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과 교환

소유권 2008/08/04 11:08
마르셀 모스나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선물과 더불어 답례가 의무로 강제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의무화된 답례를 수반하는 한, 선물을 교환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환밖에는 사물의 순환을 알지 못하는 근대의 서양인의 시선이, 교환의 외부에 있는 것을 교환의 일종으로 포획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이항적인 선물조차 선물과 답례는 두 번의 선물이지 교환이 아니다.
교환이 어떤 식으로든 등가성을 원리로 하는 반면 의무화된 선물은 그런 등가성을 원칙으로 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받은 것보다 더 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령 추장에게 필요한 물건을 받고 그 대신 '존경'을 주거나 '권위'를 제공하는 경우에 대해서조차 어떤 것들이 교환된다는 점에서 교환이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교환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만큼 아무 것도 지칭할 수 없는 무의미하고 무능한 단어가 됨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그 때에도 교환이라는 단어가 선물을 선물로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선물의 순환을 교환의 상업적 활동으로 변환시키고 있다는 점을, 이로써 생명의 순환적 흐름은 소유자를 표시하는 한 점에 귀속되고 소유될 어떤 사물의 집합으로 오해되며, 그 결과 코뮨적 순환계는 화폐의 권력에 의해 파괴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더불어 지적해야 할 것이다.

- 이진경, "공동체주의와 코뮨주의", <문화정치학의 영토들>(이진경 편저, 2007, 그린비) 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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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랜만에 2008/08/09 1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이진경은 선물을 선물 자체로 보는게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膳物을 先物로 보지 말자는 말인가요? 아니면 진(짜)경(제학자)로써 보니 先物은 교환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요? 이진경은 문화정치를 뭔가 신비로운 것, 혹은 근본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膳"과 "先"의 관계라면 뭐 그럴싸하겠는데, 물 자체가 인격화 되는 순간에 벌어지는 것은 교환이 아니라 재현이나 현현의 수준에서만 파악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러니까 자연은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보고 살자는데까지 나아가보고 싶은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 생각엔 교환의 논리(근데 교환의 상업적 논리는 뭔논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교환이 화폐에 지배되는 논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되는데 동양인은 화폐 모르고 살았단 말을 하고픈것도 아니고)가 모든 것을 지칭할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해진 사태를 선물에 대한 관점의 복원을 통해 무력화 시킨다는 발상은 조금 이상하네요. 전지전능함은 무능함으로 바로 치환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무능과 무력조차 그 내부 논리로 흡수한다는데 그 비밀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의심해보고 반발도 해봤자 어차피 되돌아 올 탕자들이라고 선언해주는 것이고, 현시 하지 않음에도 언젠가 "return" 할 것이란 상태를 조성해주는 것이야 말로 전지전능한 것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최소한 그이의 논지를 따라가 준다할때.. 사회적 교환에서 膳物이 先物로 왜곡된다고 말해지는, 그러니까 교환내부에 어떤 약정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논지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先物을 膳物로 되돌릴 수 있달지, 先物을 膳物로 봐야한달지 같은 것으로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환과 소유를 연결시켜 화폐권력을 비판하는 논지도 시적으로는 탁월합니다만, 사실 교환관계가 전지전능한 논리로 작동하고 "회전"이던 "순환"이던 가속도가 붙으면 소유 자체가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비인격적 사물이 인격화 된 후에 인격체가 비인격화되는다는게 자본론에서의 화폐비판의 한 논리인 것도 같은데요. 그러니까 소유는 점으로 귀속되기 보다는 제 생각엔 점으로 위치화된다 거나 그게 아니라면, 사실 귀속은 항상 집합적으로만되는 것이는 사실을 보이는게 의미있어 보입니다. 점으로 귀속된 것을 집합으로 오해한다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쉽지않은 일인것도 같구요.오히려 그 반대가 일상적인 착시현상일텐데. 명확히는 이미 점이 집합인 것이고, 따라서 오해가 아니라 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지요. 하여간 갸우뚱해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 신용교환이 싹터서 금괴를 자기 집안에 안쌓아 놓고도 시장안가고도 싸이버 트래이딩들을 익명적으로 크래딧, 마이너스 통장의 힘을 빌어 하기도 하는것 아닌가도 싶은데..제가 상상력이 원체 세속적이서...

    뭐 이진경이 말하는 선물이 소비되는 재화의 어떤 국면, 그러니까 자산의 소비가 교환역과의 경계역에서 행해질 때, 등장하는 환상에 대한 것이라면 또 모를까도 싶습니다만... 뭐 그런 국면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기대없이" 혹은 "조건없이" 내가 가진 자산을 소비한다는 어떤 가능성이 또 마련되긴 하는 것 같고... 그 모든 "교환적 순환계. 꼬뮨적이던 공동체적"이던 것의 사슬이 끊길수도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영토가 만들어지는 것 같은데요.

    "추장 사례"는 기계적 교환론에 대한 비판인것 같다해도 그건 또 보면 추장한테 뭐 못 받은 사람도 존경이나 권위를 바치기도 하는게 사회인 것이고 그 사태를 선물과 교환의 이분법속에서 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뭐 사실 안주고도 줬다고 우기거나, 안 받고도 받았다고 착각하거나 믿고 되돌려 줘야한다고 생각하는 사태가 상상적 교환체계가 만들어낸 정치의 정수가 아니겠냐는 생각입니다만.

    좀 뜬금 없은 말인데요. 약한고리"만" 끊자는 레닌류도 문제지만, 자꾸 아틸란티스류가 문화정치영토라고 우기는 것도 난감한 생각이 좀 들어 적어봅니다.

    근데 꼬뮌적 순환계는 "있어왔던 것"인가요 "도래할 것" 혹은 "구성될 것"인가요? 후자인 것은 같은데,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은 또 무슨 예언일까도 싶고. 궁금하네요. 그 꼬뮌적 순환계라는 것이..교환이라는 단어를 머리속에서 지우면 등장하는 "동양적" 순환계치곤 이름이 너무 "바게트"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

  2. 저도 오랜만에 2008/10/10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들어와서

    간만에 이진경씨의 글을 보니,

    무슨 소린인지 원. 이론도 아니고 말 장난도 아니고,

    수필을 쓴거라면 괜찮기는 한데... 정말 황당한 글쓰기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이런 말장난스러운 황당한 글쓰기를

    간만에 보니 반갑기는 하네요.