도 하고(산이 없는 동네에서도 땔감은 필요하기 때문에 거의 소금만큼이나 강고한 지역체계를 형성하는 힘이 있는 거죠), 또 박정희 시대의 화전정리사업(보상금을 주고 화전민을 쫓아내서 이 사람들이 서울로 와서 도시빈민이 되었지요. 성남시니 난곡이니 하는 것들이 그렇게 해서 생겨난 거죠. 다소 극단적으로 말한다면)이니 하는 것들도 그렇고, 최근의 국립공원 입장료와 산림에 대한 사찰의 권리 문제라든가 그린벨트 해제문제라든가 하는 것들도 그렇고, 소위 '입회권'이라고 하는 일본의 독특한 공유재산 관리제도도 재미가 있고, 반면 조선에서 사적 토지소유권의 발생과정이라든가 하는 것도 관련이 있습니다. 하여튼 산림의 인류학이랄지, 산림을 주인공으로 놓는 생활사랄지, 이런 것들은 수요도 있고 논점도 있으며 미래도 밝은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얘기를 쓰다보니 책도 여러 권 나오고 한 학기 수업할 만한 이야기꺼리도 있겠는데요?

  6. CattivoMaestro 2007/02/13 0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답변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건 그냥 떠올라서 한번 적어보는 것인데요. 최근에 블러드 다이아몬드란 영화를 봐서이기도 하고, 예를들어 전혀 농업과 관련없는 광산업의 영향은 어떻습니까? 만약 "벌거벗은 붉은 산"이 듬성등성 생겨났다면 말이지요. 기본적으로 조선 땅은 노천광이 많은 땅이 아닌데, 그러니까 이른바 조선땅의 골드러쉬, 코퍼러쉬등등도 혹시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요건 시장의 직접적 영향이겠군요. 만약 그랬다면. 사적 시굴의 유행에다, 별로 파먹을 것 없었던 광산등등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봤습니다. 산림 속의 어떤 것에 대한 새로운 가치가 생겨났을 수도 있겠지요. 나무장사야 말대로 대대손손 해왔을 수도 있고. 사실 근대 지리학에서 지질학의 등장은 특히나 식민주의와 관련해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지 않나도 싶습니다. 청나라도 그랬다니...결국 산림에 대한 전혀다른 시선이 발생한 것이었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게 저수지 관개논과 관련된 한 라인과 다른 직접적 라인이 겹쳤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 봤습니다. 사실 홍수도 알고보면 사람 죽는게 문제일뿐 아니라 생산기반이 망가지는게 젤 안타까웠을 수도 있겠고, 어쨌든 혹시나 금덩이가 나올지도 모를 산은 전혀 다른 산이겠지요. 어쨌든 섯부른 상상력을 조립해보면 산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과 인간의 개입이 생겨나기 시작하긴 한 것 같은데요. 재밌네요. 갑자기 홍범도가 포수였다는 사실도 떠오르고...아 안나 칭은 "Friction"이란 책인데요. 아주 감명깊게 읽은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잘 쓰여졌다고 상도 탄 책인데다가, 뭐랄까 인도네시아 깔리만딴의 숲을 가지고 요리저리 이야기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지요. 듬성듬성 읽어서 정확히는 생각 안나지만, A History of Weediness란 채프터에서 농업하고 숲하고 관계에 대해서 논했던 것 같습니다.

  7. 일본? 2007/02/09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농민의 설명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끌어오는 논리가 이상합니다.

    우선, 생태이론에서 인구압의 증가, 혹은 정립되지 못한 소유권 하에서 생태적 불균형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근대 이후의 중국의 농업생산력의 저하, 아프리카의 사막확대 등도 동일한 결과물입니다. 생태이론 곧 인구압, 혹은 불균형 등은 개인의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집단수준에서의 문제를 말합니다.
    생태이론에서는 개인과 집단으로 분석수준을 구분합니다. 개인에게 합리적인 행동일지라도 집단 수준에서는 비합리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개인이 나무를 베어가더라도, 집단수준에서 모두가 나무를 베어가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생태이론에서 무지몽매한 개인 혹은 농민을 가정하지는 않습니다. 즉 경제사학에서 가정하는 것은 무지몽매한 농민이 아닙니다.

    두번째, 산림은 본래 홍수조절기능과 수분함량(가뭄조절기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농민에 따르면 낮은 구릉지에서는 수분함량 기능이 오히려 역으로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대신에 저수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설득력 있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오카야마현과 유사한 지형 곧 일본농민이 말하는 지형이 얼마나 있는지를 지역적으로 설명하고 그 관계성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태백산맥의 줄기가 뻗어 있는 경상도 지방 혹은 남원지방을 그와 같은 지형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등등
    제 생각에 경제사학에서의 문제점은 조선을 너무 단일한 하나로 놓는다는 점입니다. 지역적 특수성을 배제하는 국가수준의 간단명료한 연구를 배제하는 것이 민속학적 연구의 시작이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세번째, 인용하신 일본농민과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비교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명히 글 자체가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산림관리시스템 혹은 집단수준의 관리시스템은 조선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일본은 각각의 무라마다 일정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소유권'을 기반으로 산림을 조림하여 시장에 내다파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입회권'이 있기 때문에 땔감을 개인이 돌아다니면서 구하기란 불가능한 시스템입니다.
    물론 이 같은 일본의 소유권이 더 우월하다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기원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합니다. 산림과 생태의 관계를 하나의 논리로 파악하기 보다는 일본과 한국의 문화, 정치, 경제 등등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고유한 형태로 발달되어 온 것으로 파악해 보면 어떨까요. 물론 19세기의 생태위기인가 아닌가는 나중의 문제로 놔두고 말이죠.


    • 낙장불입 2007/02/12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코멘트를 들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쓰신 글을 보고 제가 쓴 글들을 다시 보니 분석수준의 문제를 혼동한 측면이 분명히 있더군요. 역시 시각이나 방법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이 깊지 않았던 것이 그런 혼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시스템의 문제로서 이 문제를 풀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 수준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이 글을 작성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점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인구압의 증가나 소유권의 미정립 상태에서 생태적 불균형이 일어난다는 가정은 생태학의 그것이라기보다는 경제학 혹은 그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일부 생태학의 그것인 것 같습니다. 생태학은 대개 역방향을 취하지 않나요? 생태계의 압력으로 인구압이 조절되고 소유권을 둘러싼 제도 혹은 관행이 정립된다는 쪽으로 말입니다. 말씀하신 근대 이후의 중국(에 대해서는 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이나 현대 아프리카(만은 아닙니다만)에서 사막의 확대 등의 현상은 이 생태계의 압력이라는 고리를 끊어낸 생산력 발달 혹은 자본주의적 무역확대의 결과이고, 이것이 전근대의 농업사회에서는 거의 구현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라고 본다는 점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사용되는 예가 이스터섬의 그것인데,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생태학적 상상력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터 섬에 관한 인류학적 고고학적 자료들이 생태학적 상상의 날개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중국이나 조선의 그것들이 이러한 상상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두 번째로, 경제사학(그리고 생태학)에서 가정하는 것은 무지몽매한 농민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저는 그렇지 않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분석수준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데요. 그와 별도의 차원에서, 경제학에서 그리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일부 생태학에서 가정하는 시스템의 근본적인 출발점에는 일관되고 전일적으로 '무지몽매'한, 그리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놓여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의 제도와 관행을 이 이익추구의 결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이것이 잘 들어맞는 상황도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도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 전제를 논의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놓는 것은 선호하지 않는 편입니다. 이익추구와 그에 따른 계산의 기저에 놓여있는 '지식'이라는 차원이 블랙박스 안으로 밀어넣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블랙박스 안으로 밀어넣어진 부분들-글쎄요. 꼭 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네요. 고민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하여간 '지식'만은 아닌 것 같고요-것은 출발점이자 끝으로, 사실상 하나의 '지평'이고, 운동장에 그어진 '금'들처럼 보입니다. 골라인 밖으로 공을 몰고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골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축구선수를 하면서 골라인 밖으로 공을 몰고 나갈 생각을 하는 이가 없는 것처럼, 저는 이 경기장의 규칙과 한계들에 대해 시대적인 무차별성을 설정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모델의 무차별성을 설정하지 않는 경제학의 역사적 적용은 효용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뭐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고, 만일 옳게 이해했더라도 이건 저의 문제이기보다는 경제사의 문제이기 때문에, 좋은 문제의식을 지니신 경제사적 설명들을 많이 접하고 싶다는 욕심이라고 할 수 있겠고, 그런 것들에 접함으로써 교정될 수 있는 오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에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제도학파의 경로의존성이라는 틀은, 제가 잘 모르지만, 특히 참고할 만한 어떤 지점을 제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한편, '무지몽매'라는 표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는 것은 알겠고 저 역시 학술적으로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이 어감이 좋아서 자꾸 쓰게 되는데요. 이를 포함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들은 좀 더 정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경제사나 식민지근대화론, 문화인류학 등과 관련된 문장들이 더 많이 정제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을 단일한 하나로 놓는 문제, 일본에 대해 같은 식의 설정을 하는 문제는, 저 역시 반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하게 됩니다. 지금 쓰고 있는 학위논문 역시 이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큰 고민인데요. 이건 제가 공부와 고민,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말씀하신 바와 같은 문제의식을 저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읽고 무척 기뻤습니다. 가령 같은 '대하천' 혹은 '지천'이라고 해도, 하천과 하천부지, 연안이나 유역의 지역이 존재하는 방식이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그리고 그 안의 각 지역들 사이에서도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단지 '하천이 있다'가 문제가 아닌 거겠지요.

      단지 지적하신 문제들에 저도 충분히 동의한다는 전제 아래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생태학에서 분석단위의 문제는 사실 근본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사실 인류학이 처한 딜레마와도 비슷한 것이어서, 저는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데요. 제가 공감하고 있는, 생태학에서도 고전적인 논점 중 하나인 이 문제의식은 뭐냐 하면, 시스템은 어떤 분석단위를 설정하든 그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된다는 점이지요. 이건 모든 국지적 현장들이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편으로 균형(equilibrium) 혹은 극상(climax)이라는 전제를 포기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생태학을 칼로리에 대한 계산식으로 대체함으로써 극복되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물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생태학도 존재합니다만, 마치 수량경제사 이후에도 그밖의 많은 경제사분파가 잔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생태학의 아이디어를 원용한 어떤 비 생태학도(가령 생태사나 생태인류학이나 하여튼 뭐든) 이러한 열량의 계산식으로 자신의 연구를 대체해나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시스템의 단위'라는 문제는 계속 모든 종류의 분석에 악성 바이러스처럼 따라붙어서, 연구 자체를 새로 포맷하기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생태학의 아이디어를 원용하면서 열량에 관한 계산식으로 자신의 연구를 환원하지 않는 생태사 혹은 생태인류학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제가 생태인류학으로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고, 다른 모든 생태학적인 아이디어를 원용하는 연구들에게 궁금한 바이기도 합니다. 경제사에서 지역생태계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도 그런 점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일국생태계라는 생각도 웃긴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19세기가 생태위기인가 아닌가는 나중의 문제로 돌리는 데에는 대찬성입니다. 사실 이러한 자세가 우리 모두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분들이 하도 큰 이야기들을 하시다보니, 저같이 혈기 왕성한(사실 혈기가 왕성하다기보다는 일종의 고혈압 초기증세와 같은 것이어서, 실상 혈기가 왕성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맛이 가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덩달아 쉽게 나중으로 돌려야할 문제들에 대해 무리하게 끼어들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허허 웃고 있기만은 답답하고, 이게 참 딜레마이기도 하고, 수양이 많이 필요한 대목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한국의 문화, 정치, 경제 등등이 긴밀히 연결되어 고유한 형태로 발달되어 온 것'을 보는 관점에 대해 듣고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제가 좀 단순한 면이 있고, 기존에 부각되지 않은 자연환경의 고유성이라는 문제를 조금 강하게 부각시키려다보니, 산림과 농업의 생태적인 문제에 대해 조금 단순하게 적게 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지, '산림과 생태의 관계를 하나의 논리로 파악하지는 말자'는 뜻이 제가 이해한 것처럼 그것들만의 문제로 너무 단순하게 보지 말라는 조언이신지, 아니면 조금 다른 뜻이 있으신 것인지 하는 점이 조금 궁금합니다. 사족으로, 웃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말씀하신 뜻에 충실하려면 '일본과 한국의..'가 아니라 '일본과 한국 내 각 지역마다의..'가 되야 하는 것 아닙니까?

  8. 일본? 2007/02/16 0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대부분 공감합니다만, 논의를 더 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앞서 말씀하신 생태이론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전통사회에서는 인구압에 적응된 소위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여, 불균형이 해소되고 균형을 찾아간다는 설명은 일단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인구압을 해결해 오던 방식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소위 ‘균형’이 폭발하고 이를 타개해 나갔다는 '경제학의 설명'이 더 역동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부 경제사학자들의 문제는 (혹시 생태적 위기가 있었다면) 조선이 이를 타개해 나갈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든가, 아니면 그 능력이 어떠하였다는 점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이미 인구압으로 불균형을 겪고 나름의 타개책을 찾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생태학적 모순을 해결해 주었다는 점에만 관심이 있지, 조선 자체가 위기를 겪으면서 나가던 방향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저는 식민지에 대한 ‘객관적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이라는 블랙박스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만, 인류학적 방법론에 대한 논의입니다. 필자께서 쓰신 '시스템은 어떤 분석단위를 설정하든 그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된다는 점이지요. 이건 모든 국지적 현장들이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편으로 균형 혹은 극상(climax)이라는 전제를 포기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생태학을 칼로리에 대한 계산식으로 대체함으로써 극복되었던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 볼까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생태이론의 딜레마는 인류학 전체의 딜레마이기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현대인류학은 크게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것 같습니다. 하나는 시스템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균형이나 극상이라는 전제를 포기하고, 분석단위를 마을이나 지역수준에서 확장하여 글로벌 수준으로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 생태계의 계를 확정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조사자의 재현방식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문화를 쓴다' 등 과연 진정한 재현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밀고 나가서, 결국에는 '시적 인류학', ‘소설적 글쓰기’를 하거나 재현 자체를 포기하고 메타비판에 매달리거나 인식론적 문제에 집착하는 부류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태인류학의 문제가 분석단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계’와 ‘문화’ 개념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태적 제약 하에서 사회적 행동을 규제하여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내는 독립된 무엇으로 ‘문화’를 규정하고, 체계 자체의 모순과 능동적인 생태적 변형을 설명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기존의 ‘문화’ 개념을 포기하고, 문화 개념을 물질과 관념의 형태적 측면에만 국한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생태계라는 이름 아래서 사용되는 ‘문화’라는 개념 속에는 ‘역사’‘변화’‘모순’‘능동성’등의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생태인류학은 ‘생태계’라는 개념으로 인간사 일반에 대한 광범위한 이론을 제시하기 보다는(이는 비단 생태인류학만이 아닙니다만) 자연을 대상으로 생산하고 변형하고 정치적으로 협력하고 지배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로 초점을 돌리는 것이 한 방법이 아닐 런지요.

  9. CattivoMaestro 2007/02/19 14: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이해가 되어 간다 싶었는데, 그러고 말 것이 아닌가 봅니다.

    저는 일본? 님께서 말씀하신 댓글이 잘 이해되지가 않습니다. 사실 정확히는 동의할 수가 없다고 말해야겠지요.

    첫번째 언급하신 내용에서, 그전 덧글에서도 보았습니다만, 저는 인구압을 사회 균형이던 변화든 또 생태적인 것이든지 변화의 "원인"으로 설정하고 중심에 놓는 이론적 배경을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알다가도"는 멜서스, 스펜서류의 진화주의의 수준에서 결국 그 최고 새련된 버젼이었던 구조기능주의적인 방식에서 말그대로 알아먹을만한 논지인데요. 한데, 인구압을 언급하는 방식은 변화를 대단히 자연화하는 방식이지요. 한사람이 하던일이 떼지어 하는 일이 되고, 떼지어 하나보니 이른바 재화의 희소성이 발생하게되고 치고 받고 싸우게 되는데 승자는 "적자"였다 혹은 그 다툼이 결국 새로운 체제 역사적으로는 제국주의 식민주등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요? (일본이 자체적으로 생태적문제를 해결했다는 객관적 설명은 제가 처음 접하는 설명인데요. 어떤 정치학전공자가 자기 블로그에 일본의 근대화가 없었으면 아시아는 아프리카 꼴 났을 것이라고 쓴 걸 보고 대체나 정치적 상상력은 역시 엄청나구나 했습니다.) 먹을 것 없고 항상 생계가 예측불가였던 몽고가 야만적이이고 광폭했다는 설명도 있고... 워낙 궁금해서 좀 찾아보니, 19세기엔 조선 인구가 그나마 그 증가가 대체로 정체 상태였다는군요. 식민지 조선에대해 "객관적" 연구를 한다는 "낙성대 연구소"에서 그런 논문을 학진에서 돈 받고 했었군요. 족보를 통한 인구학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냈다고 자찬을 하던데...19세기말부터는 종두법 때문에 그러니까 사람이 많이 안죽어서 인구가 증가했답니다. 그럼 생태파괴를 통한 불가피한 식민화에는 지석영의 그늘이 있는 것인가요?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적어도 인구학적으로는 정작 식민화되기 직전엔 안정화되는 것 아닌가요? 1930년대까지는 인구가 쭉 증가했다니 말이지요. 사실 전공자도 아닌 제가"사례"를 드는 것 자체가 좀 우습습니다만, 저는 어쨌든 인구압 논의는 좀 처럼 이해가 안됩니다. 생태계 안정을 위해 전쟁이나 제노사이드가 정책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리고 사실 사람들이 좀 죽어줘야할 것 같아서 벌어진 전쟁은 없었지 않습니까?그 반대도 그렇고(물론 정치적 수사는 제외한다면). 인구압을 다양한 여러가지 원인중의 하나로 생각을 해볼 만 하겠지만, 그게 정말 결정적인지는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의심스럽습니다.
    다른 한편, "객관적 설명"이라는 것이 식민지에 가능한지도 그런게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존의 경제사학은 사실 이 선에서 논의가 전개 되었지요. 개인적으로는 식민지 학자만이 객관적 설명의 발화지점을 만들어내고 확보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구요. 그러니까 그 일본 추리농업학자마냥, 또 프레이저마냥 논리적 정합성에 입각한 외적 "객관성"을 구축할 수 있는 조건은 아주 특별한 조건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 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적절한 추상화의 권위도 가지면서, 또 최소한 학적 윤리라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테니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저는 조선이 식민지 일반의 경험을 해명할 블랙박스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판도라 상자이길 바라는 편이라서...

    두번째로 언급하신 내용에서 "생태계의 계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맞는 말인데요. 그것을 주장한 사람들이 반드시 "인식론적 문제에 집착"하는 부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히는 인식론적 문제에 집착하는 부류도 생태계의 계를 확정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가 지성사적 입장에서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글로벌-로컬과 같은 이분법은 한쪽에 기반을 둔 논의가 다른 한쪽을 전유하려는 경향성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일방의 단순 확장으로 될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것이고, 실제로도 그 이분법의 교차와 붕괴가 현재의 어떤 이론적 딜레마를 산출한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따라서 이건 조선 어느 곳을 연구하고 조선을 말하는 일반화와는 계보가 다른 이론적 흐름이 저는 있어왔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것은 전국의 여러곳을 경험적으로 연구하고 일정한 표본을 추출하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논리적 가능성을 갖는다는 식의 연구나 혹은 그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거나 그 마을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들을 해체하는 기획을 여러 인류학자들이 그간 해왔 던 것이지요. 따라서 평가하신 두 흐름은 사실 어떤 수준에서는 "재현의 논리 생산"이라는 지점에서 교차하고 있고 또 할 수밖에 없는 이론적 경향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문화"개념이 갖는 한계에 지적하신 것은 저도 동의합니다만, 그렇다고 "문화"개념이 제한적인 "분석 도구"로써 여전히 유효한지에는 의문이 남습니다. 저는 생태던 문화던 그것이 어떤 일정한 "균형"을 근본적으로 틀지우는 것으로 전제하는 한 문제적이라 보는데요. 돌이켜 보면, 구조주의자들은 문화도 나름대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내적구조가 있음을 증명하려 나름 시도했었고 또 얼마간 실패했는데, 아직 생태주의자들은 "자연적" 변화의 필연성에 신념이 남아 있는가 봅니다. 결국 저는 생태가 인간 삶에 불가항력적인 어떤 것이었는지에 의구심이 있는데, "전통사회"는 그랬다는 논리도 아프리카는 어쩔수 없다는 현재적 논리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 낙장불입 2007/02/23 16:41  댓글주소  수정/삭제

      까띠보.. 님이 폭포수처럼 공세를 쏟아내셨네요.

      문화보다는 인구(압)가 변화를 일으키는 근본동인이 될 것이라는 설명에 저도 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답변을 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까띠보.. 님의 말씀을 들으니 다시 고민이 생기는군요(그런데 참 일본? 님, 인구사와 경제사를 말씀하시는 것처럼 동일시할 수 있는 건가요?). 일단 까띠보..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구사 혹은 경제사의 일 분파가 자신의 분파의 효용성을 입증하느라 단순한 통계로부터 과도한(과도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한 설명이 가능하기 위해서 불가결한 여러 변수들에 대한 검토를 생략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지요. 까띠보.. 님이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쓰신 것은 그 생략과 비약의 경향에 대한 지적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생각에는 일본? 님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블랙박스를 파헤쳐야 한다'고 쓰셨을 것 같고, 본래 블랙박스를 선호하는가 판도라즈 박스를 선호하는가, 혹은 본래 비약과 생략을 싫어하는가 있어도 무방하고 있을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성향에 차이가 약간 있을 수 있겠지만, 판도라의 상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에 대해 일본? 님이 크게 문제삼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인구(사)와 경제(사) 또 그 밖의 여러 가지가 서로 만나는 방식은 지금 낙성대 팀의 핵심 이데올로그들(전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이 하고 있는 것과 다른 방향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쟤네들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야 하며 이상해하는 것 이상의 논쟁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논쟁을 할 만한 사람들은 관망하고, 논쟁을 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자료가 없거나 논점을 잡지 못하고 하는 식의 문제들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인구와 전쟁의 관계, 즉 전쟁의 생태적 기능이라든가 정치적 통합/배제와 전쟁의 관계, 즉 전쟁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설명과 관련해서는 사실 인류학자들이 생산한 사례도 없지 않죠. 전자는 아마 카이코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경우이겠습니다만, 야노마뫼인가도 그런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는 것 아닌가요? 후자는 뭐든가 제가 강의에서 써먹는 영국 인류학자가 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부족집단의 경계는 전쟁 전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설명을 했던.. 하여튼 그 밖에도 기타 몇 가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식민지를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지라든가, 사람들이 좀 죽어줘야 되겠다고 해서 전쟁을 하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문제가 역시 ‘문화’ 혹은 ‘사회’를 연구하는 경우에 학문 일반이 조금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학문의 논리라는 것이 당사자들이 하고 있는 설명 외의 다른 식으로 사례들을 이어붙이면서 새로운 설명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게 현지인의 입장에서는 결코 만족스러운 일이라는 게 없다는 거죠. 저도 제가 학부생이었을 때 김광억 선생님의 학생운동의례 글을 읽고 짜증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견지에서 생각해보면, 살린스와 오베예스케르인가 하는 하와이 역사학자의 논쟁이라는 것도 그렇고, 예전에 이문웅 선생님이 전국대회에서 한국전쟁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쓰셨던 글도 그렇고, 정아누나의 삼성 관련 논문이 배포중단되었던 사태도 그렇고, 지금 조금 복잡한 생각이 잘 되지 않습니다만, 인류학자들의 재기발랄한(이거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정아누나의 얘기까지 들었으니 그런 뜻이 아니라는 점이 이해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해석이 당사자들(정아 누나의 경우 당사자가 아니라 관리자들의 문제이고 당사자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배포가 중단되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경우가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사례들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인류학만의 문제가 아닐 것 같은데, 아마 인류학이 당사자들하고 가장 지근한 거리를 유지할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보니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 같은데... 이건 또 나중에 조금 더 머리가 정리되면 쓰죠.

      그것이 재현을 포기하는 것인지 새로운 재현의 논리를 생산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글로벌(혹은 글로컬)한 것에 대한 강조와 성찰적 글쓰기가 재현의 위기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은 두 분이 일단 동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물론 까띠보님은 이 두 가지로 딱 잘라 말하는 것에도 약간 불만을 가지신 것으로 보이고, 저도 약간 의문점이 들었습니다만). 그런데 이 이견은 결정적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별 거 아닌(즉 화해 가능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해서 잘 모르겠네요. 머리가 점차 굳어가고 있는 듯. 조금 뜬금없는 말씀을 드리자면, 제 생각에 이 문제는 재현의 위기라는 성격과 함께 관찰의 위기라는 문제가 겹쳐 있는데 의외로 논쟁은 전자만을 가지고 진행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글로벌(혹은 글로컬)한 것을 본다고 하면서 맨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글만 쓰고 있다든지(즉 여전히 인류학자는 배를 타고 원주민이 춤추는 해안가로 다가가고 있다든지, 아니면 글로벌 시스템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맨날 그 나물에 그 밥인 ‘동네 사람들’ 분석만 하고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관계를 성찰하겠다고 하면서 야시꾸리한 글쓰기(30년 전이나 50년 전의 인류학자도 모두 언급해왔던 문제를 자기도 언급하는 것이면서, 한 문단으로 쓰면 될 일을 한 챕터나 책 한 권으로 쓰는 식의)에만 몰두하고 있다든지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정말 재현의 위기(만)의 문제였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까띠보..님의 일본? 님처럼“문화 개념을 물질과 관념의 형태적 측면에만 국한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일본? 님이 지적하신 문화개념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는 지적, 그리고“생태든 문화든 그것이 어떤 일정한 ‘균형’을 전제하는 한 문제적”이라는 지적에는 완전히 동의합니다. 일본? 님이 어떤 답변을 하실지 궁금하군요.

  10. 일본? 2007/02/24 1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에 조금 오해가 있는듯해서 다시 올립니다.

    간단히 말하면, '일부 경제사학자들의 논의'를 정리하면 일본에서는 인구압의 문제가 조선보다 일찍 대두하였고, 일찍이 위기를 겪고 해결방식을 찾았다는 것이고, 조선에서는 그 문제가 19세기에 대두하였고, 그 방법은 일제시기에 찾아졌다는 것입니다. (해결방식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명치전일본임업기술사' 등등을 참고하면, 막부와 무라가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였고 관리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일본의 임업발달과정은 현재의 일본의 산촌의 분포형태와 운영형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문화적으로 가옥형태, 연료조달방식, 생업형태, 시장형태, 교육과정 등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조선이 어떠한 방식의 '문화'를 만들었지 혹은 만들어 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기에 무슨 말이든 말하나 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현재 경제사학을 싸잡아서 비판할 것이 아니라, 도외시된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 것으로 기쁘게 받아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인류학자의 반의반의반도 안 되며, 인류학에 비해서도 소외된 사람들이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결과물인데... 그 다음 이야기는 다음 학자들의 몫이겠지요.
    인구압은 단기적 변수로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구압은 장기적 변수이며, 또 인구압이 단순히 인구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즉 기술, 문화, 자연(물론 인공적인 자연) 등등의 변수가 함께 고려되는 개념입니다. 초기 경제사에서는 인구와 기술 간의 관계에 주목하였고, 최근에는 인구와 문화(또는 사회) 간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초기 인류학에서는 생태계의 일부로서 문화를 다루었고, 1960,70년대에는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부변수에 적응하는 형태로서 문화에 역사성을 부여하였고, 현재는 잘 모르겠습니다.
    논의가 길어질 것 같아서 '객관적 사실'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만, 블랙박스를 신봉한다는 것은 두 가지 문제를 노정합니다. 하나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블랙박스로 만들고 비판을 피해서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리에 오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과학’에 대해 무지막지한 비판을 하면서 그 결과물들을 블랙박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보면서, 실제 ‘과학’이 자신이 세상을 다 안다고 말한 적이 있던 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자들이 현재의 기술력으로 달까지 갈 수 있다고 말하면, 이제 우주정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과학’에서 조금 떨어진 이들이 아니었던가요.

    두번째로, 계를 확장시키는 논의는 글로벌화, 글로벌체제론, 헤게모니론, 식민지체제론 등등으로 수없이 발전해 왔습니다. 양자가 교차할 수는 있지만, 양자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연구방법과 목표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설탕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화 과정을 세계체제 하에서 연구한 연구서와, 설탕에 대한 고통과 즐거움을 '시와 소설'로 쓴 연구서와 그 연구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로, 제가 유효하다고 말한 '문화'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소위 전파론에서 주장한 물질형태론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적이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문화적 형태만을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박물관학에서 다루는 문화적 형태론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