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09/10/15 '민본전통/민중중심적 태도'와 '진보성'의 관계? (4)
  2. 2009/10/08 도시의 매력 (4)
  3. 2008/08/04 선물과 교환 (2)
  4. 2008/08/04 觀이란
  5. 2008/08/04 물렁하면 번뇌를 끊지 못한다
  6. 2008/06/13 돌아왔습니다 -- (3)
  7. 2008/06/13 계약, 合同, contract (1)
  8. 2008/02/19 택시기사의 말 (2)
  9. 2008/02/17 노동투하와 재산권 (1)
  10. 2008/02/17 소유권에 대한 조선시대 용어들 (6)

2009년 9월 22-23일 워싱턴디씨의 브루킹스연구소에서는 <중국 중산층의 등장>이란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많은 발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과 질문은 <중국 중산층이 과연 진보적인가, 아닌가>, <중국 중산층이 과연 사회를 뒤흔들며 변화를 이끄는 역할을 하겠는가 아니면 체제안정적인 역할에 안주하겠는가>에 압도적으로 집중되어있어, 미국사회의 관심사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한국 한상진교수도 발표를 했는데, 한국의 계층관련 연구를 계속 하다가 중국과 비교해서 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 써온 '중민' 개념을 여기에도 도입하였고, 그의 논지는:
<중국과 한국은 민본전통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중산층을 단일하게 이야기하지 말고 중산층 내부를 쪼개어 '中民(Middling Grassroots)'과 '中産 主流(Propertied mainstream)'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그 중에서 '중민'은, 중국에서 나온 설문조사자료들을 분석해보니, 한국의 중민처럼 상당히 '민중(人民)중심적인(people-first)'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정부중심적인(government-first)' 태도와 구분되더라,
그러니 더이상 중산층 전체가 보수적이냐 아니냐를 이분법적으로 논하지 말자, 나는 그런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이렇게 중산층에 대한 이중구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실제로도 다른 대부분의 발표들이 이분법적 논리에 갇혀있고 상당히 수준도 떨어지는 데 비해 이 발표는 그런 '이분법적 시각'을 지적하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이 발표의 치명적 문제점은, 그가 '민중중심적' 태도의 근거로 든 모든 사례들(-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답한 면, 사회문제들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고 불만을 표시한 점 등)은 기존의 이분법적 틀인 '진보성'에도 그대로 똑같이 들어맞는 사례들이라는 점이다.
즉, 그가 '민본전통'으로 인한 '민중중심적 태도'를 밝혀냈다며 새롭게 드는 내용들이 사실은 기존의 틀로도 다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는 문제는,
민중중심적 태도와 진보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국가보다 '인민/민중'에 자신을 더 identify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보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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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rcade 2009/10/15 0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젯밤에 읽었던 구절과 자장님의 질문이 공명하여 '웅웅' 울리는 듯 합니다. <번역>에 대한 라투르의 주장이었는데요. (미국)학자들은 귀엽기도 하지. 자국민들이 국가보다 인민/민중에 더 스스로를 일치시키는지 한번 조사해보시지. 확실한 것은 <개발도상국 맞춤형> 연구질문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 맞춤 질문들 자체가 비인간-행위자들일 수 있다는 겁니다. 자장님과 같이 보다 심각하게 중국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은 그 질문에 만족할 수 없고, <진보의 정의>와 같은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토픽의 바다에 빠지게 되겠지만요. 중산층의 진보성/체제 안주 여부라는 질문으로 <번역>되고 타사회에 대한 호기심 혹은 관심으로 연결되는 <중국에 대한 관심의 경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2. 자장 2009/10/15 0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잠깐 사이에 글이 약간 바뀌었네요. 뭔가 처음 글에 비해 다듬으신 듯한데, 처음 글이 더 멋있었던 듯. <자장님과 같이 보다 심각하게 중국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과 같은 지나치게 외교적인 말씀은 그냥 빼주셔요. 그리고 저는 사실 '중국의 미래'에 대해 크게 궁금해하지는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굉장히 한정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같아서요.
    <중국에 대한 관심의 경제> 부분은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만, 뭔가 잠깐 읽었던 원래 글이 더 제가 답하기 힘든 멋진 이야기가 있었던 듯하니 그 글도 다시 올려주셔요. 번역에 대한 라투르의 주장도 말씀 부탁합니다.
    사실 브루킹스의 저 세미나는 그 수준낮음이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아무리 브루킹스의 이런 세미나가 '중국 전문가들' 대상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다른 주제에 대해 듣고(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라고 하지만, 글쎄요, 한국에서같으면 신문에도 나지 않을(즉 일반 대중들도 중국에 대해 알 만한) 이야기들을 자랑스레이 하고 있어서 충격적이었습니다.
    어쨌든, 질문들 자체가 비인간-행위자라는 이야기는 역시, 그냥 '이분법적인 질문이다', '뻔한 질문이다'라는 식의 비판을 넘어서서 다른 지평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같습니다. 감사.

    • arcade 2009/10/15 1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래 댓글과 지금의 버전이 다른 건 자장님에 대한 <외교적 표현>이 아니라 나오키 사카이의 <번역과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다 생각이 안나서 폐기한 부분인데요. 서구의 이론 틀에서의 몇몇 개념들이 일본에 <번역>되면서 그와 연결되는 논의들이 증식하게 된다는 식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중산층이 진보적인가 아닌가"란 사회운동가들의 입장에선 쓸모없는 질문이죠.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 어떻게 선동할 것인가를 묻는 이에게 그 호명의 대상이 얼마나 진보적인가 혹은 체제순응적인가를 미리 알아야할 필요도 없고 안다해도 그 지형을 변화시키기 위한 고려대상일 뿐이겠지요. "진보성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이중구속적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기반에 중산층은 진보적인가/체제순응적인가란 가설적 질문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지젝의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왜 유럽지성계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이전 사회주의블록의 morality, 아노미, 대혼란 상태에 대해 엄청난 양의 질문을 쏟아붇느냐고 자문한 후, 그는 시장경제로의 '충격요법'의 효과, 더딘 민주주의화라는 주제 자체가 유럽의 문제를 망각하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고 단언합니다. 중국의 중산층에 대해 물으며 그것을 진보/보수의 이분법에서 사로잡힌 틀에 박힌 설문에 의지하는 행위자체가, 미국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은폐하는 <관심의 경제>라는 가설을 세워봄직도 합니다.
      사실 저 역시, 동남아 연구에서 반복되는 부정부패(corruption)에 대한 한심스러운 발표를 들으며 분통을 터뜨린 적이 있었답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부정부패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다국적 기업에 의한 것이 아니냐?"라 반문했다가 이상한 놈 취급당한 적도 있었고.

  3. 눈사람 2009/10/15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발도상국 맞춤형 질문...ㅋ
    그런데 <관심의 경제> 또는 <비인간행위자인 (자기 증식적이며, 사람들에게 말하게 만드는) 질문들의 집합>이라는 생각은 <담론>이라는 문제설정(<담론>의 개념이 열어젖힌 문제지평)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도시의 매력

분류없음 2009/10/08 13:35

아케이드가 겹쳐있는 몰(mall)은 왜 <이상적인 거리의 집합, 꿈의 도시>로 이야기되는 걸까요?
이론적인 족보는 모릅니다만, 그저 제가 홍콩에 있을 때 했던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 때 저는 중국 본토에서 오려는 사람들을 현지조사하며 내내 스스로 그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왜 이들은 여기 와서 그토록 비좁고 비참한 방에서 살면서도 행복하다고 하는가,
왜 이들은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홍콩의 번화가와 바닷가에서 돌아다닐 때 그토록 행복한 얼굴을 하는가.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객관적인' 이유들 말고도요)

제가 오래 있으면서 그들과 많이 동화가 되며 느낀 것 한 가지는,
홍콩의 매력은, (그리고 아마 많은 도시의 매력은)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내가 그것을 '누리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몸을 뉠 곳은 비좁은 뒷골목 방이지만,
나는 언제든지 뛰쳐나와서 황홀한 야경을 즐길 수 있다는 것.

몰이 꿈의 도시인 이유가 혹시 이런 것과 관련이 되나요?
아니면 전혀 다른 '구조'의 문제인가요?


어쨌든 저 자신은 도시의 북적거림 속에서 분명 '흥분'을 느낍니다.
남들이 다 좋아하는 바닷가나 산이 아닌, 도시의 뒷골목과 시장을 다닐 때 가슴이 뛰고요.

4대강이니 대운하니 하는, 한 지도자의 오래된 '아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발과,
을씨년스럽게 버려질 수도 있지만 또 한동안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킬 몰의 건설을 똑같이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러면 오히려, 설명되어야 할 그 사람들의 '흥분'은 묻혀져버리는 것 아닐까요?
<엄청난 규모의 파괴와 비효율적인 결과>라는 묘사는 본의아니게 많은 부분을 사상해버리는 것 아닐까요?

이 글은, 아케이드님 본인도 반둥의 거리에 느끼는 '매혹'과 어떻게 연관이 되나요?


물론, 서울역을 비롯하여 사방에 생겨나는 그 수많은 판박이 쇼핑몰들이 얼마나 천박하고 웃긴지를 모르는 바 아니며, 결국 그런 판박이 경쟁 속에서 서로를 죽이게 될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코엑스쇼핑몰과 명동을 돌아보며 제 홍콩 친구가, 정말 한국은 24시간 너무나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곳같다며 흥분하던 것은 또 사실입니다.

물론 고전적인 진부한 설명틀이 또 생각납니다: 예를 들어 타임스 스퀘어를 비롯해어 유명 도시들의 유명한 장소들은 단지 아케이드나 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곳에서 많은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는.
그러나 아케이드님의 '인간/비인간 행위자'의 틀에서는 아마 이런 식의 진부한 구조(- 즉 '인간의 활동 = 의미' vs. '인간의 활동이 들어가지 않은 장소 자체 (또는 인간의 활동을 배제한 채 똑같이 복제되는 장소들) = 무의미(=죽어있음)')를 넘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케이드님의 '비인간행위자' 틀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흥분'은 어떻게 처리되는 건가요?
또, 아케이드님의 틀에서는 그런 <도시의 북적거림과 웅성댐>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TAG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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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도시의 접힘과 펼쳐짐

    Tracked from 나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2009/10/08 16:38  삭제

    도시정글, 자카르타 베짝, 바자이, 앙콧, 트랜스 자카르타. 오토바이. 이들은 도시정글을 누비는 탈 것들이다. 도시공간은 주름져있다. 그것은 온갖 것들에 의해 접히고 그 접힘을 공간을 복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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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눈사람 2009/10/08 1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질문이 와닿네요. '비인간 행위자' 틀에서 '감정'의 지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2. 양양 2009/10/08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임스퀘어의 소문을 듣고 어제 언니랑 구경을 갔었는데요, 2시간도 채 안 되어서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울 언니가 그랬답니다. 기분전환하려고 나왔는데, 자본의 힘에 눌려서 간다고. 제가 한 마디 덧붙였죠. 정말 돈이 없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체력이 딸려서 그 힘을 상대할 수 없다고요. 공간을 즐기려면, 그러니까 자기 장소로 만들려면 걸어다니면서 접수가 되어야 하는데, 타임스퀘어는 그러기에는 너무 커요. 여유로운 공간 배치 때문에 흥분보다는 차가운 세련됨이 느껴지는 곳이라고나 할까...

  3. 눈사람 2009/10/08 1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임스퀘어에 한번 가봐야겠어요. 집에서 멀지 않은데.

  4. arcade 2009/10/08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랙백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만, 제가 4대강 : 대형몰을 나란히 놓은 이유는, 시대착오적? 국가주도형 토건국가론(사실 토건국가론자체가 지진국가론 만큼이나 흥미롭고도 위험한 담론이죠)에 대해서는 "말"이 쌓여가지만, 도심재개발에 의한 대형몰의 건설에 대해선 "말들"이 미끄러져가는 상황에 대해 의아하다는 뉘앙스였습니다. 당연히 전 2009년 한국의 <배치> 혹은 <장치>로서 꿈의 도시인 겹쳐진 아케이드가 그 비효율과 파괴의 크기만치 강렬한 열광과 설레임을 만들어내내고 있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기획에서 대형 몰이 머지않아 썰렁한 실패작으로 버려지게 될지 안될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벤야민도 파리 아케이드의 몰락 후에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구상했으며, 푸코가 분석한 판놉티콘이 벤담의 설계대로 실현된 예는 거의 없었죠. 그것들은 <추상기계>들이기 때문입니다.

선물과 교환

소유권 2008/08/04 11:08
마르셀 모스나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선물과 더불어 답례가 의무로 강제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의무화된 답례를 수반하는 한, 선물을 교환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환밖에는 사물의 순환을 알지 못하는 근대의 서양인의 시선이, 교환의 외부에 있는 것을 교환의 일종으로 포획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이항적인 선물조차 선물과 답례는 두 번의 선물이지 교환이 아니다.
교환이 어떤 식으로든 등가성을 원리로 하는 반면 의무화된 선물은 그런 등가성을 원칙으로 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받은 것보다 더 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령 추장에게 필요한 물건을 받고 그 대신 '존경'을 주거나 '권위'를 제공하는 경우에 대해서조차 어떤 것들이 교환된다는 점에서 교환이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교환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만큼 아무 것도 지칭할 수 없는 무의미하고 무능한 단어가 됨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그 때에도 교환이라는 단어가 선물을 선물로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선물의 순환을 교환의 상업적 활동으로 변환시키고 있다는 점을, 이로써 생명의 순환적 흐름은 소유자를 표시하는 한 점에 귀속되고 소유될 어떤 사물의 집합으로 오해되며, 그 결과 코뮨적 순환계는 화폐의 권력에 의해 파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더불어 지적해야 할 것이다.

- 이진경, "공동체주의와 코뮨주의", <문화정치학의 영토들>(이진경 편저, 2007, 그린비) 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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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랜만에 2008/08/09 1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이진경은 선물을 선물 자체로 보는게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膳物을 先物로 보지 말자는 말인가요? 아니면 진(짜)경(제학자)로써 보니 先物은 교환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요? 이진경은 문화정치를 뭔가 신비로운 것, 혹은 근본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膳"과 "先"의 관계라면 뭐 그럴싸하겠는데, 물 자체가 인격화 되는 순간에 벌어지는 것은 교환이 아니라 재현이나 현현의 수준에서만 파악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러니까 자연은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보고 살자는데까지 나아가보고 싶은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 생각엔 교환의 논리(근데 교환의 상업적 논리는 뭔논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교환이 화폐에 지배되는 논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되는데 동양인은 화폐 모르고 살았단 말을 하고픈것도 아니고)가 모든 것을 지칭할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해진 사태를 선물에 대한 관점의 복원을 통해 무력화 시킨다는 발상은 조금 이상하네요. 전지전능함은 무능함으로 바로 치환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무능과 무력조차 그 내부 논리로 흡수한다는데 그 비밀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의심해보고 반발도 해봤자 어차피 되돌아 올 탕자들이라고 선언해주는 것이고, 현시 하지 않음에도 언젠가 "return" 할 것이란 상태를 조성해주는 것이야 말로 전지전능한 것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최소한 그이의 논지를 따라가 준다할때.. 사회적 교환에서 膳物이 先物로 왜곡된다고 말해지는, 그러니까 교환내부에 어떤 약정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논지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先物을 膳物로 되돌릴 수 있달지, 先物을 膳物로 봐야한달지 같은 것으로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환과 소유를 연결시켜 화폐권력을 비판하는 논지도 시적으로는 탁월합니다만, 사실 교환관계가 전지전능한 논리로 작동하고 "회전"이던 "순환"이던 가속도가 붙으면 소유 자체가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비인격적 사물이 인격화 된 후에 인격체가 비인격화되는다는게 자본론에서의 화폐비판의 한 논리인 것도 같은데요. 그러니까 소유는 점으로 귀속되기 보다는 제 생각엔 점으로 위치화된다 거나 그게 아니라면, 사실 귀속은 항상 집합적으로만되는 것이는 사실을 보이는게 의미있어 보입니다. 점으로 귀속된 것을 집합으로 오해한다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쉽지않은 일인것도 같구요.오히려 그 반대가 일상적인 착시현상일텐데. 명확히는 이미 점이 집합인 것이고, 따라서 오해가 아니라 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지요. 하여간 갸우뚱해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 신용교환이 싹터서 금괴를 자기 집안에 안쌓아 놓고도 시장안가고도 싸이버 트래이딩들을 익명적으로 크래딧, 마이너스 통장의 힘을 빌어 하기도 하는것 아닌가도 싶은데..제가 상상력이 원체 세속적이서...

    뭐 이진경이 말하는 선물이 소비되는 재화의 어떤 국면, 그러니까 자산의 소비가 교환역과의 경계역에서 행해질 때, 등장하는 환상에 대한 것이라면 또 모를까도 싶습니다만... 뭐 그런 국면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기대없이" 혹은 "조건없이" 내가 가진 자산을 소비한다는 어떤 가능성이 또 마련되긴 하는 것 같고... 그 모든 "교환적 순환계. 꼬뮨적이던 공동체적"이던 것의 사슬이 끊길수도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영토가 만들어지는 것 같은데요.

    "추장 사례"는 기계적 교환론에 대한 비판인것 같다해도 그건 또 보면 추장한테 뭐 못 받은 사람도 존경이나 권위를 바치기도 하는게 사회인 것이고 그 사태를 선물과 교환의 이분법속에서 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뭐 사실 안주고도 줬다고 우기거나, 안 받고도 받았다고 착각하거나 믿고 되돌려 줘야한다고 생각하는 사태가 상상적 교환체계가 만들어낸 정치의 정수가 아니겠냐는 생각입니다만.

    좀 뜬금 없은 말인데요. 약한고리"만" 끊자는 레닌류도 문제지만, 자꾸 아틸란티스류가 문화정치영토라고 우기는 것도 난감한 생각이 좀 들어 적어봅니다.

    근데 꼬뮌적 순환계는 "있어왔던 것"인가요 "도래할 것" 혹은 "구성될 것"인가요? 후자인 것은 같은데,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은 또 무슨 예언일까도 싶고. 궁금하네요. 그 꼬뮌적 순환계라는 것이..교환이라는 단어를 머리속에서 지우면 등장하는 "동양적" 순환계치곤 이름이 너무 "바게트"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

  2. 저도 오랜만에 2008/10/10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들어와서

    간만에 이진경씨의 글을 보니,

    무슨 소린인지 원. 이론도 아니고 말 장난도 아니고,

    수필을 쓴거라면 괜찮기는 한데... 정말 황당한 글쓰기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이런 말장난스러운 황당한 글쓰기를

    간만에 보니 반갑기는 하네요.

觀이란

분류없음 2008/08/04 11:00

옥편에서 '觀'자를 찾아보면 새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원래의 뜻은 눈 언저리가 붉은 황새가 눈을 크게 뜨고 먹잇감을 보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들판에 황새가 서있는 모습을 보면 별로 움직임이 없다.
고요한 상태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모습니다.

30년동안 동물관상법을 연구해온 전주의 黃山선생은 황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올빼미에 觀자를 비유한다.

낮이 아닌 밤에 올빼미가 날개를 접고 먹잇감을 바라보는 것이 觀자의 본래 의미라는 것이다.
올빼미 자신은 상대를 볼 수 있지만, 상대는 올빼미를 보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렇게 올빼미의 눈으로 사람의 관상을 보아야만, 그 사람의 내면에 담겨있는 에너지가 동물의 형상으로 도출된다고 주장한다.
 
- 조용헌 살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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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金剛經이 있다.
 '金剛'은 단단하고 예리함을 뜻한다.
물렁하고 둔탁하면 번뇌를 끊지 못한다.
무엇이 단단하고 예리하단 말인가?
바로 지혜이다.
인생의 근심과 고민은 지혜가 아니면 끊지 못한다.

- 조용헌 살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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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 타려고 한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그 사이에도 와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

작년에 강의 계속하면서  애기 낳느라 수업시수를 조금만 채워서, 이번 학기 채우느라 수업도 너무 많았고, 중간에 북경에 한중일 인류학자 워크샵한다고 다녀오면서 그것도 은근히 부담되었고 등등, -- 그 사이에 특별히 연구에 진척이 없어서 못 들어왔습니다.

다들 잘 지내시는지 --.
저는 관행조사 관련 연구소에서 '소유권' 부분을 맡아서 자료조사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진척이 없고 너무 넓어서, 토지와 부동산의 매매와 계약으로 좁혀서 자료조사 및 공부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혼자 할 듯하고요.
근데 이걸 가지고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는, 아직 낯선 분야여서 막막하네요.
어쨌든, 다시 좀 시작해보겠습니다.

(애 낳고 컴퓨터 보면서 눈이 계속 너무 나빠져서, 이렇게 큰 글씨가 좋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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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똠비 2008/06/14 0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오셔서 반갑습니다~ 큰 글씨도 환영이구요!^^
    저는 논문 마감 미루고, 시간이 좀 생겼으니 맥퍼슨을 제대로 읽어볼까 하고 책을 빌려다 놨는데, 1962년 판이라 종이와 인쇄상태가 매우 구려서 책상 한쪽에 밀어놓고 있답니다..^^ 많이 읽는 고전일텐데 희한하게도 1962년 이후에 새로 나온 건 없더라구요.. 여름 가기 전에 들춰보기나 할런지... 더위에 몸조심 하시고 아기들이랑 재미난 여름 보내세요~

    I wish you a healthy and productive summer!
    (여름 방학이 긴 이쪽에서는 서로 이렇게들 인사하더군요.^^)

  2. 장정아 2008/06/16 2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반갑습니다. 논문 마감을 미뤘다는 건, 한 학기를 미룬 건가요? 쩝. 금방 보는 줄 알았더니. 암튼 -- 재미난 여름은 뭐, 그저 이번 학기는 너무 힘들었고 공부를 너무 못해서, 방학땐 어디 안 가고 공부나 실컷 해야지 그러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생산적 여름'을 만듭시다.

  3. 똠비 2008/06/20 1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핫.. 제가 비행기표를 미리 사는 일로 상담드린 일을 잊으셨나요..?^^ 이미 변경불가능한 비행기표를 사 놓았으니 일단 귀국일정에는 변함이 없답니다..^^ 어차피 커미티들도 다 아프리카에 유럽에 흩어져 있으니 학생이 어딘들 못가겠어요?^^ 어쨌든, 곧 봅니다요~~

중국에서 명청시대에, '契'와 '約'의 용법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지만 '契'는 중요하고 공식적인 문서들에 많이 쓰인 것으로 보이고 '約'은 일종의 약식문서라는 느낌을 주었다. --

또 당사자 쌍방합의의 기초위에 만들어진 약정이더라도, 당시의 '契'는 문서에서 쌍방의 권리의무를 반드시 명확히 기재하진 않았고, 또 쌍방의 서명을 꼭 쓰지도 않았다. 이렇게 雙務관계를 강조하는 계약은 종종 '合同'이라는 특별한 명칭을 붙였다.

당시 대다수의 契는 만일 매매일 경우에는 賣主가 買主에게 주는 문서임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내용은, 契는 賣主가 買主를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 부동산의 권리를 買主에게 양도함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일부 賣主와 유사한 이가 보증을 하였다. 당시에 부동산의 귀속을 증명하는 각종 문건 중에서, 이렇게 原소유자가 쓴 문서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분명히 契는 당사자 쌍방간에 달성한 합의의 기초위에서만 제작되는 문서였지만, 그 이면에 권리의무에 대한 기재는 종종 당사자 한쪽의 표현방식을 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contract'에 해당되는 중국어는 '契約'과 '合同'인데, 오늘날 중국의 현행 법제에서는 '合同'을 더 많이 쓴다. 이는 雙務 성격을 분명히 표시하는 '合同'과 비교할 때 중국어에서 '계약'이라는 용어가 오늘날에도 어떤 한쪽만 의무를 진다는(單務) 어감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 岸本美緖, "明淸契約文書", <明淸時期的民事審判與民間契約>(199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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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ranger 2008/07/04 08: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학이라 돌아 왔구나.
    학진에서 명저 번역 프로젝트 책 중에 맥레난의 'Ancient law'가 있던데, 네가 지금 하는 프로젝트와 관련이 아주 깊은 듯. 맥퍼슨 이전에 서구 '재산권' 개념의 고전이라 소유권 논의에서는 모두 이 책을 출발점으로 하던데. 책이 별로 길지도 않고 영어도 간결명료한 듯 하던데. 그러니 신청을 한번 해 보심이 어떨런지? 난 하고 싶었는데 자격이 안 돼서 못 하겠더라. 마감이 7월 15일이던데.
    난 요즘 하는 거 없이 바빠서 여기도 정말 간만에 들어와 봤더니 네가 컴백해 있더구나.

이번엔 그야말로 쉬어가기 코너에 맞게 가벼운 얘기 하나.
어제 택시에서 있었던 기사와의 대화.

나: 숭례문 불난 다음엔 지나가보셨어요?
기사: 지나가봤죠.
나: 가까이 가서 보면 진짜 속이 쓰리고 그래요?
    ("아,그럼요,그거 진짜 나쁜놈이예요" 류의 말을 예상하며)
기사: (잠시 침묵 후) 뭐.. 속이 쓰린 사람도 있겠죠. 하나같이 다 그렇지야 않겠죠.
나: (웃으며) 예...
기사: 어쨌든 그 불지른 사람이 생각하게 해준 게 있는 거죠. 문화재가 뭔지 평생 생각 한번 안해본 사람들한테도 한번 실컷 문화재니 뭐니 얘기 들어보게 해주고.  
나: (감탄하며) 예, 하긴 그렇네요.    
기사: 세상이 다 그런 거예요. 깨끗하고 좋은 사람들만 있으면 안되고, 나쁜 짓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야 또 사람들이 생각도 해보게 되고 먹고 살기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나: 예, 정말 맞는 말씀이예요.
기사: 보통때 이렇게 차가 막히면 짜증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 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 하죠? 근데 설연휴 때 차 진짜 안 막히고 좋을 것같죠? 우리 택시는 손님이 없어서 또 힘들어요. 세상이 그런 거라니까요. 사람들 없으면 좋을 것같아도, 사실 사람들 없으면 또 힘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 되요.
나: 와, 진짜 좋은 말씀만 하시네요.

어찌 생각하면 뻔한 말같지만 요즘의 저에겐 특별하게 다가온 기분좋은 대화였습니다.
그래서 내릴 때 장장 500원의 잔돈을 제가 안 받았습니다.
"좋은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요"라고 하면서.


* 사족.
그 후 이어진 대화.
기사: 내가 예전에 개인운전기사를 했었거든요. 그 집이 진짜 돈이 많은 집이었어요. 그런 집은 딸을 돈많은 남자한테 안 보내요. 좀 떨어지는 집 남자(대신 좀 똑똑한)랑 결혼시켜서 자기 맘대로 할려고 하지. 근데 그 남자 보면, 저러구 살면 뭐하나 싶더라구. 맘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 딸은 나한테 몇 천원씩 밥값하라고 쥐어주기도 하는데, 사위는 글쎄 토큰을 열 개씩 사서 들고 다니더라구. 아니 돈많은 집 들어가서 그러구 살면 뭐해? 내가 낫지.
나: 예,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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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장불입 2008/02/20 0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대단한 분이네요. 오랜만에 내공 있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블로그 연 거 알았는데, 며칠 제대로 못 들어온 사이에 엄청난 글들과 댓글들이 달렸군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읽고 댓글 달아야하는지 모르곘어서, 그냥 여기서부터 인사 드립니다. 나머지는 시간 날 때 또 와서 볼께요.

    블로그 개설 축하드리고, 종종 놀러올께요.

    제 블로그는 잘 있는지 원..

  2. 장정아 2008/02/20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주셔서 감사. 옮겨가신 생활은 어떤지. 저도 이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으니, 가까이 있으면서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일본어공부에라도 나가보려 하니 그렇게라도 얼굴볼 수 있겠죠.

지난번 소유권 세미나에서, 로크를 노동투하설로만 보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다음번에 노직크의 비판도 보기로 하였습니다.
예전에 세미나했던 내용들을 보다가 관련 내용이 나와서, 일단 정리해둡니다.

<재산권에 대한 기존의 명제들(개인의 권리이다/ 물건 자체가 아니라 권리이다/ 강제력을 수반하는 요구인 한, 그것은 사회(국가,법)의 창조물이다) 어느 것도, 재산권이 배타적 권리여야 한다는 결론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럼 왜 재산권이 배타적 권리로 여겨지게 되었는가? 이는 당시 상황(노예-농노와 자유인-시민을 평등하게 보기 어려웠으므로 자유인-시민의 재산권을 논하기 위해서는 배타적인 권리로 만들어야 했던) 때문.

그럼 자유주의이론가들은 왜 아직도 재산권을 배타적 권리로 보는가?
노동은 개인의 소유라는 가정 -> 재산권 정당화 -> 배타성 강화하게 됨.
로크, 벤담, 밀, 그린 등.

그리하여 생겨나는 새로운 문제는:
노동의 투하라는 새로운 조건은 비록 재산권을 정당화해주긴 했지만, 생존에 대한 권리 자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재산권이 왜 인간에게 필수적인가에 대한 답은 생존의 필요 때문이지 노동의 투하일 수는 없었다. 아무 재산도 갖지 못한 개인들은, 노동을 하고서도 그 노동이 투입된 대상을 소유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산권을 못 갖게 된다. 이것이, 노동으로부터 재산권 개념을 도출해낸 것의 결과요 모순이었다.>

- 출처: "자유민주주의와 사유재산권"(맥퍼슨), 원래 1975년도 <Domination>(Alkis Kontos)에 실렸었음. <재산권사상의 흐름>(김남두 편역, 1993, 천지)에 수록)


<로크는, 점유권에 대한 제한 중 '자기 노동력을 투하한 만큼만 점유해야 한다'는 제한을, 화폐도입을 통한 임금관계를 통해 극복하였다. 로크가 임금관계를 정당하다고 본 근거는, 노동력이 재산일수록 그것은 양도가능하므로, 노동력을 산 사람은 그 생산물을 점유할 자격이 있다고 본 데 있다.>

- 출처: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s)(1972, C.B.MacPherson,황경식,강유원 옮김, 1990, 박영사)
(여기에서 '점유'라는 것은 아마 appropriation 인 듯한데 원문을 못 찾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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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장불입 2008/02/20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산권에 대한 기존의 명제들 어느 것도, 재산권이 배타적 권리여야 한다는 결론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한편 배타적 소유권의 고향은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인 것으로, 즉 상업적 거래의 편의(거래가능한 물량의 확대, 거래경로의 명료화, 거래절차의 단순화, 거래결과의 안정화와 같은 것들)를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만, 이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 하면 그건 역시 거래 가능한 물량의 확보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일물일권적인 등기제도가 물건에 대한 개인의 배타적 소유권을 확정해준다는 생각 자체가 법이념 배후의 법적 현실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영양가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이 발제하신 이야기에 비추어보아도, 역시 '노동자'가 '토지의 속박'이나 '전통적 촌락공동체'로부터 풀려나오는 것이 노동력 상품화의 전제가 되는 과정이라는 논의와 관련하여 제가 생각하고 있던 점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졸려서 횡설수설이군요. 오랜만에 들어온 김에 글을 쓴다는 것이 쓴다는 사실 자체에 매몰되어 내용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네요. 시류의 용어로는 '몰입식 댓글'이라고나 할까.. 그럼 안녕히 주무셔요.

* 조선시대에는 소유물이나 소유권에 대해 '己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내 물건'이라는 뜻으로서, '나'라는 인격과 결합된 대상은 나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 아, 그런데 지금 보니, '내 물건'이란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게 곧 <'나'라는 인격과 결합된 대상은 나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하는 의문이 드네요(지난 번 세미나의 성과입니다. ^ ^). 즉,
1) 소유권에서 사람과 사물을 완전히 분리하여 보는 것도 한 흐름인데(서구의 주요 흐름), 이렇게 분리되었되 나라는 인격과 결합된 것으로 보는 거냐, 아니면 대상을 나와 '같은' 것으로 (일치시켜) 보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일 듯합니다.  
2) 그리고 사물을 곧 '나라는 인격'과 결합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소유대상(사물)도 있을 수 있는 것이죠. 즉 '소유'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모든 소유대상에 대해 다 소유자의 '인격'과 결합된다고 보는 건 아니라는 거죠.

* 조선시대 소유 관련 관용어들로는, 有, 私有, 己有가 있었다.
- 공식문서에서는 '執持'란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는데('자기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도록 꽉 쥔다'는 뜻), 이는 소유권자가 합법적으로 소유한 경우, 그리고 토지,가옥 등 부동산에 대해서만 사용하였다. 배타적인 지배가능성을 뜻하는 법률상의 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 반면 동산에 대해서는 '휴대한다'는 뜻의 '持'를 사용하였다.

* 조선시대 후기부터는 '次知'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관리,지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동산,부동산에 대해 모두 사용하였다. (즉 소유하되 점유를 안 할 수도 있다는 의미)

* 執持: 사실적,구체적. 토지를 계속 가지고 있는 상황 (소유와 점유 未分)
  次知: 추상적. 지주제도 보편화, 토지거래 증가, 토지권리 가치화되는 상황.
          소유와 점유 분화.
- 집지에서 차지로의 변화는, 이용에서 가치로의 변환을 보여줌.
 
- 출처: <소유권의 역사>(윤형철, 1995, 법원사) pp.17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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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똠비 2008/02/17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혹시 possessive individualism (소유적 개인주의? 어떻게 번역되고 있나요?)에 관한 내용도 세미나 일정에 있나요?

  2. 장정아 2008/02/17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예, 소유적 개인주의로 번역되는데,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1962, Macpherson)을 그렇잖아도 예전에 읽었고요, 그 중 일부를 방금 '소유권'에도 올렸습니다. 이 책은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1990, 박영사)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소유적 개인주의도 사실 결국 관련될 수밖에 없는데, 아직 저희는 본격적으로 그것 자체를 다루진 않고 있습니다.

  3. 장정아 2008/02/17 16: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유권 세미나 카페 모르시던가요?
    카페주소 메일로 보내드릴께요.
    예전 세미나내용과 발제문들 올려져있고, 앞으로도 계속 올릴 예정입니다.

    • 똠비 2008/02/17 17: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아 감사합니다..^^사실 맥퍼슨의 그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엄두가 안나서 어디 누가 한글로 발제해놓은 거 없나 하고 찾는 중이었답니다...ㅋㅋ

  4. rlagur 2008/02/18 0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논의를 돕기 위하여 한마디 첨부하겠습니다. 조선시대에 다른 문맥에서 己가 긍정적으로, 최소한 윤리적으로 중립적으로 사용된 예는 거의 없습니다. 己에 대한 자기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어서 극기라는 글에서 불 수 있듯이 己란 늘 제거하여야 할 사욕으로 여겨졌습니다. 기물에서의 기가 과연 인격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따져보아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5. 장정아 2008/02/19 16: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정신없어서 못 들어왔습니다. 역시 라구르님같은 분이 계시니 저같이 역사지식이 짧은 사람들에겐 너무 도움이 됩니다.
    라구르님 말씀을 들으니 더더욱, '기물'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나라는 인격과 결합된 대상은 나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라고 하는 진술은 문제가 있는 듯하네요.
    그런데 양양님과 세미나할 때 들은 이야기로는, 조선시대에 이미 사적 소유가 상당히 확립되어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이런 점에서 본다면 조선시대에 대해서도 '개인주의'가 상당히 발달되어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라구르님의 말씀대로 己라는 것이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면, '사적 소유의 확립' 그리고 '개인주의의 발달'과는 모순될 텐데요, 이 양자가 어떻게 공존했던 걸까요?
    매우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